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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사는얘기 독일의 기억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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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을이름으로 검색 조회 3,625회 작성일 02-04-14 20:39

본문

만약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난 지금 낡아가고 있는 나이이다.
무언가 쓸데 없이 소진하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 슬프고 우울하고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외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꽃처럼 빛나던 시절이 있었던가 싶고, 어느 핵심의 시간들이 내 속에 스며들어 나를 진짜 나로 인식되게 했던가 싶기도 하고 뭐 그런 것이다.
그런 날이 춥게 느껴지면 이제는 읽지 않고 다락에 처박아둔 책을 꺼내보듯이 지나온 날들을 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히 반추한다. 붉은 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은 그 시간들을 발견해 내야한다. 그런 것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에 유감이긴 하지만...

난 90년도에 대학을 마치고 그 곳에서 정확히 1년 10개월을 살다가 이곳으로 돌아왔다. 왜 독일로 가느냐고 물었을때 난 남들처럼 공부하러 가요,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막연하게, 아주 막연하게 뭔가 조금은 달라질것이라는 기대감 한 톨만 가슴에 품었을 뿐, 마기스터나 독토어, 혹은 귀국해서 다른 뭔가 그럴듯하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할만한 그런 목적의식같은 건 없었다. 그대들이 그게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아님 진짜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난 열심히 살지 않았다.
어학수업도 열심히 받지 않았고 학부수업을 얼른 시작해서 빨리 마치고 어서 진짜 사회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바라보고, 느릿느릿 다시 뭔가를 시작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한국에 문득 나와 그이와 연애하고 다음해 봄에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지금은 잘(?)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결혼기간이나 아이를 길렀던 그 어느 시간보다도 물리적으로는 짧은 시간이었다. 가끔 그 짧은 시간이 왜 이렇게 선연한 시간의 그림자로 남아있는지 의아하다. 또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 너 참 많이 변했구나...!"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나도 내가 정말 많이 변해서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키도 조금 컸는데, 성격이나 생각이나 마음이나 내면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들은 떠날때완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거기, 그 곳에서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길지 않았던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다. 변환의 시간이었다.
난 정말, "기숙사 복도보다도 어두운 끝"을 다녀왔다. 끝에 까지 이르는 것이 여기서는 불가능했을까? 물론이다. 거기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괜찮았고 며칠을 굶어도 괜찮았다. "너, 왠일이냐" 혹은 "너 지금 밥 안먹고 시위하냐?" 또는 "불만이 있음 말해라." 라는 걱정과 힐난과 관심 등 타인의 나에 대한 여타의 테두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는 오로지 나 혼자였다.
그렇게 나는 나를 만났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너무 낯설어서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아마 그대들도 그런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해질녘, 불켜지기 시작하는 집들 속에 혼자 서서 말이다.... 하여, 그대들이 이 곳에 돌아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라도 나처럼 사소한 것까지 미리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교묘하게 그대들의 척골에 박힌 척수액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난 아직도 가끔 독일어로 꿈을 꾼다. 나는 백조가 흐느적거리던 그 저녁의 호수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서서 어둠으로 변해가던 나와 그 어둠의 끝에서 마침내 떠오르던 별 몇 개가 간절했나보다...
그대들도 후에 그러할까.. 이 곳에서.




anezka: 지금 제게 정곡을 찌르는 글이군요 . . 정말 잘 읽었습니다 .. : ) [04/14-21:19]
J: 행복하십시여.... [04/15-04:54]
너무 아름다: 운 글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글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글입니다. [04/20-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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