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커뮤니티
자유투고
생활문답
벼룩시장
구인구직
행사알림
먹거리
비어가든
갤러리
유학마당
유학문답
교육소식
유학전후
유학FAQ
유학일기
독어마당
독어문답
독어강좌
독어유머
독어용례
독어얘기
기타
독일개관
파독50년
독일와인
나지라기
관광화보
현재접속
352명
[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사는얘기 헛소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 poesie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3,429회 작성일 02-01-17 02:33

본문

 


헛소리 img31.gif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빛이 잘 들지 않는 구석방의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곤 했습니다.
그가 조그만 아이일 때 책 안에는 어여쁜 공주와 가난하고 착한 소녀와 환한 빛이 온누리에 가득한 들판과 이상한 동물들이 사는 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조금 더 자랐을 때 책 안에는 사색에 빠진 시인과 바다에 도전하는 노인과 혁명을 꿈꾸는 청년과 오렌지 나무 아래 그늘에서 속삭이는 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다 자라 겨우 어른이 되었을 때 책 안에는 해방된 사회의 신나는 노동과 조율할 뿐 연주하지 못하는 지식인과 가난하고 어진 농부와 옷을 벗어 저항하는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청년이 된 그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책을 읽듯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때로 슬퍼하고 때로 황홀해 했습니다. 슬픔은 달콤한 자기연민이었고 황홀함은 금방 사라져버릴 비누방울의 무늬처럼 아슬아슬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 은은한 빛의 종이처럼 차곡차곡 채워갈 수 있는 여백이었습니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듯 그 여백은 그의 상상으로 나날이 영롱한 빛을 띠어 갔습니다. 어느날 그는 그 여자의 눈을 보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 여자는 그의 사랑을 몹시 기뻐했지만,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여자에게 뽐내고 싶은 장식이었을 뿐, 둘이 혼자 남았을 때 그 여자는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작은 시가 담긴 긴 이별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여자는 그 편지를 받고 그를 조금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제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때로 어떤 사람에게서 포근함을 때로 다른 사람에게서 즐거움을 느꼈지만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곁은 이런 저런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이었을 뿐, 누구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어떤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여자의 까만 머리를 좇아 갔습니다. 그녀가 머무는 곳을 알게된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가 백번째의 편지를 썼을 때, 그녀가 그의 앞에 와 앉았습니다. 그녀는 착한 미소를 지었고, 그는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찻집을 나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했고, 그 후 그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더 세월이 흘렀고, 그는 때로 몹시 외로웠지만 그 외로움에 차츰 익숙해 졌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법을 익힌 그는 가슴의 문을 여는 법을 잊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족감과 우월감에 가득찬 사람을 멀리하고 가엾고 슬퍼하는 사람을 안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단념하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분명한 사랑의 좌절을 겪지 않기 위하여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흐린 안개 속의 풍경과 눈덮인 산하, 가로등 아래의 밤풍경에 만족하기 위하여 그는 따가운 햇살을 피했습니다.
그의 이 보호막을 찢어줄 사람이 있을까요? 그에게 차라리 좌절을 선택하게 할 사람이 있을까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더 빛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를 절망이 아니라 확신때문에 모험에 나서게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는 요즈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없어도 괜찮다고. 그는 순간을 즐기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또한 그는 생각합니다. 안개속을 걷는다는 것이 어쩌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고. 햇살은 가장 깊은 안개 한가운데에서 신비롭게 드러나는 조그맣고 아늑한 땅에만 비추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눈위의 작은 오솔길의 끝은 어쩌면 사랑의 봄에서 끝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병약한 자는 비를 피하지만 건강한 자는 마법에서 풀려난 거인처럼 빗속을 질주합니다. 그는 이제 빗방울의 감촉을 실감해보고 싶습니다.

 

 

 

 


 

추천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25 사는얘기 로자이름으로 검색 6188 03-15
124 사는얘기 기러기이름으로 검색 3665 03-12
123 사는얘기 Oris이름으로 검색 3477 03-08
122 사는얘기 자유인이름으로 검색 4454 03-08
121 사는얘기 전설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4470 02-15
120 사는얘기 전설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840 02-06
119 사는얘기 노엘~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990 02-06
118 사는얘기 기러기이름으로 검색 4288 01-25
117 사는얘기 하일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5078 01-19
116 시소설 전설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6182 01-17
115 사는얘기 차주종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4037 01-17
114 사는얘기 Ingeborg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688 01-17
113 사는얘기 dresenkim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635 01-17
112 사는얘기 김명재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984 01-17
111 사는얘기 julie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4122 01-17
110 사는얘기 하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4029 01-17
109 사는얘기 윤도화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4033 01-17
108 사는얘기 poesie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796 01-17
열람중 사는얘기 poesie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430 01-17
106 사는얘기 freiheit이름으로 검색 4209 01-17
게시물 검색
이용약관 | 운영진 | 주요게시판사용규칙 | 등업방법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비밀번호분실/재발급 | 입금계좌/통보방법 | 관리자문의
독일 한글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 서로 나누고 돕는 유럽 코리안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