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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사는얘기 헤테로토피아

페이지 정보

작성자 poesie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5,153회 작성일 02-01-17 02:21

본문

어느 겨울 혼자 있는 나날들을 보내다 저 자신에게 조그만 선물을 주고 싶었지요.
즐겁지만은 않는 선물이었지만, 제가 서있는 곳을 알게 해 주었기에 기꺼이 받았읍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가차없는 비판을 해주신다면, 저는 더 큰 선물을 덤으로 받는 것이겠지요.




헤테로토피아







1.

이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은은한 황색의 조명에 비친 졸업연주회장은 나른한 꿈속의 풍경처럼 희미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손을 잠시 닦고 난 후, 이연은 서서히 팔을 들어 건반의 첫음을 눌렀다. 음은 즉시 스스로 춤추기 시작했다. 잔잔한 서주(序奏)를 깨트리고 갑작스럽게 어지러운 불연속적 음들이 그녀의 팔을 커다란 동작으로 몰아갔다. 연관을 짐작할 수 없는 불협음들이 방향을 잃고 산만하게 흩어졌다. 오른 손이 만들어 내는 찢어지는 듯한 고음의 현란한 속도와는 무관하게, 왼손은 지루함에 못이겨 버려진 깡통을 공연히 차대는 발길처럼 리듬도 없이 건반을 무료하게 여기저기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현욱은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았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무대아래에서 교수로 보이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연을 본 순간부터 그는 음악을 잊었다. 그는 긴 머리카락에 반쯤 감춰진 그녀의 얼굴과, 측면의 실루엣이 예리하게 빚어내는 그녀의 가슴의 율동과,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긴 팔의 부드러운 선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춤을 추고 있었다. 머리와 등과 팔과 다리가 손가락 끝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조준하고 효과적으로 찍어내기 위해 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현욱은 그녀의 몸으로부터 방사되는 에너지를 자신에게로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손안에 땀이 고여왔다. 옆에 앉은 의철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모세의 기적처럼 세계가 양쪽으로 깊은 골을 내며 갈라지고, 그 끝에 이연으로 향하는 곧은 길이 열리는 듯한 환상에 빠져들면서, 현욱은 그 환상에 애절하게 탐닉하였다. 시간이 바로 이 순간 정지하기를 기원하면서 현욱은 참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숨을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그녀의 연주가 끝났다. 약간 상기되고 조금은 어색한 웃음을 띤 그녀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적당한 예의에 지나지 않는 열의 없는 박수가 실내를 잠시 맴돌다 사라졌다. 그녀가 무대 가의 커튼 뒤로 사라지자, 현욱은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학교의 침침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차가운 겨울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타는 듯한 노을이 세상을 붉은 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한 팔을 나무에 기대고 현욱은 구역질을 하는 듯 몸을 웅크리며 헛기침을 해대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철이 나타났다.
"야 임마, 여기서 뭐하고 있냐? 너 어디 아프냐?"
입가에 다정하게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의철이 현욱의 손을 끌고 다시 연주회장으로 들어섰다. 연주회장 홀에서는 이연이 두어 개의 꽃다발을 쥔 채 친구 몇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값나가는 듯한 옷과 세련된 화장으로 치장한 여학생들은 아주 즐겁게 웃어대고 있었다. 의철이 현욱을 그들의 앞에 세웠다.
"야, 인사해라. 얘는 내 사촌 이연이고 여기는......"
현욱은 그 다음 말을 듣지 않았다. 가까이 서니 자신보다 10센치 가량은 커보이는 이연의 앞에서서 다만 적당한 말과 자세를 찾느라, 복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애를 쓰고 있었다.

2.

밖의 차가운 날씨와는 무관하게 적당한 온도로 덥혀진 카페는, 토요일 오후의 공연한 설레임과 나태한 흐트러짐이 섞인 채 한적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불안하게 찻잔을 매만지며 눈길을 보낼 곳을 찾지 못하던 이연이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오빠...... 제 말 오해하지 마세요. 전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의철 오빠도 오빠 칭찬을 얼마나 하는데요. 그동안 만날 때 마다 저도 오빠가 하는 말들에 늘 깊은 뜻이 있는 걸 느꼈고, 그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배우는 것도 너무 많아요. 오빠도 알잖아요. 저 정말 오빠 만나는 거 즐거웠어요. 하지만......"
현욱은 오늘 이연이 어떤 말을 하건 지난 번 만남에서의 자신의 장광설에 가까운 고백을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엔 중개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의철이 몇번 자리를 함께 했으나, 곧 두사람만의 만남이 이루어 졌었다. 그 만남을 통해 현욱의 눈에 비친 이연은 평화로왔다. 그녀는 정직하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녀 가족의 평화과 화목이 그녀의 모든 언어와 몸짓에서 묻어 났으며, 그런 안정된 성장이 초래하는 또 다른 한계를 스스로 의식하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동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으로 반응하였고, 아름다움에 쉽게 감격하였다. 그녀는 투명할수록 더 접근하기 어려운 신비와 매혹을 자아내는 열대어의 몸처럼 맑았다. 그런 그녀에게 열정적인 송가를 퍼부은 것은 조금도 부당한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백의 그날 이미 현욱은 이연이 몹시 곤란해 하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절바른 사람이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즉시 그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그렇게 봐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그런 고백은 자기에게 정말 너무 과분하다고 하면서 애써 즐거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확실한 대답을 회피했고, 헤어질 때 자신이 전화를 할 거라는 점을 그에게 분명히 주지시켰다.
현욱은 그녀를 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준비해 온 말을 읊조렸다.
"괜찮아. 사랑이라는 것이 의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잖아? 그건 그냥 저절로 찾아 오는거지. 그러니 네가 내게 미안해 할 건 전혀 없어. 내가 너를 알게 되고, 지난 몇 달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난 아주 감사한 마음이야.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한 것, 잊어 줄 수 있겠니? 그냥 내가 너를 마음 속으로 아끼고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하자.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현욱 역시 더 할말이 없었으므로,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을 급속히 떼어 놓고 있었다. 이연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오빠, 우리 놀이동산 가요. 청룡열차를 타고 막 소리를 질러 봐요!"

3.

그날 이후로 이연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청룡열차 안에서 이연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현욱은 마음을 정리하고 태연함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전혀 가망없는 시도임을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원심력의 극단을 찰랑거리던 놀이기구 속에서 그의 몸에 눌려 오던 그녀의 몸의 질감은 현욱에게 오히려 뜻하지 않던 새로운 욕망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이연의 사랑의 부재를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녀보다 실제로 7센치 가량 키가 작았다. 안경도 끼지 않은 그의 얼굴은 지극히 범상하여, 그의 마음 속에서 넘쳐흐르는 환상과 영감과 지식을 전혀 밖으로 전달해 주지 못했다. 여럿이 앉은 좌중에서 왜소한 체구의 그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아무런 에너지도 발산하지 않는 특성없는 남자였다. 사실 그는 세상에 겁을 먹고 있었으며,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 늘 자신의 흔적을 지워대기에 바빴다. 그의 외면의 부재와 내면의 왕성함은 동일한 원인에서 비롯되는 두가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지러이 왕복했고, 때로 내면에서 불거져 나오는 비틀어진 공격성을 다스리는 데 급급했다. 그가 학교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 역시, 방만하면서도 이해관계로 철저히 짜여진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문학을 전공하는 그의 미래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건강하고 평화롭고 따스한 온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곁에서 그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조화롭게 세계와 화해되어 있는, 자신있고 당당한 남자가 그녀의 여백을 채워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연은 고정된 소실점처럼 그의 모든 정신을 지배하였다. 그녀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그녀가 붙잡고 있는 고삐의 완강한 조임이 그의 살을 예리하게 파고 들었다. 세상에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하나의 악마적인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글로서 그녀에게 도전하겠다는 욕망이 맹목적인 확실함으로 그를 유혹했으며, 그는 그 유혹에 탐닉적으로 빠져 들었다. 그는 구식 타자기를 헐값에 구입했다.

4.

헤테로토피아를 아시나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도, 없는 땅인 유토피아도 아닌 제 3의 땅, 있음과 없음의 가운데에서 뚜렷이 식별하기 힘든, 안개속에 싸여 있는 땅. 실제로 존재하지만 다른 모든 곳의 바깥에 있고, 세상 모든 것에 자신의 빛과 색채를 던지는 비밀스런 거울. 위기와 일탈의 징후 이지만, 자신 속에 고요히 깃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금지의 땅. 초월과 탈주를 향한 소망과 환상을 기둥으로 삼고 있는, 방문할 수는 있지만 거주할 수는 없는 신전. 다채롭게 꽉 차 있으면서도 여백처럼 비어있는, 모든 색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하얀 눈부심의 나라.
헤테로토피아, 이것이 오늘 내가 당신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을 향한 긴장된 인식의 욕망을 모아봅니다. 그러나 초월하는 자만이 흔적을 남기는 법. 당신은 미처 내가 알아차릴 수 없는, 오직 동경과 꿈으로만 다가갈 수 있는 미적 세계 속에 잠겨 있습니다. 당신 안에서 시간은 정지하고, 다가가는 만큼 물러서는 당신은 무지개. 무지개를 향한 나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라져 가는 것만이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늘 당신의 흔적을 지우고
지워진 흔적은 다시 흔적으로 남아
나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비누방울에 맺힌 오색의 환영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스러져 버리는
당신은 내게 헤테로토피아

봄날 아지랑이 저편의 풍경과 같이
당신의 윤곽은 흐릿하게 떨리고
떨림 속에서 당신은
사무치도록 아름답군요......

당신의 이름은 우아함을 떠올립니다. 너무도 순결하여 불순한 세상에 의해 금방 유린되고 말 것 같은, 당신의 우아함은 안타깝고 위태롭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기진 마세요. 저는 이만큼의 거리에서만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세상의 마지막 비밀처럼, 열어보지 않은 보물상자처럼 늘 미지의 희망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동해를 꿈꾸어 봅니다. 인적 드문 겨울 휴양지에 거처를 정하고, 매일 바닷가 절벽위에 앉아 파도소리와 뱃고동소리와 바닷새들의 웅성거림, 비릿한 바다의 냄새, 귓전을 울리는 바람과 어지러이 춤추는 나의 머리카락......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며칠을 보내고 싶습니다.

내 기분에만 충실한 오늘의 편지를 용서하여 주길.
다시 연락할 때까지, 안녕.

5.

두달이 흘러갔다. 40여통의 편지가 전해진 후에, 이연은 현욱이 봉투에 적은 사서함으로 처음 편지를 보내왔다.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아름답고 따스한 편지들이며, 그 편지의 필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하다고. 현욱이 몇번에 걸쳐 만남을 거부하는 동안, 이연의 편지는 차분한 허락의 음조에서 급히 애교섞인 조름의 음조로 옮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자는 자신이 이상한 거냐고,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이냐고 탄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음부터 뚜렷이 의식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연히 원하고 있었던 성취를 넘어서는 결과 앞에서 현욱은 당황하였다. 편지의 필자가 자신임을 밝히고 다시 한번 사랑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렸으나, 그에겐 그럴 용기도, 그간의 행위를 정당화할 변명도 없었다. 그리고 예상되듯이 그 시도가 실패할 경우, 자신에게 닥쳐올 전면적인 자괴감을 이겨 낼 자신도 없었다.
그는 곤경을 기회로 전환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행복한 미래를 안겨줄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을 편지의 필자로 내세우기로 했다. 그것으로써 그는 일단 짐을 덜 수 있으리라 여겨졌고, 새로 시작되는 두사람의 관계는 그 두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면 그만이라 생각되었다.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앙 일간지의 기자로 취직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친구 성규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리 낭만적인 면은 없었지만, 어쨌건 어느 정도의 문학적 필력(筆力)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성규를 만나 그간의 모든 일을 설명하고 편지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는 두사람에게 달린 일이므로, 지나치게 부담갖지 말고 그녀를 만나 보기를 부탁하였다. 번듯한 직장과 멋진 체격, 훤한 용모와 쾌활한 성격을 갖춘 성규는 누가 봐도 보기 좋은 사람이었다. 성규는 그간 이미 여러번 선을 보아 온 바 있고, 결혼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뚜렷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허허 그것 참, 하며 곤란 한 척 했으나, 그는 분명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일이 잘 안 되어도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공연한 다짐을 받은 후에 그는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6.

학교 끝의 산중턱에 위치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넓은 잔디언덕에 누워 현욱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가을 오후의 하늘은 정말 구름한 점도 없었다. 현욱은 머리를 돌려가며 하늘의 구석구석을 훑어 보았지만, 한두군데 하얀 기운이 희미하게 감돌 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파란 하늘은 너무도 시원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거리낌 없는 그 태도는 현욱을 오히려 불안하게 했다. 너무도 순수하다는 것은 어느 한 곳도 붙잡을 데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 극히 균일한 표면의 대리석은 아름다운 조각을 더욱 빛나게 하지만, 거기에 매달리려고 하는 사람은 늘 미끄러질 수 밖에 없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하늘을 보면서 현욱은 자신의 시감각이 금방 나태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일하게 지속되는 자극은 곧 일체의 강도를 잃어버리고 만다.
아래쪽에서 둔하고 고른 저음의 자동차 소리가 다가오다 멎었다. 잔디언덕의 측면 아래쪽에서 말쑥히 양복을 차려입은 성규의 긴 몸이 균형잡힌 걸음걸이에 실려 나타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의 윤곽은 안정된 성취의 향내를 뿌리고 있었다. 현욱은 누운 채 잠시 손을 흔들고, 그가 올 때까지 다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야! 여기 정말 오랜만이구나. 정말 딴 세상이야, 여긴. 공부하는 녀석들 제법 부러울 때가 있단 말야?"
쾌활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성규가 양복 윗도리를 벗으며 현욱의 곁에 앉았다. 두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받친 성규는 기지개를 하는 듯 하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 하였다.
"너도 짐작하겠지만...... 우리 내년 봄에 결혼하기로 했다."
성규와 이연은 처음 만남 이후로 급속히 가까워 지는 듯 했고, 이번에는 성규의 친구 자격으로 현욱도 몇번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현욱에게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는 과거의 감정을 깨끗이 씻은 듯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는 이연은 그에게 고맙다고 했고, 늘 좋은 오빠로 남아 있어 주기를 부탁했다. 그들 양가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적극 지원하고 있는 눈치였으므로, 모든 것은 이제 제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듯 했다.
"그래...... 이런 말 하는 건 우습지만, 너 이연이 행복하게 해줘라. 넌 그럴 수 있을 거야."
"하하! 알았다. 염려마라. 이 말도 좀 우스울 지 모르겠다만, 하여튼 너한테 고마운 심정이다."
"고맙긴...... 나야 중매 서준 것 밖에 더 있냐?"
"그건 아니지, 임마! 이연이가 처음 날 만날 때 표정이 어땠는 줄 아냐? 날 보는 순간 얼굴이 얼마나 환해 지던지......"
성규는 드러나게 헛웃음을 지어 냈다.
"야, 그런데 좀 곤란한 일이 생겼어. 우리 신문사 파리 특파원 선배가 갑자기 암으로 쓰러졌다지 뭐냐. 거기서 일단 치료를 받고 있다지만, 조만간 귀환할 모양이야. 어제 내가 갑자기 발령받았다. 이달 말에 뜨래. 우리 결혼까지 한 7개월 가량 공백이 생긴거야. 그런데 이연이가 말야, 떨어져 있는 동안 옛날처럼 편지를 받고 싶다는구나. 아무래도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애. 내가 쓰면 단번에 알아차릴거야. 지금 굳이 그 일을 밝힐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사실 불안하기도 하고 말야. 결혼하고 나면 그럴 일이 더 없겠지. 이연이, 사실 여전히 내게 환상을 품고 있어."

7.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성규는 현욱이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형의 타자기를 구입하여 들고 출국했다. 이연이 그것으로 편지를 쓰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현욱으로서는 파리 도착소감을 쓸 수 없었으므로, 도착 직후 성규가 장시간 국제통화를 통해 들려준 그곳의 풍경에 의거해 상상으로 문장을 꾸미는 데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우편으로는 편지가 도착하는 데 1주일 이상 걸렸으므로, 만일 모든 편지를 우편으로 처리한다면 이연이 편지를 부친 후 답장을 받기까지는 편지왕래 시간만 계산해도 한달 이상이 소요었고, 실제로는 5주가량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래서 현욱과 성규 사이의 연락은 모두 전화로 처리되었다. 물론 현욱은 전화비용을 감당할 처지가 못되었으므로, 성규가 현욱의 전화요금 일체를 송금해 주었다. 현욱이 편지를 완성하면, 전화로 성규에게 읽어 주었다. 이연이 보낸 답장 역시 성규가 전화로 현욱에게 거의 전부를 읽어 주었고, 이때 성규는 답장에 사용될 수 있는 파리 생활의 삽화들을 함께 전해주었다. 성규는 파리의 업무나 도시생활 등에 관한 이야기는 되도록 전화로 이연에게 미리 전했다. 그만큼 현욱의 편지는 내면의 묘사로 채워져도 좋았다.
이연의 편지를 읽는 것은 현욱에게 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첫 답장에서 이연은 현욱의 선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다시 편지를 받게 해 준 이 우연에 감사한다고 적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성규와 함께 하는 시간만큼, 혹은 어쩌면 그 이상, 편지를 읽는 시간이 기쁨으로 충만된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사랑의 감정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채워진 그녀의 편지의 수취인은 어쩌면 성규가 아니라 현욱이라고 해도 좋았다. 때로 현욱은 결과가 어찌 되었건 이연에게 모든 것을 밝혀버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녀의 가슴이 빚어낸 사랑의 언어들은 곧 터져버릴 듯한 그의 가슴을 예리하게 찔러 대었고,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실감하는 듯 했다. 이연을 자주 보지 못하면서 겨우 얇은 막으로 덮혀지는 듯 하던 자신의 상처가 다시 허망하게 찢겨져 나가는 것을 현욱은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현욱은 겨우 하나의 탈출구를 발견해 내었다.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녀에 대한 마지막 선물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최후의 송가로 삼고, 자신 안의 모든 에너지를 그 편지들 속에서 태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제사에서 태워져 날아가는 한지처럼, 남아있는 정열의 전부를 찬란한 불꽃으로 날려버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정열의 긴 장례식에 엄숙히 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른 모든 일을 중단했다. 그의 생활은 오로지 정확한 단어와 유려한 문장구성의 발견에만 바쳐졌다. 꿈 속에서도 그는 언어를 찾아 헤메었으며, 꿈의 수확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잠을 깨자 마자 머리맡에 놓인 수첩에 꿈의 잔상들을 옮겨 적었다. 무수한 시집들을 급속히 읽어가며 시적 상상력을 연마했고, 이연의 편지 안에 숨겨진, 너무 미세하여 거의 읽히지 않는 떨림에도 정확하게 공명(共鳴)했다. 문장에서 생긴 단어 하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입술이 갈라지도록 오랫동안 애타게 집중했으며, 실패한 문장들을 병적으로 혐오했다. 그는 편지쓰기에 바쳐지지 않는 모든 시간을 그녀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으므로, 적절한 영양과 운동을 공급받지 못한 그의 건강은 서서히 쇠퇴해 갔다. 그러나 이연의 답장이 전하는 경탄과 찬사는 그의 아낌없는 소모와 낭비를 계속 응원해 주었다. 그는 제단에 바쳐질 제물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기반까지도 거침없이 쏟아 버리는 광적인 신도였으며, 금욕적인 생활의 끝에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태우는 수도자였다.

8.

이연의 결혼일이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았을 때, 현욱은 자신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충혈된 눈 아래가 검게 패어 촘촘한 겹을 이루고 있었고, 현저하게 커진 땀구멍이 온 얼굴을 덮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자라난 수염이 얼굴의 여기저기를 제멋대로 비집고 나와 있었으며, 피부는 불길한 황토색을 띠고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방에서 현욱은 몸을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던졌다. 눈을 감았다. 새벽까지 혼자 마시던 소주병들이 방안에 뒹굴고 있었다. 무수한 마침표들이 찍힌, 만년필의 격한 찌름을 견디지 못하고 대개 찢어져 버린 시험지들이 낮은 탁자 위와 주변에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그 만년필은 나흘 전 성규가 그를 잠깐 찾아와 전해준 스위스제 금촉 만년필이었다. 만년필의 촉은 형편없이 우그러져 있었다.
그날 성규는 기대를 뛰어넘는 성의에 감사한다고 짤막히 말한 후 돌아갔다. 두 사람은 그것이 우정의 끝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현욱의 편지가 단순히 성규를 지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아무런 감식력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성규는 현욱에게 편지를 그만 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성규의 목소리는 사무적으로 되어갔다. 그 즈음에 이미 성규에게 현욱의 글은 한시적으로 사용되고 난 후 버려져야 할 도구로 되었다. 그리고 현욱의 글은 현욱의 전부였다.
빈 속에 꾸역꾸역 삼켜진 소주가 복통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 왔다. 현욱은 몸을 웅크렸다. 말라 휘어진 나무조각처럼 그는 웅크린 자세로 복통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텅 빈 영혼을 잃고 내팽겨져 있었다. 싸늘하고 습기찬 지하방의 한 구석에 모로 누워, 현욱의 몸은 아무 소리도, 아무런 형체도 감지하지 못한 채 식어갔다. 시간은 부패의 냄새를 풍기며 서서히 정지하고 있었다.
거의 잠에 가까운 혼미한 의식 속에서 현욱은 마지막으로 이연을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녀의 생의 절정의 한 순간을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그는 벽을 짚으며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수돗물을 틀어 머리를 감고 손발을 씻고, 얼굴의 모든 수염을 깨끗이 잘라 내었다. 방으로 돌아가 비키니 옷장을 천천히 열었다. 지난 날 대학입학 기념으로 부모님이 마련해 준 감색 양복이 옷걸이에 걸려 축 늘어져 있었다. 현욱은 입었던 옷을 벗고 자신의 앙상한 몸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축복받은 날이었다. 5월의 대기는 세상의 마지막 어두운 구석 까지도 따사로운 온기와 화사한 들뜸으로 잔인하게 파헤쳐 대고 있었다. 성모마리아 상 주변에 분홍, 노랑, 연두등의 밝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이연을 둘러싸고 깔깔대고 있었다. 이연은 시원스럽게 아름다웠다. 현욱은 먼 발치에서 이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긴 몸의 윤곽을 드러내며 물결처럼 흘러 내리는 드레스 위로 솟은 부드럽게 화장한 얼굴이 현욱을 잠시 스치는가 했더니, 약간 놀란 듯한 그녀의 시선이 그를 똑바로 조준하였다.
현욱은 흐믓한 표정을 연출하는 것을 즉시 포기했다. 서걱거리는 양복을 의식하며 그는 이연에게 다가갔다.
"축하한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으음...... 요즘 일이 많아 며칠 밤샘을 했더니......"
"몸도 너무 말랐잖아!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요!"
"그래? 뭐 일끝나고 며칠 쉬면 회복될거야."
이연 주변의 여자들이 언뜻 적당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현욱은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얘들아, 인사해. 의철이 오빠 친구, 현욱 오빠."
여자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한번씩 까닥 숙였다. 그 역시 그렇게 했다.
"저기 친구들한테 가 볼게."
"오빠, 지금 곧 친구들 사진 찍을거예요. 딴데 가지 말고 저기 있어요."
현욱은 고개를 조금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는 주위의 눈을 피해 식장으로 정해진 성당을 빠져 나왔다.

9.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파리로 떠났고, 현욱은 어쨌든 논문을 완성시키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현욱은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작품을 개념으로 치환하고, 하나의 의미로 몰아세우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부를 중단할 수 없는 데까지 왔고,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쨌든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 열의없이 써내려간 그의 논문은 그럭저럭 심사를 통과했고, 그래서 그는 대학의 강사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2년이 넘도록 이연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나태하게 적응해 갔다. 박사과정에 등록했고, 어차피 자신의 수업을 듣게 되어 있는 학생들을 별 무리없이 가르쳤다. 그의 몸은 조금 불어나 보통의 체격을 얻었고, 필요한 만큼 학회나 여타의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는 지하방을 벗어나, 학교 근처의 산중턱에 있는 2층 양옥의 윗층으로 이사를 했다. 주인집과 잘 분리되어 있는 방하나와 작은 마루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주간지를 읽었고, 작은 텔레비젼을 사들여 보았으며, 비교적 규칙적으로 조깅도 했다. 아무 여자도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그 또한 어떤 여자에게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성규와 이연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그들이 도착한 후 3개월이나 지나서 들었다. 동창들이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 소식을 전하면서, 의철은 성규가 정치부로 옮겨 신문사의 중심부로 착실히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현욱은 그에게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현욱은 박사논문이 계속 지연되는 과정에서 서울 근교의 신설 대학에 전임 자리를 얻었다. 내정되어 있던 사람의 논문이 외국 학위 논문을 거의 베껴 쓴 것이 드러나서 은밀한 물의를 일으키면서, 그 사람이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자리를 포기한 결과였다. 내정자가 분명하여 다른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심히 지원서를 내민 그에게 그 자리가 떨어진 것이었다.
정식 교수가 되면서, 그는 그동안 대충 진행시켜 오던 박사학위 논문 작업을 중단하여 버렸다. 그에게 몇군데에서 선이 들어 왔고, 집안의 장남인 그는 그 중 수더분하고 전통적인 성품을 지닌 여자를 골라 결혼했다. 처음부터 아내는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불편함이 없이 살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하나 태어났고, 아내는 공연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어느날 새로운 기획란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어떤 기자로부터 그는 이연과 성규가 얼마 전 이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연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혼사유에 대한 기자의 설명이었다.

10.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파리에서 집밖을 나서면 한마디 말도 못하고, 다른 교포나 상사 직원 부인들과도 금방 친해지지 못하고 하니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구요. 같이 음악회나 전시회에도 가고, 좋은 레스토랑을 발견하면 그 다음날 곧 저를 데리고 그리로 갔죠. 시간 날 때마다 둘이서 여행도 다녔어요. 유럽의 좋다는 데는 다 가봤을 거예요."
이연은 찻잔에 차를 부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저녁시간이 지난 직후였으므로 바깥에서는 시장의 소음이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이연의 피아노 학원이 있는 낡은 3층건물을 발견했을 때, 현욱은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거미줄 처럼 금이 간 건물은 쇠락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으며, 건물 2층의 창에 그녀의 학원을 알리는, 셀로판으로 붙여진 도형들은 건물 전체의 이미지에 덮혀 조악한 인상을 주었다. 가판대들 사이로 좁게 열려진 어두운 계단입구에 서서, 그는 계단 좌우에 널려진 낡은 상자들과 형편없이 때묻은 계단을 보며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잠시 서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벨을 누르고, 고용한 학생 처럼 보이는 여자가 학원의 문을 열어 줄 때, 그는 그 속의 풍경이 연출하는 뜻밖의 화사함과 아늑함에 놀랐다. 학원 내부는 주위의 환경과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노랑 색과 연두색을 주조로 하는 실내장식을 배경으로 군데 군데 부드러운 색조의 꽃들이 아담한 화병에 꽃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유명한 피아니스트 들의 사진이 같은 크기의 액자에 싸여 벽을 가지런히 장식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꼬마 몇 명이 상아색의 카페트 위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귀가준비를 하며 재잘대었다. 그에게 문을 열어 준 여자는 사무실로 보이는 방의 문을 열고 짧게 뭐라고 말하고는 돌아와 아이들에게 몇가지 다짐을 받느라 분주했다. 현욱이 천천히 신발을 벗어 신발대 위에 놓고 잠시 머뭇거리자, 여자는 그를 향해 예쁘게 웃음지으며 들어가 보세요, 라고 말했다.
사무실 안에서는 이연이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연은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 하였다. 그리고 구석쪽의 소파를 가리키며 잠시 앉아있기를 부탁했다. 이연은 교습조건을 설명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여자아이를 이런 저런 말로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다. 긴 원피스 위에 짧은 소매의 웃옷을 걸친 이연은 학원의 따스하고 다사로운 분위기를 잘 체현하고 있었다. 손님과 고용교사가 동시에 학원을 나갔다. 이연은 차를 끓였다.

"하지만...... 그 사람,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 거였어요. 의무감이나 책임감 같은 거였지, 정말로 좋아서 저를 그렇게 배려해 주는 건 아니었죠. 일년 쯤 시간이 흐르고, 저도 제법 생활에 적응하는 기미가 보이자 둘만의 시간이 차츰 줄었어요. 일이 더 바빠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어요. 이해가 가죠. 저도 원했으니까. 그냥 우연히 임신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렇다고 그 사람이 저를 몰아세웠던 건 아니예요. 가끔 다른 집 아이의 얘기가 나오면 좀 시무룩해지고, 그런 식이었죠. 그러다가...... 서로 왠지 모르게 자꾸 차가와 졌어요. 아니, 그렇다기 보단, 제가 먼저 좀 우울해 졌어요. 날이 갈수록, 그 사람이 제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란 걸 더 잘 알게 되었어요. 결혼 전에는 정말 도취되어 버리고 싶은 아름다운 편지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눈치를 챈 그 사람도 저를 좀 부담스러워 하고 피곤해 하는 것 같았어요. 이따금 그 사람이 다시 노력을 해보곤 했지만, 잘 안되었죠."
이연이 긴 팔을 뻗어 현욱의 잔에 차를 더 부어 주었다. 보온병에 담긴 차는 여전히 적당한 온도로 따뜻했고, 현욱의 혀에 아주 감미로왔다. 이연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돌아와서, 어수선한 기간이 지나고, 다시 일상을 찾았어요. 우린 사실 그 즈음엔 이미 서로에게 별로 기대하는 게 없었어요. 우리라고 하니까 우습네요. 별로 싸우지도 않았어요. 가끔 그 사람이 술먹고 들어와 싸움을 걸기도 했지만, 난 싸우는 게 너무 싫어서, 그냥 괜찮다고, 어서 자라고 해버렸으니까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그 사람이 정말 애를 가져야겠다고 했어요. 애가 없어서 우리가 그러는 거라고...... 저부터 병원을 갔어요. 혼자 결과를 보러 가니까, 의사가 그러데요. 애를 가질 수 없다고. 그리곤 뭐, 자연스럽게 헤어졌죠. 서로 상처를 주는 일도 없이."
현욱은 이따금 그랬구나, 그래, 라고 그녀의 이야기를 적절히 거들어 주었을 뿐 무엇을 묻지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도 않았다. 차는 여전히 맛있었고, 백열전구의 반사광을 받은 사무실은 은은하게 침잠하고 있었다.
"오빠한테 이런 이야기 하니까 편하네요...... 오빠는 잘 살고 있다면서요? 의철이 오빠한테 가끔 소식 전해들었어요. 애도 생겼다면서요? 옛날에 나 그 사람이랑 결혼 할 때, 오빠 나만 보고 그냥 갔죠? 그땐 참 안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정말 의젓한 교수님 같네요."
이연은 후후, 하며 약간 놀려대는 듯이 웃었다. 현욱은 자신의 근황을 적당히 설명해 주었다. 이연은 창밖에 바로 보이는 작고 나즈막한 서민용 아파트를 가르키면서, 거기 산다고 했다.
"여기 참 좋구나. 지내는 건 어때?"
"한국에서 여자가 혼자 살아가는 거, 쉽다면 거짓말이겠죠. 가끔 쓸쓸할 때도 있고...... 하지만 여기 일을 시작하고 부터는 한결 나아졌어요. 별 것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일에 매달리고, 집에 가서도 일을 생각하고, 애들 얼굴도 떠올리고, 그러면서 지내기가 좀 편해졌어요."
"다행이구나. 재혼은 하지 않을거야?"
"후후, 왜? 오빠 주변에 괜찮은 사람 있어요? 아니예요. 아직은 혼자 지내보려고 해요. 결혼을 절대로 다시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자신 없어요. 모르죠 뭐, 언젠가 다시 결혼하고 싶어 질 때가 올지도.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오빠, 가끔 들러 줄거죠? 참, 언제 청룡열차 타러 같이 가요! 오빠를 보니까 갑자기 타고 싶네? 오빠 부인이 화낼려나?"
현욱이 일어 섰을 때, 이연은 정리할 게 남았다면서 그를 학원 문까지 배웅했다. 계단을 내려와 보니, 시장은 여전히 환했다. 몇점의 구름을 거느린 초가을의 늦은 해가 아스라한 붉은 빛을 세상에 뿌리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가판대 자리가 군데 군데 비어 있고, 나머지 사람들도 짐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가게들은 여전히 환한 빛을 거리에 던지며 하루의 성과를 조용히 음미하고 있는 듯 했다. 현욱은 건물을 나서서 청소물로 젖은 아스팔트 길을 잠시 걷다가 이연의 학원을 되돌아 보았다. 그녀가 창가에 서서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현욱은 허공으로 팔을 쭉 뻗어 응답해 주었다.
차를 세워 둔 곳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을 때, 현욱은 순간적으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데쟈뷰(D s -vu)였다. 과거 언젠가 지금과 꼭 같은 상황을 경험한 듯한 느낌...... 차에 올라 집을 향해 운전하면서 현욱은 그 느낌에 대한 설명을 구해보려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텅빈 횡단보도의 녹색 불이 지나치게 오랫동안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던가? 무언가 찬바람 같은 것이 현욱의 머리를 통과해 번득 지나갔다. 처음엔 형체를 알 수 없던 아득한 느낌이 흐릿한 구름처럼 희미한 존재로, 꾸물거리는 탁한 용액같은 흐릿한 기억으로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잠시 멍하게 앞차 후면의 붉은 안전등을 바라보던 현욱의 머리에 불현듯 확실한 기억이 살아났다. 현욱은 갑자기 차를 급히 몰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도래할 운명에 대한 예감이었던가? 아니면 그 때 이후로 그의 모든 행동을 충동질해 온 것은 전율스럽도록 영약한 그의 무의식이었던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아내의 인사에 짤막하게 응답하고 현욱은 다용도실로 들어섰다. 아래쪽 칸의 한 구석에 놓인 상자를 꺼내 열고, 그는 허겁지겁 지난날의 일기들을 들추었다. 이윽고 그는 찾던 것을 발견했다. 6년 전 그가 졸업연주회에서 이연을 처음 본 후, 그녀에 대한 상념에 몹시 시달리고 있던 시절에 쓴 어느날의 일기였다. 그는 자신의 작은 서재로 가서 책상위의 스탠드를 켰다. 그의 얼굴은 몹시 경직되어 있었고, 일기장을 잡은 그의 손이 차츰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꿈을 꾸었다. 얼마만의 편안한 꿈인가. 잠을 깨고 난 후 책상에 앉은 지금까지 꿈의 영상이 생생하다.
나는 어떤 북적거리는 곳을 걷고 있었다. 세상은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사람들의 형체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나를 지나쳐 사라지곤 했다. 안개사이로 떠 있는 하얀 불빛들이 몽롱하게 주변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어떤 강한 느낌에 휩싸여 뒤를 돌아 보았다. 내 뒤편 저만치에, 이연이 나를 향해 미소 짓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주변의 흐릿한 형체들과 대조되는 또렷하고 강렬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를 향해 평화롭고 다정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어쩌면 손을 흔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만족스러운 기분에 사로 잡혔다. 어떤 운명적인 분위기가 사위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운명에 감미롭게 빠져들면서 감사하고 있었다.
대저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언뜻 설명할 수 없는 우연적인 사건의 연쇄가 낳는 결과를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의 의지나 초월적 질서라는 것따위를 상상한다. 그러나 운명은 인간의 원망(願望)과 두려움의 질서 안에 갇혀 있다. 어떤 사건을 운명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그 사건을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종국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종국으로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의(恣意)일 뿐.
오늘 꿈이 풍기고 있던 운명의 분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의 원망의 종국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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