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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시소설 연재 장편소설 <나지라기>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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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포신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6,356회 작성일 02-11-0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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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정을 못 내리고 엉거주춤하는 동안에 한 나절이 지나가 버리고, 점심 겸 저녁밥을 끓이고 있을 무렵 교회에 갔던 태영이 상기된 표정으로 독일신문 한 장을 들고 달려왔다.
"한형 ! 이것 좀 봐. 우리 일이 독일신문에 났어."
"뭐요 ? 어디 좀 봅시다."
태영이 내미는 신문은 '웨스트도이취 알게마이너 짜이퉁(WAZ)' 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짜이퉁과 같은 명성과 권위는 없지만 중부독일의 중산층들과 지식인들을 독자층으로 하는 무게 있는 신문이라고 교육 조교 에릭크한테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신문이었다.
"에발트광산 한인광부들 소요"라는 특호 활자의 제목이 1면 톱을 장식하고 그 밑으로 "동료의 부당한 해고 철회 요구" " 독신자 기숙사의 열악한 주거 환경" 등의 작은 제목을 달았다. 게다가 우중충한 90번지 기숙사를 배경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한국인 사진을 곁들여서, 2층 침대가 놓여져 있는 작은 방에 4명의 독신 남자들이 자취를 해야 하는 열악한 주거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광산 경영주 측을 꼬집고, 설상가상으로 아주 사소한 일로 최근 한국인 광부 세 명이 해고 통지를 받았는데, 한국인 광부들은 이 해고를 부당하게 여겨 철회를 요구하면서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라는 과장된 기사 내용이었다. 광산 측에서 이 기사를 읽으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 누가 이 기사 정보를 제공한 거요 ?"
성주는 이 신문기사로 말미암아 앞으로 벌어질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당황해 하며 태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낸들 알 리가 있나?"
태영은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럼, 최형은 이 신문에 우리 기사가 난 줄 어떻게 알고 이 신문을 사 왔습니까 ? 설마 우연히 신문을 읽으려고 샀는데 그 기사가 실렸더라 하는 건 아닐테구 ? 도대체 누구요 ? 누가 이 기사가 실렸다구 최형한테 얘기합디까 ?"
"오늘 교회에서 이삼열 박사가 알려 주던데. WAZ에 에발트광산 한국인 광부 기사가 실렸더라구, 그래서 오면서 한 장 사갔고 오는 거라구."
"이삼열 박사 ? 아 ! 우리 청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사람 ? 그 양반이 지난번에는 송회장에게 청원서를 루르탄광노조에 직접 접수하라고 조언을 해서 광산 측이 칼자루를 잡게 하더니 이번에는 너무 앞질러 언론풀레이를 벌여 문제를 점점 더 확대시키는 군…. 이거 참 야단났군 이걸 어쩐다 ?"
"왜 그래 ? 독일신문에서 이렇게 확 까발려 놓으니까 속이 다 시원한데 뭘 그래. 그리고 너무 속단하지 말라구. 이 박사가 기사 정보 주었다는 확증도 없잖아 ?"
"최형, 만약에 최형이 광산 경영주라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 그것도 사실과 다른 과장된 내용들이 기사화 됐으니…."
"항의 농성 중이라는 것 말고는 다 사실인데 뭘 그래 ?"
"어쨌든 일이 더 힘들게 됐습니다. 해결은커녕 수습이나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되게 생겼으니… "
"그게 무슨 소리야 한형 !"
"우리가 시한을 정해서 회답을 달라고 했으면 그 시한까지는 기다려야 우리에게 정당성이 생깁니다. 노동쟁의에 있어서 경영주 측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투쟁의 힘은 명분과 정당성입니다. 그 정당성을 지키지 않으면 이번처럼 칼자루를 상대방이 쥐고 있는 불리한 싸움이 되게 마련입니다.
노동쟁의란 것은 노동자의 실리 쟁취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의 제기가 목적이 아니라 문제가 된 '부당해고'를 철회 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문제를 자꾸 확대시키면 나중에는 얽힌 문제의 수습이 목적이 되어 버리고 본래의 목적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소위 노동쟁의에 관심을 보이거나 참여하는 지식인들의 병폐는 바로 그 겁니다. 노동자의 주장과 요구는 아주 단순해서 하나 하나 문제를 풀어 나가면 될 걸 가지고, 밥도 안되고 돈도 안 되는 대의명분과 자존심에 얽매어 거창한 구호와 이론으로 겉포장을 하다보니 노동자의 간단한 요구가 복잡한 문제로 둔갑을 하는 겁니다. 이 신문기살 봐요. 우린 말도 꺼내지 않은 '열악한 주거 환경' 이 대서특필로 보도돼 있고, 휴게실에서 개최한 회의가 항의농성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와서 취재한 적도 없는 데 어떻게 이런 내용의 기사가 나갔겠습니까 ? 십중팔구는 그 이박사라는 사람이 송회장과 최형의 말만 듣고 보도자료를 제공했겠지요.
우리의 요구는 단 한 가지, 부당한 해고의 철회뿐입니다. 이 문제 하나만 들고나서도 광산 측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응하기 마련입니다. 달리 말해서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하기에도 우린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하는데, '열악한 주거 환경'이니 무어니 하고 새로운 문제를 들먹이면, 처음의 한 가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제기된 문제를 수습하는 것만으로 상황이 끝나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 씩 하나 씩 문제를 풀어나가야지 그렇지 않고 아무 쓸모 없는 공명심과 자존심 심지어 영웅심리까지 작용하게 되면 시끄럽기만 하고 결과적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되 담을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뭐, 되는대로 될밖에…, 허지만 우리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우리가 골머리를 싸매야 하지 ?"
성주의 생가슴 앓는 소리에 무언가 잘못 된 것을 알아차린 듯 태영은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박사라는 사람 , 어떤 사람이요 ? 어떤 사람이기에 우리하고는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이렇게 일을 벌입니까 ?"
"너무 흥분하지 마, 아직 그 양반이 그랬다는 확증도 없잖아. 그 양반 6.3 사태 때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 대표로 앞장섰던 사람이야. 그 유명한 한국적 민주주의 화형식을 주도했던 6.3세대 주역 중의 한 사람이란 말야. 독일 기독교기관장학금으로 유학 와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 쉽게 말해서 반정부 활동을 하면서도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받았지. 그런 반정부 활동 경력 때문에 선뜻 귀국할 처지도 못 되는 모양이야. 벌써부터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의 국제기구에서 일 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있지만, 본인은 한국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서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야. 언제 한번 기회를 만들어서 만나 봐, 좋은 사람이야. 내가 보기에는 한형하고 말이 잘 통할 것 같아.
자, 자, 밥 다 된 것 같은데 어서 밥 먹고 휴게실로 가자구, 벌써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구."

레크링하우젠 에발트광산 한인자치회원 일백 이십 여 명은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초겨울 저녁 어둠이 찾아온 90번지 기숙사 3층 휴게실에서 임정길 노무관과 마주 앉았다.
"여기 오기 전에 에발트 광산 인사담당소장 파울 씨를 만나고 오는 길이요. 여러분들이 해고당한 동료들을 생각해서 집단행동을 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처음부터 방법이 틀렸어요. 일단 광산 측과 협의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댓바람에 상부 노조에 들이댔으니 광산 측 기분이 어떻겠소. 광산 측 입장은 극히 개인적인 해고 문제를 가지고 집단 행동하는 것부터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거요. 더구나 이런 일이 갑자기 외부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에 자존심이 매우 상해 있는 것 같소.
서양 격언에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소. 독일사람들은 해고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당사자가 직접 노동조합을 통해 중재신청을 하거나 법에 따라 노동재판을 신청하는 것이 상식이요. 이렇게 동료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는 것만으로도 광산 측으로서는 황당하고 이해가 안 되는데, 하물며 광산 측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일방적으로 외부에 공개해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고 대단히 노해 있소. 그리고 이건 또 뭐요 ? 이 신문에 난 기사 도대체 누구 짓이요 ? 이런 터무니없는 신문기사가 나게 하고서도 광산 측이 여러분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구 생각했단 말이요? "
임 노무관은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 한국인 광부 기숙사에 소요"라는 기사가 실린 WAZ 신문을 가방에서 꺼내 보이며 조금 언성을 높였지만 결코 노기를 띠거나 흥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번 일은 시작이 잘못된 것 같소. 해고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일단 노무관에게 연락해서 상의를 하면서 법대로 순리대로 처리를 하거나, 광산 측과 절차를 밟아 대화를 해야지, 이렇게 덮어놓고 일을 저질러 버리면 잘 해결 될 일도 어렵게 돼지 않소. 도대체 이번 일 주동자가 누구요 ?"
송대균 회장, 오한규 부회장과 함께 창가에 서 있던 부회장 태영이 '그것 봐라, 내가 뭐라든' 하는 뜻의 눈짓을 좌중에 앉아 있는 성주에게 보내며 피식 웃고 있는데, 성질 급한 김춘성이 앉은자리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X 까는 소리하네. 주동자는 왜 찾아 ? 주동자가 어디 따로 있다구."
춘성의 험한 말씨에 좌중이 깜짝 놀라는 가운데 임 노무관의 눈길이 번쩍 빛을 발하며 춘성을 순간적으로 쏘아보았지만 역시 '대사(大蛇)'라는 별명에 걸맞게 노기를 감추고,
"그거 못 까면 어른노릇 못하는 거요."
하는 우스개 말로 돌발적인 험악한 분위기를 풀어 버리는 능글능글한 여유를 보여주었다.
"주동자를 찾는 이유가 뭡니까 ? 구태여 주동자를 찾는다면 이번 일의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 자치회 회장인 제가 주동잡니다. 그러나 신문에 난 일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송대균은 아무래도 WAZ의 보도기사가 마음에 걸리는지 변명부터 하고 나섰다.
"오해하지 마시오. 책임을 지라고 주동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의향을 듣고 싶어서요. 어디 한번 말해 보쇼. 광산 측이 해고를 철회하지 않으면 정말로 다음다음 주 월요일에 입갱거부 투쟁을 벌일 셈이요."
임 대사(大蛇)가 그렇게 묻는 진의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송대균이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옆에 서 있던 태영이 불쑥 나서서 말을 가로챘다.
"자치회 부회장 최태영입니다. 노무관께서는 이 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압니까. 적어도 한 가정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일백 명이 넘는 가장들이 밤새도록 토론하고 의논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회장 혼자서 실행하고 안하고를 결정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에 광산 측이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입갱거부 투쟁 실행해야지요. 이렇게 인간대접 제대로 못 받으면서 툭 하면 해고 위협에 시달릴 바에야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서 결판을 내야지요."
"결판이라, 그 각오와 용기는 알겠지만, 여보, 부회장이라구 했소 ?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소 ? 여러분들이 독일에 광부로 오게 된 것은 이들 독일 광산 경영주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정부가 외화가 필요해서 사정사정해서 마지못해 여러분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공관에서는 힘도 제대로 못쓰고 병가도 많은 한국광부 이제 그만 불러들이라는 광산경영주 측의 아우성을 겨우 겨우 달래고 있는 판인데, 거기에다가 한판 결전까지 붙으면 그 결과는 어찌 되겠소 ? 그렇소 여러분들이 권익 주장을 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우리 한국사람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은 분명한 일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들 한다는데 억울하게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사나이들이 아니지. 그렇지만 잘못 꿈틀대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손해 보는 일이 많을 거요. 다시 말해서 광산 측과 화해의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말썽 많은 한국광부 더 이상 고용하지 않겠다 하면서 무더기로 해고시키는 일이 없으란 법도 없소. 여러분은 돈을 벌러 왔지. 자존심 싸움하려고 독일까지 온 것 아니잖소 ?"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광산 측은 한국 노무관의 입을 빌려, 세 동료의 부당한 해고를 철회하라는 한국광부들의 청원에 대해 '무더기 해고'라는 보복조치를 하겠다는 일차 답변을 보낸 셈이었다.
임대사의 위협에 가까운 말에 좌중이 할 말을 잃고 침묵에 잠겨 들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성주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고 나서 입을 열었다.
"노무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알겠습니다. 또 해고를 당한 당사자들이 순서대로 법대로 대응해야지 집단항의는 이해할 수 없다는 광산 측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고 당하고 돌아가면 한 가정이 풍지박산이 나는 우리 개개인의 입장도 노무관께서 광산 측에 설명을 해 주시고 이해를 구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우리가 순서를 밟지 않고 상부노조에 먼저 청원서를 접수시킨 것은 분명히 실수입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수를 했다고 해서 우리의 청원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말도 잘 안 통하고 독일사회의 조직에도 서투른 외국인 노동자의 실수를 빌미로 해서 "무더기 해고 운운" 하면서 위협하는 말이 올바른 노사관계를 자랑하는 독일인들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노무관께서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해 보시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집단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이유를 노무관께서는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 제가 듣기로는 노무관께서도 손수 막장에 들어가 보시고 '정말 광산 경험이 있고 힘이 센 사람들을 선발시켜 보내야겠다고 느끼셔서, 파독광부 선발 과정에서 40 킬로그램 무게의 모래 가마니를 불끈 어깨 위로 올릴 수 있는 장정들만을 뽑아서 보내라고 하셨다고요? 여기 앉아 있는 저희들이 모두 그 모래가마니를 단숨에 어깨 위로 올리는 시험에 합격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막장에 들어가 일을 하다보면 힘에 부쳐서 다치기도 잘 하고 병도 잘 납니다. 당연히 병가도 많고 작업감독과의 마찰도 많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번처럼 해고를 당하면 삼년 계약 무사하게 끝마치고 귀국할 사람 몇 안됩니다. 그런 염려와 불안 때문에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저희가 집단으로 청원을 하는 것이지 결코 항의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집단행동이 광산 측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는 점을 노무관께서 광산 측에 잘 납득시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임 노무관은 성주의 말이 자신의 책무에 관한 방향으로 흐르자 서둘러 말을 끊고 나섰다.
"알고 있소. 더 이상 설명 안 해도 여러분들이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소. 다른 광산에서는 채탄부가 아닌 간접부로 수월하게 삼 년 근무 끝내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여기는 그런 기회가 전혀 없어서 다른 광산 보다 병가율이 높다는 것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말이요. 여러분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것만을 목적으로 서독에 왔다면 여기 이 에발트 광산에 오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오. 우리 대사관 노무과의 통계로 보면, 여기 에발트 광산 근무자들은 정말로 체질이 허약해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게으른 사람을 빼 놓고는 모두가 다른 광산의 한국광부들보다 노임도 훨씬 많이 받고 송금도 가장 많이 하고 있단 말이오. 일이 힘든 대신 돈도 더 많이 벌뿐만 아니라 다른 잡생각 할 여유가 없으니 돈 쓸 일도 없어서 송금도 다른 광산 근무자들 보다 더 많이 하게되니 전화위복이랄까,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여기에 오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오."
이번에는 임 노무관의 능청스러운 말휘갑에 중치가 막힌 성주가 임 노무관의 말을 끊었다.
"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 에발트 광산에서 일하게 돼서 고맙다고 하는 동료들을 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또 우리들 노동자들은 그 통계라고 하는 숫자놀음을 도깨비 강물 건너가는 소리쯤으로 여기죠. 미안합니다만 도무지 믿을 도리가 없으니까요.
또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적용 받고 있는 노임등급표라는 것이 '시간 정액제 계약노동'을 하는 다른 광산에서는 최저임금의 개념으로 적용되는데, 여기 에발트 광산은 '도급제 계약노동'으로 사실상 노임등급표가 무용지물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 작업성과가 높은 능력 있는 몇몇 동료들은 등급표의 두 배가 넘는 노임을 받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체력으로나 적성으로나 채탄막장에서 능률을 올리지 못하는 많은 동료들이 등급표에서 책정한 노임의 절반을 조금 넘게 받고 있습니다. 돈 벌겠다고 서독까지 온 꿈이 깨어지고 있는 겁니다. 실망 때문에 병도 많이 생기고 의욕도 없어져서 자연히 병가도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책 없이 해고나 시키지 말고 무리한 채탄작업이 아닌 체력과 적성에 맞는 다른 일을 시키고 노임등급표에 정해진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준다면 그야말로 저희들도 에발트 광산에 오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할 텐 데, 불행하게도 광산 측은 막장 채탄부로 데려 왔으니 그 일 못하겠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막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노무관님이 평균 계산으로 따져서 여기 에발트 광산 근무자들의 한국 송금실적이 높다고 하셨는데, 그 통계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우린 지금 노임을 올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땀 흘려가며 일 하다가 지치거나 다쳐서 일을 못하고 병가로 쉬고 있을 때 어김없이 날아오는 경고장이나 해고통지서를 재고해 달라고 청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 일은 사실 해고당한 동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우리도 언젠가는 힘에 부쳐서 병이 날 것이 분명한데, 그 때 어이없이 해고당하는 그런 경우가 생길 것이 두려워서 시작한 겁니다. 이런 우리의 요구를 노무관께서는 무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한국 탄광에서조차 이런 식의 해고는 없는데 하물며 노동선진국이라는 서독에서 이런 불합리한 해고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이건 꼭 시정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노무관님의 말만 듣고 이번 일을 흐지부지 중동무이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노무관께서 무어라 해도 우린 광산측으로부터 최소한 경고장과 해고장 남발에 대해 재고하겠다는 정도의 답변이라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 정도 요구도 들어주지 않는 고용주라면 무더기 해고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입갱거부 같은 집단투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당신 말 참 잘하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어쩌다 광부로 서독에 왔소 ? 여기 오기 전에 당신 뭘 했소?"
임 노무관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송곳눈을 뜨고 성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엉너리를 쳐가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성주는 서독에 오기 전 한국에서 뭘 했느냐는 노무관의 질문이 어차피 진지한 답변을 듣기 위해 던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치 선방에서 좌선 입정에 들어간 스님처럼 입을 다물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임 노무관 역시 더 할 말을 잃고 눈을 감았다 좌중을 둘러보다 하면서 무언가 골돌히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패를 던졌다.
"좋소, 솔직히 말해서 내 개인적으로는 여러분이 자랑스럽소. 부당한 처사에는 항의할 줄도 알아야 사나이들이지. 아무튼 이번 일로 독일 고용주들에게 한국광부들이 무지렁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한국인의 자존심을 살렸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국가공무원의 신분으로서 고민이 있소. 여러분이 이러는 것이 내심으로는 든든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수석노무관이라는 직책으로서는 여러분의 집단항의를 말려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단 말이오. 그게 뭔고 하면, 지금 한국에서는 여러분과 같은 날 서울 수도공고에서 모래가마니를 들어 올리고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 아직 서독에 오지 못한 백육십 명의 대기자들이 있소. 여러분들도 아다시피 이 사람들도 파독광부로 간다고 생업 다 집어 치우고 일년 넘도록 허송세월하면서 서독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 서독에 오게 하기 위해 요즘 이 광산 저 광산 인사담당자들을 찾아 다니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일을 벌였으니 죽도 밥도 안되게 생겼소.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
능구렁이 임 노무관의 마지막 패는 과연 결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가장 강경했던 부회장 최태영이 동요하는 눈치를 보였고 휴게실에 모인 회원들 대부분이 혀를 차며 맥빠져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밤까지 휴게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짧게는 반년 길게는 삼년을 허송세월로 기다리다가 우여곡절 끝에 광부로 온 사람들이기에, 아직도 한국에서 서독 올 날만 기다리고 있는 예비광부가 백육십명이나 남아 있다는 소리가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관님, 그게 사실입니까 ? 확실합니까 ?"
"이게 어디 헛소리 할 일이오 지금 ?"
태영이 우직하게 다그쳐 묻자 임 노무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매실매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어기차지 못한 좌중은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윽고 부회장 두 사람과 무언가 한참이나 말을 주고 받은 송회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 회장단이 노무관님 모시고 다른 방에 가서 결말을 지어 보고하겠습니다. 4진 송회장, 5진 이회장, 6진 신회장, 그리고 한형도 함께 갑시다."
성주는 이미 결말이 난 것과 다름없는 일을 가지고 입씨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임원도 아닌데'라는 핑계로 송회장의 회의 참석 제의를 사양했지만, 태영이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헐수할수없이 따라 나섰다. 광부로 서독에 오기 위해 교육을 끝마치고 허송세월하고 있는 백육십명 대기자들의 길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명분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해고자 세 사람에 대한 구제 조치의 약속은커녕 걸핏하면 날아와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경고장과 해고통지의 남발을 재고해 달라는 청원에 대한 광산측의 답변을 일언반구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가까운 시일 안으로 광산측과 노동조합과 한국인 광부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모임을 열 것을 보장하겠다는 임 노무관의 약속 하나 얻고, 에발트광산 한인자치회회장단은 기세 좋게 루르탄광노조에 접수시켰던 청원을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러분, 우리 3진은 파독광부로 선발되고도 삼년씩이나 기다리다 못해 해외개발공사로 쳐들어가 난동을 부렸던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선발이 안되었으면 모르지만, 선발되고 기다리는 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시끄럽게해서 지금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육십 명이 오지 못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 사람들의 평생을 두고 원망의 대상이 될 겁니다. 광산 측에서도 가까운 시일 안으로 대화를 갖자고 하고 또 이 약속을 임 노무관께서 보증하신다고 하셔서, 연명으로 제출한 청원서도, 입갱거부 투쟁 결의도 없었던 걸로 하기로 회장단에서 결정했습니다."
최태영 부회장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에게 회장단 회의 결정사항을 보고하자,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한 5진의 김진화가 회장단을 향해 눈을 지릅뜨고 삿대질을 해가며 볼멘 소리를 내뱉었다.
"제미 x팔, 그럴라면 뭣한다구 밤 새도록 회의다 뭐다 하고 사람을 귀찮게 했당가 ? 밀어부치지도 못하는 허룹숭이들이 뭣 빤다구 용을 썼냐구 ? 아 x팔, 아무리 허룹숭이기로서니 사나이들이 칼을 뺏으면 하다 못해 무라도 베어야 쓸 것 아녀 ? 서독 올라구 기다리고 있는 놈들은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고, 시방 우리가 여차하면 보따리 싸게 생겼는디, 아 우리가 시방 남의 사정 봐서 내 가랭이 벌려주고 언걸 먹을 형편이냐 이 말이여. 차라리 우리가 일을 더 크게 벌여서 그 사람들 못 오게 하는 게 그 사람들 도와주는 일인지도 몰라. 암것도 모르고 와서 지금 우리처럼 당할려면 차리리 못오는 게 잘되는 일 아녀 ? 그려 ? 안 그려 ?"
"진정하세요 김형 ! 김형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처지로서는 일을 자꾸 크게 벌이는 것 보다는 될수 있으면 빠르고 조용하게 광산측과 타협을 보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노무관님의 권고가 일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를 받아들인 겁니다. 김형 말씀 마따나 남의 사정 봐 주다가 언걸 먹을 수는 없는 게 우리 형편이지만, 우리 형편 역시 마냥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오한규 부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하려 했으나 김진화는 오히려 화를 벌컥 내면서 벌떡 일어나 회장단과 임노무관을 향해 번갈아 손가락질을 해가며 왜장을 쳤다.
"참말로 벙거지 시울 만지는 소리 하고 있네. 언제 한번 버티어 보기나 했간디, 버텨 보지도 않고 마냥 버틸 수 없다고 혀 ? 맥없이 혼자 섰다가 제풀에 까부러지는 것이 꼭 치마말기 내리면서 풀 죽어 버리는 고자 거시기 아녀 이건. 아나 타협, 타협 좋아하네, 타협 한답시구 이렇게 코푸렁이 처럼 제풀에 물러서는 놈들 뭣이 무섭다구 달라는 걸 주겄어 ? 줄줄이 해고장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여."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7회부터는 신설된 새아리 넷 교포신문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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