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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인과 철학자의 나라" 이미지는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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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8-19 17:53 조회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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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 유럽에서 민족,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자리 잡아 가던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북쪽의 프로이센을 비롯 남쪽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등 수 많은 왕국, 선제후 국가로 나누어져 있었다.

독일어라는 공통된 언어를 쓰는 독일인의 정체성이란 이들의 언어와 문화에 있다고 생각했다.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대영제국이나 나폴레옹의 프랑스처럼 막강한 정치, 군사력이 아니라 독일어권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시인과 사상가들이 독일을 형상화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영국인에게는 왕과 수도 런던이, 프랑스인에게는 나폴레옹과 수도 파리가, 그러나 독일은 괴테와 쉴러가 활동하던 바이마르가 민족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사진출처: 바이마르시 시청 홈페이지


교육개혁가인 빌헬름 폰 훔볼트와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는 고대 그리스는 탁월한 사상가와 철학자들로 고도의 문화를 이루었지만 군사적, 정치적 강국은 아니었고, 반대로 로마는 당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만큼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철저히 군사적으로 조직되었었고, 실용적인 문명이 발달했으나 정신적 문화는 없던 제국으로 평했다.

따라서 대륙을 무력으로 점령한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부활한 로마이고, 독일은 부활한 아테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온 유럽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있을 당시 독일은 노발리스, 피히테 등 시인, 사상가들의 활동이 두드려졌다.

당시 프로이센의 교육부 최고 관리였고 신인본주의 사상을 따르는 교육개혁가 훔볼트의 주장으로 이 시기부터 인문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함께 고대 그리스어가 필수 과목이 된다. 그의 주창으로 건립된 베를린 대학은 1949년부터 그의 이름을 따 훔볼트 대학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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