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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평화주의를 구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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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1-21 08:58 조회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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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쟁에 대해 여론조사를 해보면 유럽의 불만이 높다. 그런데 이때의 평화주의는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인, 뭔가가 결여된 유령같은 존재이다. 현실주의적인 평화주의와 계몽된 반전주의가 결여된 것이다.

80년대에는 다수가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했지만 90년대에 들어서 평화주의는 그 토대를 잃어버렸다. 이번 이라크전은 전쟁을 반대할만한 좋은 이유들이 있고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것이 유럽의 여론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전평화주의 입장은 드물게 힘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는 논리의 부족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일단 전통적인 반전주의 좌파진영의 분열이 눈에 뜨인다. 소말리아에서 루안다 그리고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인권침해, 인종청소, 폭력발생 등의 현실을 배경으로 미국의 좌파 리버럴들은 새로운 '인본주의적 개입주의"로 옮겨갔다.

그리고 곧 프랑스의 좌파지성인들 상당수도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서는 비상시에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들중 많은 이들은 한때는 마오쩌퉁이나 폴포트 혹은 소련공산주의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전향을 프랑스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함으로서 역사적인 합리화를 시도했다. 대량학살자를 방조하는 것은 히틀러가 활개치도록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독일은 상징적으로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요시카 피셔는 거의 단독플레이를 통해 많은 좌파들을 옛 평화주의신념에서 떼어 놓았다. 피셔는  역사를 통해 전쟁은 결코 안된다는 것만을 배운 것이 아니라, 또한 아우슈비츠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피셔는 Srebrenica의 대학살 이후 급격한 입장선회를 했다. 더이상 잔학한 행위를 결코 행동없이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후 1945년 2차대전 이후 독일군은 처음으로 적녹연정이 집권한지 5개월 후 다시 코소보에 참가하기 위해 출병하게 되었다.

전세계 좌파들의 본질적인 부분들이 전향한 것이  지금과 같은 이런 반전주의의 파탄을 초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그보다는 먼저 평화주의의 유산이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들은 91년 걸프전때는 이라크의 유례없는 쿠웨이트병합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의 전쟁을 문제삼았다. 평화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강화하면서,보스니아와 코소보에 대한 개입도 주권국가 유고에 대한 공격전이라고 해석했고, 그로써 유고의 권력자 밀로세비치가 당당히 소수민족을 대학살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러한 고집불통의 영웅적 평화주의는 쉽게 스스로의 무력함으로 빠져든다. 이들은 전통적인 부활절 행진 때 "평화와 인권"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 그러나 평화와 인권이라는 가치중에서 때론 그중 하나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는 딜레마와 진지한 대결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했던 요시카 피셔는 99년 빌레펠트 녹색당 당대회에서 물감주머니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발육부전의 평화주의는 슈피겔지에서도 보인다. 슈피겔지는 지난주 단순한 환원론적 인과주의에 입각해  "기름을 위한 피"라는 표어를 들고 나왔다. 그 부제는 "진짜로 이라크에서 문제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호전주의자들의 새로운 등장에 평화주의자들은 종교재판으로 화답했다. 평화주의가 오늘날 그렇게 폄하당하는 것에는 배경이 있다. 평화주의는 80년대 전성기 이후 일종의 미학적인 위기로 빠져들었다. 지빌레 퇴니스는 이미 보스니아전쟁이 한창 고조되던 95년에 평화의 파토스는 실증날 정도로 착취당한 나머지 헌신짝만큼이나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 이래 그녀는 변함없는 태도로 평화주의의 명예를 구출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녀는 한가지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점점 외교정책이 군사적 해결을 지향하는 마당에 비판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있는 것은 서방세계를 위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즉 인본주의적 개입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전향이 전쟁을 위한 문턱을 낮추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새롭게 현대화된 평화주의는 조건을 단 제한된 평화주의("bedingten Pazifismus")이다.  인간적 비극이라는 조건에서는 폭력의 투입도 가능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쉽지 않다. 우리는 아직 더이상 국가들간의 적나라한 패권정책이 아닌 그런 세계정책을 펼만한 세계질서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걸프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의 모든 전쟁은 군사력을 사용한 세계경찰적인 행위였다. 동시에 열강들의 패권주의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슈퍼파워 미국을 보면 가장 잘 드러난다.국제적인 정당성과 국가패권정책은 서로 부합하기 힘든게 현실이며 예외적으로만 같은 궤를 간다.

여기다 이미 진행중인 비극만이 아니라 잠재적인 위험이 세계경찰적인 개입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미국의 시각에서는 이라크가 그런 예방조치가 필요할 정도로 잠재적인 위험이 큰 상황이다. 이 경우 폭력사용의 결정은 합리화되기 힘들다.

만족스런 입장을 정식화시키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철학자 Michael Walzer의 말이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정리를 시도했다.

"나는 무기사찰 시스템이 작동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유엔의 승리가 되는 방식으로. 나는 사찰을 위한 유엔의 전쟁을 지지할 것이다. 나는 정권교체를 위한 미국의 전쟁은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이라크가 그러한 정권교체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의 목적이나 효과가 사담후세인을 위무하는 것이 되는 평화운동은 결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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