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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20   

인천 공항에 내리니 처형들과 사촌 처제가 마중을 나왔다. 우리가 도착하면 같이 조문을 가려고 아직 조문을 하지 안했다며 우리 부부를 싣고 빈소가 마련되어 있는 안산 병원으로 갔다. 빈소가 마련된 실내로 들어가면서  입구를 보니 많은 화환들이 세워져 있다. 설마 어머님께 바치는 화한은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화환에 매달려있는 리본을 보니 몇 십 개가 넘게 서있는 화한이 다 어머님께 바치는 화한이다. 내심 놀랬다. 누가 이렇게 많은 화한을?

독일 Glückauf 남부지역 회장인 선경석씨가 보낸 화환도 눈에 뜨인다.  어떻게 여기까지 신경을 쓴단 말인가?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그래도 딸들과 사위들 덕분에 이렇게 많은 화환을 받고 가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화한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 이것은 결국 낭비고 환경파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져버릴 수가 없다.

실내로 들어가니 빈소가 울음바다가 된다. 울면서 달려드는 동생들 에게 미안한 생각뿐이다. 살아생전 모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다음에야 이렇게 나타난 자신이 참 밉기만 했다.

영정 앞으로 가서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른 가족들과도 인사를 한 뒤에 영정 앞에 앉아있으니 어머님이 꼭 옆에 아직도 계신 것 같은 느낌이다. 17살 때부터서 집을 나가 지금까지 타향살이만 하면서 집안을 도와 보겠다고 노력했지만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허탈함과 미어지는 아픔이자만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한 척 했다.

내가 독일로 간 3년 후에 아버님을 여이고 지금까지 35년 동안을 아이들 키워서 결혼 시켜 내 보내고, 그 험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시고 자식들에게 한 만 안겨주고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님이다. 돌아가실 때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폐렴으로 입원한지 2일 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며 마지막 염을 해서 입관을 하기 위하여 영안실로 가잔다.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계신 어머님을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다. 나를 보시기 전에는 눈을 감지 못하실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차디찬 시신은 아무말씀도 없으시다. 아들하고 한집에서 같이 살아보고 싶어 하셨던 소원도 결국 욕심으로만 남은 체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아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어머님 죄송합니다.” 라는 말밖에 나오질 않는다.

어머님 얼굴을 마지막 보고 입관을 한 뒤 조문객을 맞으러 빈소로 다시 왔다. 상주인 내가 예를 갖추어 조문객들을 맞이해야 되기 때문에 한숨 쉴 틈 없이 움직이어야 된다.

찾아오는 분들이 영정에 인사드리고 나면 고맙다는 인사하고, 또 위로의 인사 받는 틀에 박힌 순서들이다. 다행히 음식은 병원에서 준비해서 일하는 아줌마들이 맡아서 대접을 하기 때문에 나중에 계산해서 돈만 지불하면 된단다. 옛날 시골에서 장례를 치루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원래는 절에 다니셨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섯째가 가톨릭성당엘 모시고 다니면서 영세를 받아 가톨릭성당 주관으로 장례를 치우기로 했단다. “안나”라는 영세명이 영정 앞에 쓰여 있다. 하루에 몇 번씩 성당식구들과 신부님이 찾아와 미사를 드리고  성당에 장례위원회가 있어서 장례식까지 그분들이 주관을 하기 때문에 우리식구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단다. 상주로써 해야 될 풍습이나 예절을 모르기 때문에 틀에 박힌 절차를 병원 측이나 성당 장례위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20명이 넘는 성당 식구들이 하루에도 몇 번식 찾아와 한번 시작하면 1시간이 넘게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와는 다른 면을 보았고 그 열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상을 당한 가족들이 입는 옷까지 병원에서 준비된 것을 빌려 입게 되어있어 옷들이 다들 유니폼 같다. 나는 여기서 싸가지고 간 옷이 있어서 내 양복을 입는 것을 고집했다.

나중에 들으니 옷 한 벌 빌려 입는데도 5만원씩이라고 하니 그 수입도 대단할 것 같다.

병원에는 빈소가 마련된 곳은 한군데가 아니다. 이방 저 방에서 미사, 예배, 불공을 드리는 소리들이 뒤범벅이다. 옆방에서 불공을 드리는 소리가 나자 셋째가 절엘 다니셨던 어머님이 생각이 났던지 “우리 어머니 염불소리와 찬송가 들으면서 어디로 가실 것인지 헷갈리겠네.” 하고 말해서 식구들이 한바탕 웃기도 했다.

저녁이 늦어지니 조문객들도 멈추고 시골에서 올라오신 작은아버님 내외분이랑 고모내외분들은 집과 아들집으로 가시고 이젠 어머님 직계 자식들하고 식구들만 남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이곳으로 와, 하루 종일 조문객들을 상대하고 나니 피곤이 엄습해 온다. 그렇다고 누울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새벽이 되니 가족들도 하나 둘 구석을 찾아가 눈다. 우리도 어느 구석을 찾아들어가 그냥 맨바닥에 옷 입은 채로 잠깐 눈을 부친 것 같다.

 

이튿날은 장례를 치루는 날이다.

어머님 시신은 화장을 해서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납골당에 안치하기로 했단다. 거주지가 안산으로 되어있는 사람들은 몇 백만 원이 넘는 화장터와 납골당 비용도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비용만 내면 안치할 수 있도록 시에서 허가를 한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아침 일찍 전 식구들이 영정 앞에 모여 어머님께 마지막 인사드리는 제를 드리고 다시 가톨릭 성당으로 가서 마지막 장례미사를 드린다. 어머님을 위한 장례미사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상주지만 가톨릭 성도가 아닌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자격도 없단다. 다 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데, 다 같이 예수님을 뒤따르자는 신앙인데 서로 성찬식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니 이해가 가지 않은 처사다.  미사를 마치고 다시 시신을 버스에 싣고 화장터로 간다.

장례식을 서러워 해 주는 듯 비는 계속 내린다. 화장터에 가보니 화장을 시킬 가족들이 많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차례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한참 후에 버스로 와보니 버스에서 드리는 예식이 또 있다.

성당장례위원회에서는 많은 경험이 있는지 모든 순서를 알아서 진행 시킨다.

마지막 어머님 시신은 화장터로 들어가고 우리는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가 어머님이 마지막 화로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우리 자식들의 심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슬프지도 않았다. 내가 어머님을 돌아가시게 한 죄인 같은 심정으로 허탈함만 가득하다. 장례식이 어떤 형식적인 틀에 박힌 듯한 느낌에 못마땅했지만 고국의 풍습이 그렇게 변했으니 어떠하랴? 어렸을 때 가난해서 상여도 만들지 못하고 할아버지 시신을 문중 산에 뭇을 때가 훨씬 더 우리한테 더 가족적인 미가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시신이 한줌의 재로 변해서 화로에서 나올 때는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을까?

안을 내다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가 1시간 이상 가톨릭 식구들과 같이 미사를 드린 것 같다.

장례식을 위해서 준비된 책이 한 권 있던데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내려가면서 미사를 마쳤다. 안을 들어다 볼 수 있게 창문이 열리자 재로 변한 어머님 시신이 화로에서 나온다. 방송을 통해 화장된 시신을 한쪽 창구로 와서 인수를 하란다. 사람의 시신을 산에 묻어도 시일이 지나면 썩어서 흙이 되지만 몇 시간 안에 재로 변한 어머님 시간을 볼 때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다. 피가 거꾸로 솟은 느낌이랄까? 

아직 식지 않은 따끈한 재를 담은 항아리를 내가 안고 납골당으로 간다. 납골당 도착하기 전에 동생은 안산시청에 담당부서로 가서 납골당 안치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받아온다.     

납골당에 도착해서 관리사무소에 들어가 신고를 하니 담당자가 나와 예약된 칸에 재가 담겨있는 항아리를  넣고 실리콘으로 봉한다. 마지막 예를 드리고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끝낸다.

어머님이 안치된 안산 하늘공원이라는 납골당은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부 실외에 모신다. 오히려 실내에 모시는 것보다 숨이 트여있어서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입구에는 나무를 심고 나무 밑에 재를 묻는 수목장을 한 묘들도 많이 보인다. 

 

어머님을 뒤로한 체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 빌려 입었던 옷들 돌려주고 정리를 한 다음 병원 측에  비용을 계산하고 다섯째 집으로 갔다. 우선 다들 대중목욕탕으로 가서 몸을 씻고 나서 저녁에는 전 가족이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형제가 7명이니 딸린 식구들 까지 얼른 모여도 20명이 훌쩍 넘는다.

 

식당에서 다시 다섯째 집으로 돌아와 장례비용을 총 결산을 한단다. 조의금을 그동안 비용을 제하고 얼마 남은 것을 형제들끼리 분배를 한단다. 아내 왈 “ 김 씨들 재산싸움을 어떻게 하는 가 봐야지.”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바로 제일 위인 큰 매제가 분배를 맡는다.

“먼저 독일 형님 몫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어머님 모시느라 수고했으니 00, 그리고 인천 셋째도 수고했으니 00, 장흥에 4째는 어머님께, 그리고 식구들을 힘들게 했으니 이번 비용이 난 것만 계산해서 00, 여섯째00, 시골 둘째 00원 그리고 우리 집 몫도 없습니다.” 하고 나누어 주니 누구하나 불만을 말하는 식구가 없다.

얼마 되지 않은 금액이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야 생각지도 안했고 자격도 없다. 주어도 사양하겠지만 나 때문에 찾아온 조문객이 없었으니 나는 차지할 권리도 없고 오히려 장례비용을 우리가 부담을 해야지 하는 계산을 하면서 왔었는데 장례식 부담이 없으니 고마운 마음뿐이다. 본인 몫까지 포기를 하면서 아래 동생을 형편을 보고 남은 돈을 나누어 주는 큰 매제 모습이 달리 보였다. 내 대신 장남노릇을 잘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장례를 치르고 남은 재산 때문에 싸움질 하는 가족들을 볼 때 비록 없이 살지만 가족 간 우애가 좋은 모습을 보고 흡족한 마음이다.

 

앞으로 제사 문제를 큰 동생이 꺼낸다. 내가 3대 장손이니 3대 내외분 다시 말해 서 여섯 분의 제사를 이곳 독일에서 모셔야 된다. 아내는 “어머님은 내년에 우리가 한 번 더 한국에 나올 테니 여기서 마지막으로 탈상을 모시고 제사를 독일로 모셔 가겠다.”고 말하자 다들 환영하는 본위기다.

시간과 비용을 생각을 해서 말을 못했는데 한 번 더 나오신다면 대환영이란다. 어머님 살아생전 무슨 일이 있을 때 쓰려고 자매들끼리 매달 조금씩 모아 논 돈이 있는데 그 돈은 나두었다가 내년에 우리가 나오면 전 식구가 모여 며칠 여행이라도 하자며 5째가 제안한다. 다들 환영이다. 그날 저녁에 인천과 서울 동생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광주와 장흥에서 올라온 동생 식구들은 내일 장사를 위해서 저녁에 내려간단다. 잠을 자지 못하고 피곤 할 텐데 너무 힘들지 않겠느냐는 나의 만류에도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리라 내려간다고 하니 자영업자들의 입장을 잘 아는 우리가 말릴 재간도 없다.

 

우리도 이튿날 일산 3째 처형 집으로 와서 처갓집식구들과도 상면하고 며칠 후 독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준비를 했다. 한약과 필요한 용품을 좀 구입을 했다. 또 독일로 가야만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몇 십 년을 외국에서 살았지만 고국이 더 정겨운 모양이다. 사실 한국에 와 있어도 서먹서먹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이 안통해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한국에 가서 있어도 외국인 같은, 독일에 있어도 외국인이라는 명찰을 때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입장이다. 고국은 경제적으로는 부흥을 해서 세계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경제국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는데 내가 지켜야 될 몫은 무시를 해버리는, 다시 말하면 내가 지켜야할 예절이나 사회생활을 위한 공중도덕들은 무시해버리고 나의 위주로만 살아가는 문화는 아직 많은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여유가 없어 보이는 생활들, 허지만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기에 아무리 외국에서 생활을 한 시간이 고국에서 성장한 세월 보다 훨씬 길지만 이 토속적인 생활이 더 정겹고 또 가족들과 같이 어울려 살고 싶은 생각이 훨씬 강하다.

 

내년에 탈상을 모시기 위해 다시 한국을 나오기로 약속을 하고 또 우리는 가족들과 다시 이별을 해야 한다.<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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