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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유학일기 [Friedhof] 죽음-순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지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4,891회 작성일 07-04-28 17:49

본문

fried01.jpg


심심하면 글자로 끄적끄적 낙서를 한다.
손 가는대로 낙서를 하다보면
문자는 차츰 본연의 그림적 속성을 전적으로 새롭게 환기한다.
지시된 내연적 의미에만 의존하지 않는
외관적 형상 자체로 한층 중첩된 의미를 도출한다.
의미와 형상이 몇겹으로 맞물린다.

퍼스의 기호학에서 이미지를 '상징(symbol), 도상(icon), 지표(index)'로 구분하는데,
이런 구분을, 결국은 이미지적 형상을 지닌 문자에도 종종 적용해보곤 한다.
세계의 문자 시스템만을 기준으로 문자의 속성을 분류해본다면,
라틴 알파벳은 '상징(symbol)', 한자는 '지표(index)'에 가깝고
한글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양자의 특성을 고루 포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단순한 낙서는
라틴 알파벳 문자의 '상징(symblo)성'을 다시 '지표(index)화'하는 행동이라 볼 수 있다.


* * *


나는 독일어의 Friedhof란 단어를 좋아한다.

우리말 '무덤'이나 '묘지', 한자의 '墓'
영어의 'grave'나 'graveyard', 'burial ground'란 단어들은
모두 '묻는다'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독일어에도 'Begräbnisplatz' 혹은 'Grabplatz'라고 하여
'묻는다'라는 뜻의 'graben'에서 파생한 단어들이 있다.

반면 독일어의 또다른 단어 'Friedhof(프리트호프)'는 '안식의 뜰'이라는 뜻으로,
죽은자의 죽음이 매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죽음이 산자에게 의미하는 바를 상기시킴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느낌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독일 무덤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죽음에 관한 낭만주의적 상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Friedhof'가 시작부터 '안식의 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정된 관념인 것 같다.
이 단어는 영어의 'churchyard'와 그 어원이 개념적으로 보다 일치한다.
Friedhof는 본래 고대고지독일어(althochdeutsch) 'frithof'에서 유래했으며,
'교회 담장에 둘러싸인 앞뜰 (eingefriedeten Vorhof einer Kirche)'이란 뜻을 가진다.
그 장소는 물론 죽은자들이 영면에 드는 곳이었다.

그 자체로 생태적이고, 생명을 가진 것처럼 생멸하고 성장하고 쇠락하는 '언어'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Frithof'로부터
'안식의 뜰(Hof des Friedens)'이라는 의미를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Friedhof'로 변화했다.

독일에는 시내 한가운데 아름다운 묘지가 위치한 도시들이 많다.
내 집 바로 앞에도 리하르트 바그너의 어머니와 누나,
클라라 슈만 및 리하르트 바그너를 가르친 음악 선생님의 무덤 등이 있는
'요한니스 묘지(Johannis Friedhof)'가 있다.

아름다운 비석들은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무덤을 장식하는 꽃과 나무들은
개체의 죽음이 생태계적인 생명으로 부활하고 윤회한다는 사색에 잠기게 한다.
도시의 무덤들은 생태학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을 가진 생물들에게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가까운 곳에 이런 묘지가 위치한 데에는
도시가 형성될 당시부터 교회가 시내 중심에 있었던 점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터부시하는 발상 자체를 금기한다는 생각도 든다.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런 죽은자들의 터는
죽음이 환기하는 단절적 고립감과 외로움을 완화시키면서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차분히 받아들이는
종교적 기능마저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 * *


Friedhof는 f로 시작해서 f로 끝난다.
십자가가 울타리를 배경으로 줄지어선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소문자 f는 가로 세로 획이 직선으로 교차하는 알파벳으로,
t의 십자가적 속성과 비슷하면서
직선적 특성이 강한 대문자 F와는 달리 곡선으로 확장되는 형태적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래서 엄숙한 죽음의 십자가 F로 시작한 단어이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는 생태학적 부활 및 윤회로, f로,
마무리되며 곡선의 가능성이 극대화된 순환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fried02.jpg


르네상스 시대에 독일에서 즐겨 사용했던 슈바바허(Schwabacher)체.
Friedhof라는 글자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적용해보았다.
이 서체에서는 오히려 대문자 F가 소문자 f보다 약동하는 곡선성이 훨씬 강하다.

질감이 좀 거친 캔버스 천으로 글자를 오린 후 외곽을 불에 그을려서 깔끔하게 마감했다.
글자에 물성과 육체를 돌려주는 작업은 언제나 즐겁다.
손으로 촉감하고 만져지는 '몸'의 속성은 생명에 생명다운 외관을 부여한다.



fried03.jpg


슈바바허 체의 e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귀엽다.
깔깔깔 웃고 있는 옆모습 같다.

가장 무서운 관념이면서도 음성적으로도 묵직한 그늘을 드리운 Tod(죽음)에 대항하여,
매장되는 순간부터 관념적으로도 생태학적으로도 죽음 자체가 역설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위안의 단어 Friedhof가 단어 한가운데로부터 웃음을 터뜨리는 것 같다.
긴장된 삶을 웃음의 이완으로 구원해주는 카니발의 바보처럼 말이다.
추천4

댓글목록

Netter-Mann님의 댓글

Netter-Man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독일의 비석이 왜그리 화려한가 했더니 역사적 전통이 있었군요. 호기심이 많은 저로선,
어떤 동네를 방문하면 묘터의 비석들 보러다느라 바빳는데, 역시나 주위의 반응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연고도 없는 곳에, 그것도 묘지에 뭣하러가냐고요.....
뭐 이곳의 유령들이 헤코지를 하더라도 - 못 알아들을게 분명하니까 - 한풀이도 못 들어줄테고, 원한 살 일도 없었으니, 심히 걱정할 바는 없습니다만.
저도 Friedhof란 단어가 꽤 멋지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경건하면서도 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미의 단어랄까....아무튼 꽤 고민하고 쓰신글이기에 추천한표!

유지원님의 댓글의 댓글

유지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독일 도시마다 묘지를 둘러보는 걸 좋아하고
저 말고도 그런 분들이 꽤 계신걸로 아는데,
과연 한국분들 중에선 다짜고짜 뜨악부터 하시는 분들도 많더군요. :)

본에 있는 로베르트 슈만의 무덤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한국의 귀신들은 주로 자신의 생전 원한 때문에 산 자에게 의사소통을 시도하는데,
독일 귀신들도 같은 이유로 출몰하는지 궁금해지네요.
문학 작품에서 보면 그냥 자기들끼리 벌떡벌떡 일어나 춤추는 것 같던데요.

한국어, 영어, 독일어 아닌 다른 나라 말에서는
Firedhof가 어떤 어원을 가진 단어로 나타날지도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웬지 덜 문명화된 지역에서
가장 시적이고 심오한 단어를 가지고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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