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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사는얘기 사랑하는 힐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람이름으로 검색 댓글 3건 조회 5,102회 작성일 02-08-30 08:52

본문

힐데는 (Hildegard의 약칭) 옛날 내가 살았던 집의 이웃 할머니이다.  
올 가을이면 그는 83살이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한국식으로하면 4층)의 높은 계단을 여전히 오르내리는 정정한 할머니.
수퍼에 가는 것은 그녀에게 하루 최고의 이벤트이다. 그래서 고작 수퍼에 가는데도 얼마나 멋을 내는지 상상을 초월한다.  

힐데를 만나기까지, 나는 사람은 고령이면 여성/남성의 구분이 사라지고 그냥 "노인"으로만 보일 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힐데는 고령임에도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일 수 있음을 가르쳐준 최초의 노인이다.
그래서 나는 곱게 늙은 그녀를 볼 때마다, 나도 훗날에 저렇게 늙었으면 하고 소망하였다.

내가 딴 곳으로 이사간지 이제 벌써 5년째건만 할머니랑 나랑은 아직도 서로 전화하고 찾아가곤 한다.  
그런데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있긴 하다.  변명이지만 나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바빠져만 가고  피곤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가 문득 힐데! 하고 떠오를때면 미안한 마음으로 안부전화를 하곤 한다.

지난 달에 갑자기 힐데로부터 전화가 왔다. 백화점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혈압때문이라고 추측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면서 지금 병원에 있다고 알렸다.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혹시 당장에 와줄 수는 없는지?" 물을 때 난 힐데가 겁에 질려있음을 알았다.  근무 중이라 난처해하며 몇시간 후에는 꼭 가겠다고 달래주었더니 급기야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꼭 어린아이처럼.  나는 힐데도 운다는걸 그때 첨으로 알았다.

퇴근 후 바로 병원에 찾아가자 마치 엄마 되찾은 어린아이처럼 혈색이 돌면서 내 손을 꼭 잡았고 옆 침대의 환자와 간호사에게 "내 사랑하는 작은 친구에요" 라고 나를 소개하였다...

고독한 힐데.  힐데는 원래 화려한 여성이였다. 히틀러 시절, 처녀였던 그는 아름다운 몸매를 과시하며 나치를 칭송하는 무용으로 프로파간다 영화에 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결혼할 때까지 체육선생이였다고 한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힐데에겐 아들이 둘 있는데 서로 별로 정이 없다.  아들이라기보다는 이제는 함께 늙어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 남매같아 보이는 그 둘은 크리스마스나 생일때에야 겨우 얼굴을 보일둥 말둥 하는데,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이란 타인을 방문하는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다.

손자도 없다고 하고, 며느리는?  한번 물었더니 답이 걸작이였다.
큰 아들은 이혼한 걸로 "알고 있고" 막내 아들은 아예 결혼한 적도 없다고 "들었으며", 둘다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힐데는 워낙 시치미떼는게 특기라 알면서도 모른체 하는지도, 어쩌면 나에게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힐데는 원래 애 낳고 기르는데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과거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누가 날 흠모했으며, 누구를 만났고 그들은 어땠고 회상할 때면, 아..이 사람은 화류계를 좋아했지, 집안에서 애들 뒤치닥거리할 여자가 아니였구나 하고 알게된다.    
그리고 그 역시 "애들에게 애정이 없었다"고 솔직히 시인하며 잘 찾아오지않는 아들들에게 서운함 같은건 느끼지도  않는 듯하다.

내가 힐데 옆집에서 살던 3년 동안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사한 첫날, 이사짐을 옮기던 중 그녀를 처음 보았는데  "멋있다! 어찌 노인이 저리 우아할 수 있는가" 싶었다.    
귀티가 나는 까만 코트, 깔끔하게 빚겨 올린 은빛머리, 어두운 자주빛 모자 앞으로 짧고 부드럽게 드리워진 망사,  은은한 향수내음...  

내 선망의 눈빛(?)이 그녀에게 전달되는 순간 우리는 말 그대로 "눈이 맞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우리는 친해져서 툭 하면 커피를 함께 마시고, 요리해먹고, Otto같은 카탈로그를 함께 보면서  옷을 주문하였다.
할머니는 자신이 과거에 입었던 별의별 화려한 복장을 꺼내어 나에게 입혀주면서, 화장하는 법, 머리 만지는법, 에티켓을 가르쳐주었다.  
힐데가 즐겨 들려주는 "남자란.. 이렇고, 저렇고"식의 얘기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힐데는 나의 서양사람들에 비해 굵고 건강한 모발을 항상 감탄했는데 내 머리를 희안하게 땋아 올리거나 만져줄때면 난 항상 포근해져서 졸음이 왔다.  
  
우리가 첨 본날부터 지금까지 힐데는 날 변함없이 이뻐해주었다. 힐데는 나에게 선물하는걸 좋아했는데 내가 그동안 받은 것중엔 가치 나가는게 꽤 된다.

힐데의 사진첩을 보면 뒷배경에 Hakenkreuz (나치의 휘장)이 큼지막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앞에서 그녀는 유명한 영화배우는 저리 가라는 듯 아름답고 화사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힐데가 그런 사진들을 사뭇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몇 번 물어보았다. 그 엄청난 숫자의 무고한 유태인이 죽은 걸 몰랐느냐고. 그러면 힐데는 자신은 그런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선 눈빛과 얼굴 표정으로 그녀의 특기를 발휘한다.  

'응? 무슨 일 있었어?  몰랐는데.. 그런데 알 필요가 있어?  왜 묻는거지? .. 커피 다시 끓일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를 만들고선 날 기다리고, 내 복장의 색깔이 잘 조화하지 않음을 힐책한다.      

힐데와 함께 커피마실 때, 대화할 때, 산책갈 때...  문득문득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곤 했다.
도대체 이 사람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인간의 마음을 우물과 비유한다면...도대체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가야  본심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유태인이고 죽임을 당한다면 힐데는 어떻게 행동할까.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재빨리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선 나 몰라라 할까...    

요즘 힐데가 노망기를 보인다. 정신이 가끔 오락가락 한다.
한번은 20여년을 살면서 집 관리를 해주고 있는, 힐데와도 항상 친했던 크로아치아인 이웃에게 힐데가 갑자기 "당신 누구냐! 당신나라로 돌아가라!" 호통을 쳤다고 한다.

오래 전 함께 산책가려고 힐데를 데리러 갔을 때였다. 한창 멋을 낸 힐데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왔다.  힐데는 갑자기 우체함 앞에서 서서 어떤 이름표를 노려보더니  "BARENDT는 BARANOWSKI가 독일식으로 변형된 이름이야.
폴락켄(폴랜드인을 비하하는 명칭)은 어찌해도 폴라켄일 뿐, 순수한 독일혈통은 절대 되지못해!" 말했다.      

난 첨엔 힐데가 무슨 말을 하는지 - 너무 갑작스워서- 잘 이해를 못했다.  
생각에 잠겨 몇 걸음 가다가 물었다. "힐데, 그래도 폴랜드인은 나보다 독일에 더 가까운 인종인데.. 그럼 난 뭐지?"  
힐데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에게 웃어보이며 "넌 나의 비싼 보물이지" 했다.

암튼 그때 벌써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노망하고 있는 것이다...    

힐데는 결코 남을 죽이거나 학대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무고한) 남이 죽을 때에도 신경 안쓸 사람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리라 추측한다.
그래서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상상해 보았다.
Guillotine 이 있다. 우아한 모습은 어디로 간데없고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리로 힐데가 서있다.  
이 사람 죄가 있느냐 없느냐!  분노한 군중들이 아우성이다.  힐데의 목을 쳐라! 몹쓸 노인네! 빨리 죽여라!
힐데는 기요틴에서 처참하게 사라진다.

내가 아는 힐데는 자신이 무죄라고 울면서 살려달라 애원할 여성이 아니다.  
일종의 자존심 또는 오기로(?),  누가 자신을 죽이면 죽이는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다.
속으로는 겁에 질려있음에도 겉으로는 차분할 것이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모르겠다... 난 훗날에 힐데처럼 늙기를 바랬는데, 노망하니깐 또 맘이 달라졌다.  
근데 그게 내 의지대로 되는 것두 아니고, 힐데 자신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못 느끼고 있는데... 내가 나중에 늙어서 저렇게 안되기를 기도할 뿐.  

솔직히 나는 요즘 힐데가 하루 빨리 죽으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아무리 cool 하려 해봤자. 어느날 갑자기 힐데가 "넌 누구냐, 네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뭐하느냐"  고함 지른다면 난 대책없이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이하기가 두렵고
내 마음이 차갑게 돌아설까봐, 그를 홀로 차갑게 떠나보내기가  무섭다.





자유로니 : 바람님 잘 읽었습니다. 힐데할머니와의 우정이라... 님의 글을 읽으니 힐데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힐데할머니는 그 세대의 독일인들의 공통분모랄까 단면을 드러내주는 분 같습니다. 특히 힐데할머니는 남을 학대할 사람도 아니지만 남이 죽을 때도 신경안쓸 사람이라는 구절이 묘하게 저의 가슴에 와 닿네요.
힐데 할머니에게 철십자는 어릴적 추억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이미 쉽게 도려내버릴 수만은 없는 사적인 상징물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철십자를 부정하는 것은 그 시절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할데할머니가 공공연히 외부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사진첩에서나마 자신의 삶의 한부분에 대해 향수를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습니다.
저도 한 독일인 할아버지와 우정을 쌓았는데 그 할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지만 동시에 전쟁때 공군조종사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저는 젊은 사람에게라면 좀더 신랄한 태도를 취했겠지만 그 할아버지와는 암묵적으로 신사협정을 맺었어요. 과거에 대해선 묻지 않는거였죠. 이제 배당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버렸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는 그이에게 과거를 추궁할수가 없더라구요. 2002/07/24  
토종마늘 : 베리에서 읽은 글중 단연 최고의 글입니다...ㅎㅎ
암튼 묘한 감동이 있네요
그저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2002/07/24  
바람 : 이제 댓글이 되네요? 어제는 왠지 안되던데 ... 토종마늘님 ,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2/07/25  
나도 방문객 : 이거 충무로에 보내서 영화화 하면 어떨까요.
베를린제에 가서 상도 타겠다. 2002/08/01  
추천14

댓글목록

Herbst님의 댓글

Herbst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흰돌님, 이 글은 자리를 잘못 잡은 거 같아요.
여전히 퍽퍽거리는 그 미국인은
'독일에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만난 사람이거든요. ^^;;

흰돌님의 댓글

흰돌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매일 몇번씩 들러면서도 정작 연구소에서는 한글을 사용할 수 없어 글 올리는게 쉽지가 않군요.
한국서 만난 사람이던 독일서 만난 사람이던 범위를 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참에 방 이름을 함 바꿔보는건 어떨까요? "내가 만난 사람들" 이나 "이런 사람 저런 사람" ... 뭐 좋은 타이틀이 없을까요?

걸어가는사람님의 댓글

걸어가는사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fuck이요. 글쎄요
그런 말 사실 진짜 잘 쓰는데요
제가 캐나다에 잇거던여
수시로 씁니다.
한국으로 하면 ceebal정도 될까요
약간 심하다 싶지만 너무나 잘 쓰여요
ceebal보다는 어쩔 땐 제기랄..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겁니다.
ceebal은 너무나 욕설같아서 희한하게 적습니다.
너무나 흔하게 쓰기 때문에 욕은 아니지만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쓰느냐에 달렸져
만약 어떤 사람과 대화하다가 그런 말을 잘못 쓰면 그사람한테 쓰는 표현이 돼면
상당한 모욕이 될수도..
보통 언성 높아지고 싸우게 돼면 fuck정말 많이 나오거던요
대부분 보통 욕 잘 못하는 캐나다 사람이 막상 싸우게 돼고 언성 높히게 돼면
일단 딱 떠오르는 욕중에 제일 먼저가 .fuck이니깐요
여하튼 혼자 하는 말로 fuck이면 상관없지만
그런데 진짜 교육받고 그런 사람들은 fuck라는 말 잘 않씁니다.
굉장히 서민적으로 육화된 영어단어나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잘못쓰면 않좋죠
그런 말을 면전에서 다른 사람에게 한다면 한판 붙자는 의도로밖에..
열쇠보고 했다면 달리 생각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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