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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유학일기 소리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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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지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5,140회 작성일 07-09-24 21:07

본문

 
 
그라시 박물관(Grassi Museum) 악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세기 이탈리아 산 클라비코드의 소리구멍.

오늘은 Grassi Museum의 악기 박물관과 민속학 박물관에 다녀왔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한국인으로서
나는 일상에서 학업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을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고,
먼 시야로 거리두기를 하면서 내 나라를 철두철미하게 다시 보곤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주변국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감정적이 아닌 실질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기회가 끊임없이 주어졌고,
나의 관심사는 생각치도 못했던 중국과 일본에 가닿았다.
이 먼 독일에서 말이다.
 
학부에 입학한 이후, 내 생에는 징검다리처럼 뚜벅뚜벅 중요한 만남의 순간들이 있어왔다.
대학 1학년 때 소포클레스를, 대학 3학년 때 니체를 만났고,
독일에 와서는 스기우라 고헤이를 만났다.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의 저서를 접하면서
나는 '아시아의 훌륭한 이웃'으로서의 중국과 일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최근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의 저서 <형태의 탄생>을 꼼꼼하게 완독하고는,
바로 집 앞이기도 한 Grassi Museum 민속학 박물관에 꼭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더랬다.

막상 박물관에 갔더니 악기 박물관으로 발길이 먼저 닿았다.
오늘 악기 박물관에서 내내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 악기들의 소리구멍.

이런 아름다운 소리구멍들은 주로 현이 있는 악기들에서 보인다.
쳄발로, 스피넷 등 건반악기들과, 비올라 다 감바, 류트, 테오르베 등 현악기들.

특히 악기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온통 이슬람 문양으로 장식된 베네치아 산 쳄발로의
정교하기 이를데없는 소리구멍이 가장 아름다웠다.
보는 순간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5유로를 주고 허가증을 사야 한다고 하니,
어두운 박물관에서 그리 잘 찍을 자신도 없어서
그보다는 덜 아름다운 소리구멍을 가진 이 악기의 엽서를 이렇게 한장 사는 걸로 만족했다.

 
+ + +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은 '아시아인의 형태의 힘은 소용돌이 치는 생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악기들을 보는 순간,
나는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께서
소위 '근대화' 이전 서양의 공예품과 민예품들을 충분히 접한 후에도
같은 결론을 내릴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형태 속에 소용돌이치는 생명의 흔적은 아시아인의 전유물이 아니란 사실이 뇌리를 때렸다.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느 문화적인 생태계에 속해있든,
그가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형태에는 그 생명력과 에너지가 반영되는 것이다.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이 형태 속에서 우주와 생명을 통찰력있게 직관하는 점은 깊이 공감하지만,
한편 그것을 지속적으로 아시아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이 사진 속의 소리구멍은 꽃모양이지만,
악기 박물관에 전시된 악기들이 가진 다채로운 소리구멍들의 형태 중에는
격자문양, 소용돌이문양, 당초문양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삼태극에 가까운 정교한 형태까지 눈에 띄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묵묵한 끈기와 빼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들이
악기 속에 꽃피워낸 창조력을 바라보니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나는 저 조그만 소리구멍 속에 '소리의 신비'와 '형태의 우주'를 깊이 담아내고 있는
그 장인의 작업 모습을 그려보았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밀도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시간을 촘촘히 채우지 않은채 흘려보내는 습관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기계문명의 편의와 사회적 견해들이 제공한 '간소화'가 그 빌미를 주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터키인들은
원형극장에서 6~7시간씩이나 몰두하며 연극을 관람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식하기로 유명했다는데,
오늘날 성인 남자가 먹는 양의 7배 가량을 먹었다고 한다.

주로 자기 신체의 동력을 에너지원으로 움직였던 옛날 사람들은
정력도 분명히 훨씬 강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성적인 에너지 뿐 아니라, 생명 현상 전반에 걸쳐 삶의 에너지가 왕성했을 것이다.

저런 소리구멍을 탄생하도록 한
장인의 정신과 육신을, 그리고 그의 생각과 신체가 처한 문화 생태 환경을 상상해보면
그 형태의 비밀 속에는
'고도로 밀도있는 시간'과 '삶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 형태,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생명과 우주의 에너지 자체는 아시아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근대 이전,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은 서양의 어느 장인,
그의 요체 역시 '생명을 가진 인간'이었고,
동양에서 주류적인 철학으로 정립된 개별적 사상들의 체계를 접하지 않더라도
그 기저에 흐르는 보편타당한 에너지의 본질은 공통적으로 감지했으리라 생각한다.
 
 

+ + +

Grassi Museum은
악기 박물관, 민속학 박물관, 응용미술 박물관이 함께 있는 대형 복합 박물관이다.

얼핏 생뚱맞은 조합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이 세 박물관들의 소장품들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공예 및 민예'라는 특성이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악기 박물관은 라이프치히 종합 대학 소속이기도 한데,
관련된 소속학과는 음악학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과와 미술학과, 동양학과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악기 박물관이 민속학 박물관 및 응용미술 박물관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이 전체 박물관은 그 내부가 아직도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다.
내년인 2008년이나 되어서야 모든 소장품들을 완전히 드러낼 예정이다.

민속학 박물관은 예전에 자연농원에 있던 '지구마을'을 얼핏 떠올리게 했다.
물론 전시관 내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까운 시스템과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은 유라시아 대륙에 한한 소장품만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국가별보다는 민족별, 문화별로 소장품을 진열해두었다.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발칸반도와 스페인 남부로부터 시작해서
서아시아를 지나 러시아의 여러 민족들, 에스키모 등 위도가 높은 추운 지역들을 거쳐
사할린으로 내려와 아시아 동쪽 끝인 일본 원주민 아이누족을 돌아,
특이하게도 시계방향으로 회전하여,
한국을 지나서 중국, 티벳, 동남 아시아... 이렇게 다시 서남쪽 더운 나라들을 향한다.
(원래 이 역방향으로 돌도록 의도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반대로 돌아도 괜찮다.
서구문명이 동양의 영향을 받은 점을 성실하게 보여주는데 주력하는 점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페르시아와 일본의 금속공예품 혹은 생활용품들은 정교함이 아찔할 정도다.
일본과 티벳의 전시물들 앞에서는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이 책에서 예를 든 내용들이 현저하게 눈에 띈다.

저 밀도있는 에너지를 가진 물건들이 고오오오~ 하고 뿜어내는 기운에 금방 지쳐서
마지막 부분은 집중해서 꼼꼼히 보진 못했다.

박물관에서 나오자마자 우리집 창문이 보였다.
이렇게 일상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도되고 신기하던지.

3시간 30분 동안 집 앞에 있는 먼먼 나라의 여행을 다녀왔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닿지 않을 듯한 곳에서 탄생해서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꿈틀대는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런 형태들로 가득한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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