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학기 내내 골치 아팠던 과목의 Klausur를 쓰는 날이었다.
원래 10분 일찍 가서 여유롭게 커피도 사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오려고 했는데,
10분 일찍 가는 기차는 아깝게 놓치고 그 다음에 온 기차는 2분을 정체해서
결국 엄청 뛰어서 교수님이 강의실 문을 여는 순간 자연스럽게 인파에 묻혀서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작년에 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붙었다는 공부잘하는 애가 쓴 필기도 받았고,
올해 그 교수님이 내신다는 책의 초벌버전도 복사해둔 상태였다.
모르는 단어가 미친듯이 많았지만, 당신이 쓰신 책이라 그런지
책과 필기를 읽는 내내 교수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면 뭐하나, 단어의 뜻은 여전히 머리를 맴돌고,
사전을 찾아봐도 전문 용어라 정확히 감이 오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13시. 시험 시작.
핸드폰과 노트북은 금지이고, 화장실은 조교의 감시하에 한명씩만 다녀올 수 있으며,
오늘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은 여름학기에 재시험의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고 했다.

2시간 동안 히치콕의 한 영화를 보고,
이후 2시간 동안 문제 11개 와 보너스 문제 2개에 답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보너스 문제 1번은 까메오로 등장한 히치콕이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지 쓰는거였고, 나는 결국 못 찾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주관식 문제 풀 때 한번도 공란으로 낸 적은 없는 실력으로 또 찍었다.
''Vermutlich im Bahnhof''
교수님이 채점하시다가 웃으라고 쓴 답안같다.
그 영화가 열린 형식인지, 3막극 형식인지 5막극 형식인지, 각 막의 내용을 요약, 분석하고,
주인공 캐릭터의 발전 과정과 영화 시작단계가 극과 캐릭터에 주는 영향을 서술하고,
Intrige와 Gegenintrige를 발견했으면 적고, 영화가 암시하고 있는 내용을 적고 등등
문제는 교수님 말씀 맞다나 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진 않았지만,
한참 해매느라 내 온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옆에 친구는 그런 내가 안스러웠는지 두번이나 컨닝을 시켜주려고 시도했다고 하는데,
나는 내가 쓰려고 붙잡고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정신없어 그 애를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옆에 친구가 다 쓰고 나가길래, 나도 대충 정리하고 따라 나갔다.
교수님이 내가 쓴 답안을 보시는데, 일단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시나 이내 심각해진다.

밖에 나온 아이들은 저마다 답을 맞춰보기에 바빴고,
베트남에서 온 여자애는 Intrige가 뭔지 몰라서 답을 못했다고 울상을 지었고,
나는 Intrige가 뭔지 알았는데도 틀린 답을 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졸업시험 이전에 다른 시험은 없다.
방학이고, 다음학기에는 논문과 졸업작품 준비를 위해서 한 학기 휴학을 할테니
실로 길고 긴 방학이 될 것이다.
길에 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겐 내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나에게 뭔가 특별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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