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마당 : 아버지를 찾아서
영주는 서독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적십자사로부터 통지를 받는 순간부터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편지봉투를 받는 순간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귓속에서는 매미울음소리가 나며 현기증이 일었다. 차마 그 자리에서 열어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침실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침대에 앉아 겉봉을 뜯었다. 또박또박 네모 반듯하게 인쇄체로 쓴 글씨여서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아버지의 정성이 들어나 보였다.
~ 보고픈 내 딸 영주에게 :
보내준 서한과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이 애비는 잠시 서른 살 전후의 시절로 돌아가 네 생모의 편지를 받는 착각을 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부녀상봉을 해 보지 못한 딸이지만, 보내준 사진 가운데 스무 살가량 때의 사진을 보고, 네가 내 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생모와의 순결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다시 결혼하지 않고 서른 해가 넘도록 혼자 살아온 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네 생모의 모습 그대로이니 내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
달빛 밝은 밤, 초가지붕 위에 소리 없이 피어나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박꽃의 자태를 지닌 네 생모였느니라. 사진 속의 네 자태가 또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청순한 하얀 박꽃 ‘소화’의 재현이었느니라.
벌교의원 원장과 자애병원 원장 두 분이 모두 내 동경유학시절의 절친한 선배이고 벗이니, 그분들이 네게 알려준 일들은 모두 사실일 것으로 믿는다. 네 생모가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북으로 온 후에야 인편을 통해 들었지만, 옥중에서 너를 낳았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구나. 벌교 정 원장이 너를 딸 대신 입적시켜 중학생 때까지 길러주고, 자애병원 박 원장 내외가 서울에 올라온 너를 보살펴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었다니, 내가 저승에 가서라도 만나 보은을 해야 할 고마운 분들이구나.
내 딸 영주야!
애비는 조국의 품 안에서 혁명 원로의 대우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달마다 한 두 번씩은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면서 우리 겨레의 소원인 조국평화통일을 위해 일하고 있다. 네가 서독국적을 갖고 있다 하니,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면 부녀상봉의 방도가 있을 것도 같다. 지금 여러 사람이 조직을 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거라.
내 딸 영주야!
하루라도 빨리 보고싶구나. 네 생모와의 정조를 지켜온 내게 네 생모의 넋이 상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네 생모의 보호와 도움으로 우리 부녀가 상봉할 날이 곧 오리라고 믿는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도가 마련되면 바로 연락하마!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거라! 아~그리고, 내 손녀딸 한나에게도 할애비의 반갑고 기쁜 마음을 전해다오. 이 마음을 무엇으로 다 전하겠느냐? 우리 만나서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하자!
조국통일 염원 서른일곱 해에 평양에서
무심했던 애비가 쓴다.
영주는 아버지의 편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고 또 읽고 몇번이나 다시 읽으며 울었다.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어머니에 대한 정조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서 울었고, 어머니의 넋이 우리 부녀를 보호하고 돕고 있다는 말에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달빛 밝은 밤, 초가지붕 위에서 소리 없이 피어나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하얀 박꽃의 자태를 지닌 어머니를 그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상상하며, 영주는 ”가자!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살자!“고 결심을 하며 눈물을 닦았다. 지난 서른 해 남짓 동안의 천애 고아의 슬픔과 외로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번에는 아버지의 필적이 아닌 다른 사람 필적의 편지가 적십자사를 통하지 않고 영주의 집으로 직접 우송되어 왔다. 발신인의 주소가 명확하지 않아서 우체국 소인을 살펴보니 베를린이었다.
편지는, “유일한 지도자 김정일 동무와 존경하는 혁명 원로 정하섭 동무의 명을 받들어 정영주 동무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서두로 시작하여, 오는 십일 월 십 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밤 여덟 시 정각에 홀리데이 인 호텔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면, 조선인 안내원 동무가 있을테니, 그의 차를 타고 가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여연구 위원장 동무를 만나라는 정하섭 혁명 원로동무의 분부를 전한다고 쓰여있었다. 추신에는 만약의 경우, 지하주차장에서 안내원 동무와 접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사용할 비상연락망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암호는 ‘박꽃’이라고 했다.
영주는 ‘접선’이니 ‘암호’니 하는 귀에 익지 않은 어휘에 움찔했지만, 만나야 할 사람이 여연구 위원장이라는 내용에 마음이 놓였다. 몽양선생의 따님으로 아버지와는 오라버니 누이 하는 가까운 사이로 남로당 일을 함께했고, 이정선생 일행과 함께 육이오 사변 직전에 평양으로 갔다는 말을 성주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지정해 준 날, 영주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엔나행 비행기를 탔다. 비엔나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밤 여덟 시 정각에 홀리데이 인 호텔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니 짙은 회색의 벤츠 승용차에서 조선인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안내하는 대로 긴장하여 차에 올라타니 주차장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달리며 청년이 그제야 인사를 했다.
“오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네다. 혹 남조선 공안들 눈에 뜨일까 염려하여서 위원장 동무의 숙소로 곧장 오시라고 못했습네다.“
청년은 말을 하면서도 달리는 차의 앞뒤를 조금도 쉬지 않고 날카롭게 살폈다. 차는 어디론가 한참을 달려 한적한 교외의 숲 속에 자리 잡은 저택 앞에 도착했다. 큰 정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차 안을 살펴본 경비원이 들어가도 좋다는 손짓을 하자 차는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현관 앞에 멈추었다. 현관문을 열고 마중 나온 말쑥한 정장차림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니, 마주 보이는 정면 한 가운데 북한의 인공기와 나란히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가 들어서는 영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