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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사는얘기 나의 어머니

페이지 정보

작성자 목로주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2,904회 작성일 13-06-25 21:37

본문

어머니는 어린 나의 이상형이었다. 어려선 '난 크면 엄마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하였다.

물론 내게는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우셨던 분이다. 그러나 40대 중반에 남편이 병상에 들어눕게 되자 의료보험도 없던 그 당시 천문학적 숫자의 수술비며 입원비를 마련해가면서 억척같이 생활을 일구어내고 3남매를 대학 공부까지 시키셨던 걸 보면 그냥 부드럽기만 한 분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내가 어머니의 그 나이가 되고서야 비로서 들었다.

어머니는 고생을 할 만큼 하신 후 나와 오빠가 직장을 구하기가 무섭게 당신은 편안한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는 듯 서둘러 생을 마감하셨다. 그래서 딸이 나이들어 가며 어머니와 나누게 되는 그런 가슴 속 얘기나 세세한 교감은 나와 어머니에게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이까?

어머니는 7남매의 장녀셨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는 꽤 좋은 시절을 보내다가 6.25 전쟁 와중에 일과 재산을 모두 잃으신 분이라서 그 전에 이미 성인이 되신 어머니와 큰외삼촌은 형제 중에 그나마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측이셨다. 그리고 집안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장녀로서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 집안을 돌보셨다. 그러다 27살이 되어 당시로선 노처녀의 딱지를 달고 다니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가족의 차남이셨다. 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일가를 이끌고 일본에서 돌아와 여기저기 정착할 곳을 찾다가 전쟁 중에 결국 부산에 터를 잡으신 모양이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하던 그 시절, 온 식구들이 벌어오는 돈을 모아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하셨던 것 같다. 그 집의 문간방에서 어머니의 신접살림이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그 집에는 엄한 시어머니와 어려운 시아버지, 손위 형님 내외와 4명의 시동생과 1명의 시누이가 있었다. 그리고 결혼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아버지에게는 전처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에게 따지자 그 말을 미리하면 결혼해 주지 않을 거 같아서 일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하셨단다. 난 그 말을 듣고 정직하지 않았던 아버지 때문에 창피해야 하는 건지 그래도 덕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참 헷갈렸다. 하여튼 아버지와 그 전부인 사이에서는 자녀도 없었고 헤어진 후 완전 남남이 된 모양으로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큰어머니에게는 그것이 사실은 좀 문제였다. 큰어머니는 일본에서 결혼하여 시집을 따라 한국으로 들어오신 재일교포로 첨엔 한국말도 잘하지 못하셨다. 한국에 들어와 얼마 안되어 우리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혼인시키셨는데 그리하여 큰어머니는 손아래 동서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낯선 땅에 와서 시집 식구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고 매일 매일 고된 시집살이를 하던 큰어머니께 새로 들어온 동서는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이자 자매였다. 전쟁이 나자 집의 아들들은 다 전쟁에 나갔고 전쟁이 끝나도 계속 군인을 했던지라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들이 없는 집에서 밥을 할때도, 물을 길을 때도, 기차길에 떨어진 석탄을 주우러 부대자루를 들고 나갈 때도 그리고 무서운 시어머니에게 혼이 날 때도 그 두 분은 늘 함께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혼으로 그 두 분은 헤어지게 되었고 새로 들어온 동서, 즉 나의 어머니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드신 큰어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는데 한번은 나의 어머니에 관한 일화였다. 새로 시집 온 색시는 계속하여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침이면 곱게 화장을 하고 출근을 하였다고 한다. 막상 같이 일하는 동료가 없어졌는데 부족해진 일손이 메워지기는 커녕 시집살이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는 자기 앞에 보란 듯 화장을 하고 나가버리는 새 동서를 바라보는 큰어머니의 심정을 읽은 것도 내가 마흔줄이 넘어서였다. 그렇게 괘씸한 한달이 지나가자 하루는 할아버지가 내 어머니를 불러 앉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일을 하러 나갔으니 벌어온 돈을 내어 놓으라고 하셨단다. 

어머니로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매일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사람에게 시집에서는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새벽에 부엌에 들어가 같이 밥을 짓고 퇴근하여서는 저녁을 차리고 설것이를 하고, 집안 일은 할만큼 하는 데다가 군인 남편이 들고오는 군복 빨래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옷을 빨아본 적이 없다. 날씨는 차가워지는데 개울가에 앉아 맨손으로 그것을 빨다 보면 눈물이 절로 나왔다. 시집가지 말라고 하시던 친정 어머니의 참뜻이 뭔 지 알 것 같았다. 신혼여행 후 복귀한 직장은 잔업이 넘쳐나 코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코에서 난내가 떠나지 않았다. 결혼 후 한달이 넘었는데 남편의 월급봉투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시집은 시동생들이 학교라도 제대로 다니고 있건만 친정의 동생들은 아직 초등학생과 중학생. 고등학교를 안가겠다고 하는 큰동생까지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지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보아하니 손위 형님이 집안의 신임을 단단히 얻고 있는 맏며느리라 이미 당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집 안에는 없었고 시동생들 다 결혼하고 나면 이 집은 당연히 형님네가 물려받을 것이니 차남인 남편은 언젠가 집에서 나가야 할 것이었다. 시집에서 제대로 직장을 가지고 벌어오는 사람은 시아주머니와 남편 뿐. 시댁 식구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여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 뻔했다. 그런데 지금 내 월급까지 달라니. 이런 어거지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버님, 저도 그 돈이 지금 없습니다. "

"아니. 아가. 그럼 그 돈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차비하고 용돈하고... 나머지는 모두 곗돈을 넣었습니다. "

"...................."

그 후 일어난 사정은 본인들에게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과연 그 다음 달부터 어머니가 월급에서 얼마라도 뱉어내셨는지, 조금이나마 시부모님 용돈을 쥐여 드렸는지 아니면 그 조차 아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큰어머니는 거기까지만 들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효'가 최우선 가치었던 아버지 집안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하건데 어머니의 답변은 그 자체만으로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항이자 저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곗돈을 타는 족족 시집의 대소사에 갔다 바쳐야 했다'가 부부 싸움 때 마다 등장하는 어머니의 레파토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당시 재테크의 일환으로 '계'를 애용하신 것은 사실이었던 같다. 

세월이 바꿔 이 시대의 부모들은 장성한 자식들에게 의존하기는 커녕 자식들이 손을 벌리지만 않아도 고마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자신의 수입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던 어머니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였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욕심이 많으신 분은 아니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큰어머니는 그 집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는 할머니께 해드렸던 은비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월급이 시집으로 얼마가 들어갔다니 어쩌니 따지지 않으셨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리대로 처리하셨다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이제 수십년이 다시 흘러 나의 큰어머니까지 돌아가셨다. 오랜 세월 혼자의 몸으로 자식 넷을 키우신 큰어머니에게 그 집은 유일한 재산이자 버팀목이었는데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집 때문에 그 자식들 사이에 큰소리가 오고 가고 형제들이 뿔뿔히 갈라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할머니께 해드린 만큼만 돌려받고 기뻐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얼마나 현명하셨던 분인지 알 수 있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재산은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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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님의 댓글의 댓글

목로주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속편...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별로 많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항상 곱게 입고 단아하게 앉아 계신 모습이나 어린 내 눈에도 작아보일 정도의 체구 등등만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시고 숱이 적은 머리를 쫑쫑 따신 다음 쪽을 지어 올리셨다. 그리고 은비녀를 꽂아 마무리 하셨다. 그러다가 외출을 하게 되면 그 비녀를 빼고 허스룸한 비녀로 바꾸셨다. 내내 그 옆에 앉아서 할머니의 머리손질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던 어린 내가 어쭈었다.

"할머니, 외출 하시니까 이 예쁜 비녀를 꽂으셔요."
"밖에 좋은 것을 하고 나가면 잃어버린단다."
" ........... ?"

그 때는 할머니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햇다. 내가 워낙 천성이 주의성이 없고 미련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커서 도서관 열람실에서 금딱지 시계를 책상 위에 풀러놓고 화장실 다녀오다 잃어버린 후 할머니의 말 뜻이 뭔지 비로서 이해했다.

사람과 세상을 신뢰하는 것은 좋으나 세상은 꼭 그런 사람들로만 채워져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한다.

  • 추천 1

Noelie님의 댓글의 댓글

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좀더 커서 보니까,

내 시계를 가져가는 사람 중에는

ㅡ 쉽게 좋은 물건 갖고 싶어서
ㅡ 남이 그런 거 갖고 있는게 무조건 미워서
ㅡ 장발장 같은 사람
ㅡ 드러나지 않아도 선천성 뇌의 질환에 의해 행동한 사람
ㅡ 이런 시계를 가진 사람은 분명 부자일 태니 내가 가져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무조건 자신의 신념만 믿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
ㅡ 혹은 바로 나 자신

그외에도 많은 타입이 있다는 걸 알게되지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신이 아니다보니  내가 잃은 것에 대해 초탈해 질 수 만도 없습니다. 원래 삶이란 그런거지 뭐 하고 체념하려고 애만 쓰는 거 겠지요.

Noelie님의 댓글

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목로주점님 이야기가 이상하게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꼭 아는 친척분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그 시대 분들의 사는 이야기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이 많은, 살림만 하는 맏며느리와,  양장하고 화장하고 직장다니는 동서간의 불화 이야기도 낯설지 않습니다. 70년 대 많은 가족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일제시대나 전쟁 전후에는 여성이 출퇴근 하는 직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을 태니까요.
 
제가 어릴 때 엄마와 이모, 고모 그리고 무슨 여자 친척 어른들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나누시던, 어릴 때 제가 이해하지 못 했던 그 이야기들에 등장하던 어휘들이 윗글에도 자주 보입니다. 요새는 모두들 바빠 전화 하기도 어려운 친척들입니다만.

전축, 연탄가게, 양장점, 누룽지튀김 등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들과 함께 우리 부모님이 사시던, 그 힘들던 시절 공기를 마시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목로주점님의 댓글의 댓글

목로주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노엘리님, 셈을 너무 천천히 하셨어요. 호호

50년대 얘기입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세상이 급변하던 어렵던 시절.. 전축은 아직 너무 비싸서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내고 대식구가 사는 집에는 누룽지도 남아나지 않아 튀김해먹기가 하늘에 별따기 였을 것 같은 그런 시절이요.  저도 태어나가 훨씬 전이어서 아마도 그랬으리라 추측합니다. .

  • 추천 1

yxcvbnm님의 댓글의 댓글

yxcvbnm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Noelie님이쓰신 
 "70년 대 많은 가족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일제시대나 전쟁 전후에는 여성이 출퇴근 하는 직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을 태니까요. "
그렇지 않았었다고 저는 저의 어머니께 들었는데요 .
저희어머니는 전쟁전후 50년대에 은행에서 일하셨었고 여성동료분들도 많이 있었고
전쟁때문에 서울이 급박한 상황이 되자 은행버스로 모두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셔서 합숙을 하시다가 전쟁후 다시 은행으로 복귀하셨었다고 하시던데요 .
같이 일하시던 여자 동료분들과 아직도 가끔 연락하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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