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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유학일기 슈타인후터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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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람소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353회 작성일 13-04-11 10:51

본문

2009년 5월 25일 일요일 흐리고 비, 그리고 맑음
하노버에서 서쪽으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슈타인후더 호수(Steinhuder Meer)를 갔다. 일만 년 전 빙하기 때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로 수심이 일정하게 앝고 물고기가 아주 많이 서식하는 자연호이다. 분스토르프(Wunstorf)까지 기차로 30분 정도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슈타인후더까지 20분 달리면 조그만 호수마을이 나타난다. 기차비는 편도 3유로 30센트이고, 버스비는 왕복 3유로 60이다. 교통비로 하노버에서 왕복하는데 10유로 정도이다.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점심시간은 아직 멀었다. 슈타인후더에서 40분이나 기다려야했다. 호기심어린 젊은이가 말을 걸어온다. 하노버에 사는 아버지를 방문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갈이라고 한다. 스물 너댓 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집수리 등 건축일을 한다고 했다. 학교는 레알 슐레(직업학교)를 졸업했단다. 순진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대부분의 무식한 독일인들이 그렇듯이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북한에서 왔는지, 남한에서 왔는지를 되묻는다. 그러면서도 지난 번 월드컵 때 한국이 4강에 오른 것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가 오기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 청년은 영 무식했다. 헤겔도 칸트도 들어본 적이 없단다. 우리나라 스무살 청년이 퇴계나 율곡을 첨 들어 본다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버스정거장 벤치에는 우리 두 사람 밖에 없고, 그 청년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려는 듯이, 유럽 올 때 태평양을 건너오는지, 아니면 대서양을 건너오는지를 물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 온다고 했으나,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인구는 얼마이고, 영토는 어느 정도 되는지 독일보다 많은지, 큰지 ..... 시시콜콜 물었다.
억양으로 봐서 브란덴부르크 쪽 사람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통일 직전에 동독에서 태어난 청년임에 틀림이 없다. 혼란의 와중에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부모를 따라 서독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독일의 역사며, 정치, 지리에 대해서도 영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도시 젊은이들처럼 영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월드컵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자 그는 신이 났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독일이 어느 정도 실력을 발휘할지, 평가도 하고, 한국도 실력 있는 팀으로 알고 있다면서 반드시 2라운드에 진출할 것이란다.
지난 10년 중요한 국제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국이 아닌 바깥에 있었다. 우연한 일이긴 하지만, 많이 떠돌아다녔다는 증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독일에서 유학할 때였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다름슈타트 어느 작은 학생기숙사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그 때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을 하고, 일본 선수가 2등, 그리고 독일 선수가 3등을 했는데, 기숙사 티비 방에는 연일 많은 학생들이 모여 수다를 떨었다. 그때 그 기숙사엔 한국인이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라톤 1등에 대한 소회를 묻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느 독일 학생이 말했다: ‘음, 독한 인종들이 1,2,3등을 다 차지했군~!’ 다른 학생이 내게 물었다 : 한국인도 그렇게 지독한 민족인가? 유대인처럼?
그로부터 2년 뒤, 1994년 로마 월드컵 때도 무슨 일 때문인지 스위스에 있었다. 독일이 우승하고 전 국민이 축제에 나섰던 장면을 나는 브릭(Brig)에서 보았다. 당시 독일은 아마도 홈팀인 이탈리아와 결승전을 치루었는데, 승부가 나질 않아서 끝내 승부차기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독일의 승리는 더 짜릿했을 것이고, 독일인들은 독일통일과 더불어 독일의 국운이 상승하는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으며, 이웃나라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아침 식사하러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는데, 호텔 여주인 할머니가 “나는 독일인들이 한데 뭉쳐서 ‘도이치란트!’, ‘도이치란트!’를 외치는 것만 봐도 소름이 끼친다며, 나치 시절을 회상했다. 그 당시 그녀는 아주 어린 소녀였는데,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 살았다고 한다.
1996년 미국 아틀랜타 올림픽은 영국에서 봤다. 당시 나는 지방 MBC 방송의 제의로 유럽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나와 있었다. 한 달간의 강행군으로 두 편의 다큐를 제작하는 아주 힘든 일정이었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북독일, 프랑스 남동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웨일즈 지방의 탄전지대를 탐사하고 카메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2000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도, 2004년 애틀랜타 올림픽,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도 독일에서 보았다. 돌이켜 보면 하염없이 배회하는 영혼, 내 삶의 9할은 '바람'이었던 것 같다~!
웨일즈에선 비에 젖은 신발을 헤어드라이어로 말리다가 과열로 합선되는 바람에 호텔 전체가 전기가 나가버리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 같이 갔던 두 벙어리 기자와 카메라맨은 구경만 하고, 나 혼자서 사태를 수습하느라,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내가 나서서 사고원인을 설명하고 사과하게 되다보니, 소방경찰은 내가 사고를 낸 장본인 줄 알고 나만 소방서로 불러갔다. 어차피 나머지 두 사람을 소환해봤자 아무 것도 물어보거나 설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만 죽을 고생을 했다. 헤어드라이어가 과열되면 자동으로 전기가 차단되도록 설비되어 있어야지, 왜 녹아 붙어 버리도록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며, 웨일즈의 전기 설비와 과열된 헤어드라이어만 탓했다. 그러는 사이 슬쩍 ‘이거 영국산 헤어드라이어냐?’고 슬쩍 약을 올리기도 했다. 하여튼 고의가 아니었으며, 왜 밤새워 신발을 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한국의 중요한 방송사에서 영국이 탄전지대를 어떻게 훌륭하게 재녹화할(리컬티베이션) 수 있었는지를 취재하러 왔다는 말에 소방서 사람들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나는 소방 경찰을 설득해서 ‘호텔에 잘 말해서 우리에게 손해 배상 같은 걸 요구하지 말도록 잘 말해 달라’는 부탁까지 하고 빨간색 소방서 지프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밤 11시였다. 둘은 티비를 켜 둔 채, 잠들어 있었다. 그때 티비에서 한국이 양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보았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걸 알고 나왔지만, 너무 오랜 기간, 정신없이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느라 잠시 잊고 있다가, 웨일즈 론다(Wales, Rondha)에서 듣는 애국가는 신선했다. ‘마르고 닳도록’ 뛰어다닌 한 달이었다.
 
                            *                              *                                *
버스가 왔다. 그 청년은 다른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에 정거장에 혼자 남겨두고 나는 711번 버스에 올랐다. 운전수는 어차피 돌아올 것 아니냐며, 왕복표를 끊으란다. 3유로 60쎈트를 주고 표를 샀다. 버스로 달리는 시골길은 참 아름답다. 군데군데 소와 말들이 풀을 뜯고, 집들은 한결같이 단정한 자태로 어울려 있었다.
슈타인후더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토산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놀랍게도 한국처럼 호객하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 포장마차를 세우고 빵을 파는 아주머니는 차를 세우고 호수 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저 아래쪽은 비싸요, 여긴 빵 한 개가 2유로 20입니다! 여기서 사가세요.’ 라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소리치고 있었다. 별로 시장기를 느끼지 못했으나, 그 아주머니에게서 슁켄과 야채가 든 브레첸(bröchen) 한 개를 샀다. 이곳의 특산물은 바로 이 호수에서 잡히는 민물 뱀장어(Aal)인데, 말리거나 튀긴 뱀장어를 파는 가게가 많았다. 사실 뱀장어라는 단어도 여기 슈타인후더 호수를 방문해서야 알았다. ‘뱀장어 파는 집’이라는 뜻의 “Äalfischerei”라는 단어가 독일어 같지 않고 생소했다.
호수는 35km2나 되었다. 유람선이 다니고, 요트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흐리고, 춥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여서 유람선을 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호숫가로 난 산책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혼자 쓸쓸히 걷고 있는데 노부부를 만났다. 자기들은 저 남쪽 보덴 호수(Boden See ― 스위스와 독일 국경에 있는 남독일의 호수. 독일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근처에 살고 있는데, 지금 여행 중이라고 했다. 50살에 만나서 결혼한 지 10년이 된 막 노년에 접어든 부부였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하고, 이곳 저곳 식당 앞의 메뉴판을 두루 섭렵한 다음 ‘슈파르겔 요리’를 먹기로 했다. 20유로면 굉장히 비싼 음식이다. 그러나 일상이 아니라, 여행자에겐 이런 사치를 부릴 권리가 있다.
하노버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들 부부와 동행했다. 둘 다 이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50이 넘어 새로이 만나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공유하는 가치’가 없이는 불가능하리라~! 사소한 것에서부터 결정적이고, 비중 있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행복한 부부의 전제조건임을 ‘너무 늦게’ 이제사 알았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나로선 실행할 수 없는 원초적 불행이 있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이는 아주 평범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상식과 인간됨의 문제인데도. .....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건, 내가 떠안아야 할 원초적인 불행이었다.
아무 이야기든 부담 없이 할 수 있고, 헤어지면 곧바로 잊어도 좋은, 그리고 아름다움과 기쁨을 공유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파트너랑 동행한다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이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런 부담 없는 대화는 나의 독일어를 더욱 편안하게 한다. 부부는 내가 ‘독일어를 너무 잘한다고, 자기가 만난 외국인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한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나는 철학수업에서는 늘 긴장되고, 주눅이 든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정상적인 언어 구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버벅거리기 일쑤이다. 말이라는 게 자신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보다. 날더러 중부 지방 독일어 엑센트가 발견된다며, 중부지방에 산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투리 쓰는 외국인의 징그러운 독일어를 대하는 토박이 독일인들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호수는 생각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날씨가 추워서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내가 날씨 불평을 하자, 그 부부는 올해 독일 날씨가 최악으로 좋지 않을 거라는 예보가 있는데, 당신 아주 좋지 않을 때 왔노라고, 자기들도 익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란다.
호수 한 가운데 아주 조그만 섬이 있는데, 250년 전에 그 섬에 작은 성을 지었다. 빌헬름슈타인 성(Inselfestung Wilhelmstein)이다. 거길 배로 왕복하는데 8유로였다. 우리는 거기도 가지 않았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하노버로 가는 기차를 탔다. 다음번엔 졸타우(Soltau)에 있는 하이데파크(Heide Park)를 구경 갈 것이다. 날이 흐리고 추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즐거운 소풍이었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그날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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