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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유학일기 내 영혼의 안식처, 슈만의 무덤 (Bonn)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지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7건 조회 7,127회 작성일 05-08-11 19:03

본문

라인강변의 노래, 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op.48)'에 부쳐.
 
 
200308300003.jpg


  
  

   *
   나는 지치고 가난한 나그네였다.
   홀로 떠나는 길고 오랜 여행으로
   기력을 잃고 허기진 나그네였다.
   여행의 끝을 알리는
   아담하고 가지런한 파스텔톤 건물들이
   기차의 창 밖으로
   하나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에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 이후 줄곧 서울에서 성장해 온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투사하고픈 
막연한 대상에 대한 향수 어린 그리움만은 줄곧 지녀왔나 보다. 

그래서 독일에서 처음 정착했던 작은 도시 '본'은 내게 고향 같은 곳으로 다가왔다.
직접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았고 진정성에 대한 갈망을 지닌
치기 어린 대학생이었던 나는 항상 무언가를 야심차게 찾아 여행을 다녔다.
그런 힘든 여행 끝에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던
본의 나즈막한 도시 풍경을 보면 나는 안심한 나머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숙사에 돌아와 내 침대와 내 이불 속에 몸을 묻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일 수 있었다.


*
기숙사는 그렇듯 내 삶의 안식처였다.
그리고 본에는 또다른 안식처가 더 있었다.

이 도시의 시가지 남쪽에는 음악가들의 거리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모차르트 거리, 하이든 거리, 리하르트 바그너 거리, 심지어 베젠동크 거리까지.
본과 별 상관없는 이 음악가들의 거리가 생겨나게 된 유래가 재미있다.

본 남쪽에는 예전에 엔데니히 바흐라는 시냇물이 흘렀고,
그곳에 새로 생긴 거리의 이름은 그래서 '시내'라는 뜻의 '바흐 거리'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거리가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이후에 그 거리에서 뻗어나온 작은 거리들의 이름은
독일 음악의 후손들의 이름을 따게 된 것이다.

음악가들의 거리와는 별개로
두 명의 위대한 독일 음악의 후손이 실제로 본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본이 낳은 아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리고 본에 몸을 묻고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아들 로베르트 슈만.

많은 동양인 관광객들이 베토벤의 생가에 우르르 몰려들었다가 황급히 떠난다.
그러나 슈만이 본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슈만이 말년을 보낸 집은 음악가들의 거리 근처에 있다.
그곳에 찾아가려면 재미있게도
슈만의 제자였으면서 그의 부인인 클라라 슈만을 정신적으로 연모했던 브람스,
'브람스 거리'라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야 한다.
슈만의 집은 현재 음악 도서관으로 이용되면서,
각종 행사와 다양한 자료들을 인심좋게 제공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렇듯 시민들의 교양과 지식을 살찌우는 문화 공간이 슈만의 집이라면,
시민들의 정신을 살찌우는 사색 공간은 슈만의 무덤이다.

그리고 기숙사가 내 삶의 안식처였듯, 그곳은 내 영혼의 안식처였다.

 
 
슈만 시인의 사랑(Dichterliebe,op.48) 열여섯 곡 중
연인을 그리는 달콤함을 노래한 제5곡 Ich will meine Seele tauchen "내 영혼을 담그리"(0'55)


 
*
독일에서는 공동묘지를 '프리트호프(Friedhof)'라 부른다.
'안식의 뜰'이라는 뜻이다.

하늘을 가리는 빽빽한 나무 길 사이로 가느다란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그 묘지는
무심한 새 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리는 고요한 공간이다.

아름다운 묘비들을 관조하다 보면
죽음은 신비롭고 친근한 동경의 대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무덤을 둘러싼 꽃과 나무들의 삶과 무덤 속 죽음이 교차하는 장소,
그렇듯 죽음을 통하여 삶을 반추하는 장소가 바로 그곳 '안식의 뜰'이다.
그래서 그곳에 다녀오면 예배를 드리고 온 것과 같은 정신적 정화를 느낀다.

바로 그곳에 로베르트 슈만이 잠들어 있다.
다른 묘비들로부터 약간 고립된 곳에 고고하게 서 있는 슈만의 묘비에는
오랜 헤매임 끝에 찾아오는 이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반기는
도도한 품위가 서려 있다.

빈 중앙 공동 묘지에서도 베토벤,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등
수많은 음악가들의 묘비를 만났지만,
슈만의 묘비는 단연 그들보다 빼어나다.


*
슈만의 묘비.

묘석의 중앙에는 슈만의 옆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그 양쪽으로는 두 어린 정령이 앉아 있다.

왼쪽 남자 정령은 천사의 날개를 달고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이것은 슈만이 작곡한 천의무봉의 기악음악을 상징한다.
오른쪽 여자 정령은 나비의 날개를 달고 악보를 보며 노래한다.
나비는 프쉬케, 즉 영혼과 영혼의 소리를 의미하며,
이것은 리트(Lied), 즉 가곡으로 대표되는 슈만의 성악음악을 상징한다.

기악과 성악의 사이,
아래쪽에 한 성숙한 여인이 슈만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한 손에 악보와 하프를,
다른 손에 음악과 승리를 상징하는 아폴로의 월계관을 든 그녀는
뮤즈인 동시에 슈만의 아내, 슈만의 사랑인 클라라이다.

음악과 사랑의 의미를 모두 지닌 알레고리로 가득한 묘비,
한 음악가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묘비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
슈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슈만은 내 청년기의 일부를 본에서 보내던 시절 내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 무렵 나는 묘비 앞 벤치에 앉아
프릿츠 분덜리히의 미성으로 그의 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을 들었다.

본 대학을 다녔던 하인리히 하이네가 시를 쓰고,
본에서 만년을 보냈던 슈만이 곡을 붙인 그 가곡은
바로 내가 살던 라인강변의 이야기였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 특유의 아이러니와 정서가 나타나는 이 시에는
사랑과 실연에 담긴 모든 감정,
연정, 불안, 쓰라린 비통함, 책망, 체념,
그리고 당대의 풍조답게 자기 조롱까지 나타나 있다.

이 연가곡의 열여섯 곡 중 마지막 부분은 이런 가사로 맺어진다.

...
내게 열두 명의 거인들을 데려오라,
그들은 라인강변 쾰른 대성당의
강한 크리스토프보다
힘센 자가 아니면 아니 되리라.

그들은 관을 짊어지고
바다 속에 내던져 가라앉혀야 하리라.
관이 그렇게 크다면
무덤도 그만큼 커야 하겠지.

어찌하여 그 관이
그토록 크고 무거워야 하는지 아는가?
내 사랑과, 아울러 내 아픔도
함께 가라앉아야 하니까.



 
연가곡의 마지막 제16곡 Die alten boesen Lieder "오래되고 비참한 노래들"(4'08)


슈만의 무덤을 보고 있으면 이 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
슈만 역시 생전에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클라라를 향했던 연정과 장인의 지독한 반대,
자살로 마감할 뻔 했던 삶,
평생 그를 괴롭힌 우울증과 말년의 정신병.

그의 관도 그토록 크고 무거워야 했을까?
내가 영혼의 안식을 취하듯이,
그의 사랑과, 아울러 그의 아픔도 함께 가라앉아
마침내 그도 안식을 취하고 있을까,
이곳 '안식의 뜰'에서?


 
실연의 쓰라린 비통함을 노래한 제7곡 Ich grolle nicht "나는 후회하지 않으리라"(1'19) 


*
내가 본에 첫 발을 디뎠을 때가 생각난다.
비가 올 듯한 어느 아침이던가.
예전에 와 본 듯한 낯익음이 오히려 이상했던 첫인상.

그곳은 일상의 한순간에도 까닭없이 문득 떠올라
나를 한없는 상념에 잠기게 한다.
내가 사랑했던 라인강, 고향 같던 도시 본, 편안한 보금자리였던 기숙사,
그리고 슈만의 흔적이 아득하게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분덜리히의 음반을 올려 놔야겠다.
추천14

댓글목록

도보님의 댓글

도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가을엔 더 멋있겠다 싶습니다.
영혼의 안식처...
본 참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다란 생각 했었습니다.
유지원님의 글은 언제나 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읽고갑니다.

Lisa-marie님의 댓글

Lisa-mar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또 분위기 께서 정말 죄송 합니다만
몇년전 한국에서 음대로 유학 오신 어떤 분이
" Ich grolle nicht "
의 뜻이 " 나는 고릴라가 아니다 " 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죄송 합니다. 쓸데 없는 소리해서.
저를 죽여 주십시오.  emoticon_128

비오는날님의 댓글

비오는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십여년전에 홀로 배낭여행 이였음에도 "많은 동양인 관광객들"처럼 베토벤의 생가에만 들르고 휘리릭 떴었답니다 emoticon_007
작고 아담하고 조용한 도시였다는 인상이 아직까지 있구요.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유지원님의 글을 인쇄해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네요.  바흐거리며, 브람스거리등...
수필같은 님의 글은 언제나 짱입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독일가곡, 정말 좋네요.  고등학교때 좀 특이한 음악선생님덕분에 독일가곡, 이태리가곡 한 이십여곡 들을기회가 있었는데, 급기야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실기시험을 각각 독일, 이태리가곡 원어로 불러야 했답니다.  얼마나 외워댔는지 지금도 어떤노래는 가사가 생각이 나요.   

리사마리님, ㅋㅋㅋ 님은 정말 귀여우십니다.emoticon_144

유지원님의 댓글

유지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도보 / 본을 비롯한 독일의 도시들은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moticon_108

Lisa-marie / 저도 마침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네요.
성악 전공하는 한국 유학생이 슈베르트 가곡으로 레슨을 받는데,
독일인 교수가 듣기에 이 학생이 가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더랍니다.
교수가 너 이 가사의 'Grille(우수)'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어보니
학생이 물론 잘 안다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답니다.
'고기 구워 먹는 그릴이잖아요!'

비오는날 / 참 좋은 음악 선생님이셨네요.
근데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가곡을 원어로 부르게하는 선생님들이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본은 외국인에게 그리 매력적인 관광도시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이 뽑은 최고로 살기좋은 주거도시랍니다. 특히 노인들이 살기 좋지요. :)

무스타파님의 댓글

무스타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며칠전 청소하면서 슈만의 가곡을 듣다가 감동해서 눈물이..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우연히 유학일기의 유지원님의 글을 읽으면서 흘러나오는 분덜리히의 Ich will meine Seele tauchen 너무 좋네요~~~
참고로 가사도 적어봅니다.

Ich will meine Seele tauchen in den Kelch der Lilie hinein
Die Lilie soll (klingen) tauchen, ein Lied von der Liebsten mein.
Das Lied soll schauern und beben wie der Kuss von ihrem Mund,
den sie mir einst gegeben in wunderbar süßer Stund.

물론 울 남편한테 부탁했죠.

저는 본에 사는데도 아직 베토벤의 생가조차 가보지 않았답니다.
슈만의 묘지도...쩝...
혹시 유지원님 엔더니히 기숙사 사셨어요? 예전에 울 남편 거기서 기숙사 도우미 학생이었는데..

본은 참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도시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본에만 살아서 그런지 저또한 본에 대한 애정이 크답니다.

saillum님의 댓글

saillum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이제껏 죽 본에서만 살았는데...
매일 오늘 머하고, 오늘 머해먹고 사나... 하는 저랑 어찌이리 다른지...
저, 고백하건데 슈만의 가곡을 아마도 아마도 첨 들어보는 것 같습니다...
슈만 무덤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정말 꼭 가보고 싶네요.
고등학교 시절, 소설 슈만과 클라라는 한편의 잔잔한 감동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너무 글 잘 읽었습니다. 한편의 수필처럼, 한편의 음악 안내서 처럼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세요..
Bonner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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