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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박사를 통해 본 대한민국 정체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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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베를린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4-02-26 00:07 조회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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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그는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는가? (2)
-조병옥의 회고록에서-


조병옥의 반민족적 행위

그는 또 임정요인들이 무력으로 미군정을 접수하려는 계획을 미리 알아내어 이를 타도하는데 큰 역활을 하므로서 미군정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다.
당시 미군정에 의해 의도적으로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적인 귀국이 금지되고 오직 개인자격으로 귀국이 허락되어 뿔뿔이 흩어져 귀국한 임정요인들은 외세 없이 독립조국의 자주적 건국을 위해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전국반탁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9대 행동강령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1. 3천만은 一死로 자유를 戰取하자.
2. 반독립적 언동은 일체 배격하자.
3. 탁치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하자.
4.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로 수호하자.
5. 임정명령에 복종하여 규율있게 행동하자.
6. 왜구를 철저히 구축하자.
7. 친일파 반역분자의 모략을 분쇄하자.
8. 외국군정의 철폐를 주장한다.
9. 탁치정권을 불합작으로 격퇴하자.

이러한 임정요인들의 움직임을 와해시키는데 기여한 부분을 조병옥은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

„ 그리하여 외국군정의 철폐를 주장하는 임정요인들은 동년 12월 29일이래 미군정청관리들이 결근을 하고서 총사직할 태세에 있음을 기회로 미군정을 접수인계하고 미군인들의 축출을 감행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 „임정의 미군정에 협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군정의 접수, 미군인의 축출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윗 책 쪽 165) 그리하여 조병옥은 김구 주석을 만나뵙고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 한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서약한 이상 현재의 임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의 접수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니 그점 진중히 `심사숙고 하시’라고 간언하였다.“(조병옥저 [나의 회고록] 쪽 166)

당시 임정요인들이 국민들에게 전한 포고문의 내용은 조병옥박사 회고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

„임정내무부 제1호 포고에 의하면 군정경무부를 접수하려고 하였고 또 임정내무부 제2호 포고로 수도경찰청을 접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나는 침착성을 잃고 여기에 부화뇌동한 10개 경찰서장을 파면시켰던 것이다.“ (윗 책 쪽 168)

조병옥은 임정뿐 아니라 민족자주를 추구한 중간진영의 움직임까지도 스스로 미군정의 요구에 맡게 기밀을 탐지 밀고해 파탄시키는데 앞장서서 일했다.

„민족자주연맹을 영도하고 있는 중간파의 영추인 김규식박사를 한국정치계의 영도자로 등용시키려는 미군정의 방침을 알게 된 나로서는 하나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정치강령]을 내 자신이 기안하여, 한국민주당의 중진인 설산(雪山) 장덕수형에게 자문검토를 받은 후 미군정 부처장회의에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정치요강]은 部處長會議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또 부처장 및 각도지사연석회의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미군정부로 하여금 미국무성에 전달된바 있는 準國書에 가까운 공문서였던 것이다. … 나는 서론에 지적하기를 [군정의 총지휘자로서의 미군 제 24군단사령관인 <하지>장군은 잠정적으로 남한의 행정권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이 행정권을 제3자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비록 미군일 망정 한민족의 입장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자유독립국가로서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사회정책이나 경제정책에 있어서 중간로선이 있을 수도 있으나, 통일독립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더욱히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혈투하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중간노선이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미군정은 한민족의 입장에서 시급한 군정의 행정정책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서론에서 은연중 중간파의 영추인 김규식박사를 비롯한 중간파 인사들의 등장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조병옥 저: [나의 회고록] 쪽 186-187에서)

우리 민중은 역사이래 조국을 지키며 자주적으로 살아 가기 위해 외세와 타협없는 전쟁을 불사했다. 당시 외세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민중들의 운동이 얼마나 격렬했고 전체 국민들이 얼마나 이 운동을 지지했던가는 다음의 글로서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사실 반탁운동이 격렬하여 그 극치에 달하였을 무렵에는 전 서울시는 철시가 되어 장국밥까지 사먹을 수 없는 정도의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또 3천여명의 군정관리중에 9백여명밖에 남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Hodge장군의 [쿡]까지 도망하여 자기숙소에서 식사까지 못할 정도로 혼란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윗 책 쪽 168)

조병옥박사는 이처럼 전국에서 파도처럼 일어나던 민중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요구를 미군정과 재빨리 „민주주의자“로 둔갑한 일제잔재세력과 손잡고 무력으로 파탄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그 기초를 마련하는데 공헌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가 민족자주권을 발휘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이러한 건국과정에서 이미 잉태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민주운동, 민중운동 나아가 통일운동은 물론 전 국민에게 지워진 기본과제는 무엇보다 민족자주권을 쟁취하여 민족이 화해하고 민중이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우리 조국강토에 세우는 일이라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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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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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이도 그렇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후 신탁을 찬성한 박헌영이 김일성이는 도대체 머하는 놈들인지..


gelb/os님의 댓글

gelb/os이름으로 검색

조병옥의 친일과 제주 4.3 양민학살[펌]

1. 조병옥의 친일발언

[편집자에게] ‘친일’ 조병옥 면죄부 칼럼 유감

지난 19일치 신경림 시인의 `삶이 있는 풍경-살고 싶은 나라가 되려면'(6면)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개인적으로 친일행각이 별로 보이지 않는” 유석 조병옥을 “범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하는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라며 터무니 없는 관용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1년 8월25일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죽음으로써 일본에 보답한다는 각계 명사 120명 결의 아래 신흥우, 윤치호, 장덕수, 최린, 이광수, 주요한 등 친일 거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조병옥은 자못 비장한 어조로 소신발언에 목청을 돋궈 부민관 중강당을 제압했다.

“우리는 오늘 제국의 신민으로서 이 마당에 모였습니다.
전 세계를 통하여 역사적 드라마가 전개되는 현 단계에 있어서 유사 이래 처음 위급존망지추에 입각한 제국의 위정자로서는 조선인이 과연 절대적으로 제국신민으로서 현하 국책에 협동하느냐 않느냐 함에 있어서 조선민중에 대해서 듣고 싶은 대답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
(…)성전이 관철된 뒤의 전쟁은 민족적 투쟁에 있는데 그것은 세계를 이분하여 백색인종과 유색인종의 투쟁인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임의 목적은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신민으로서 국책에 절대 협력할 것, 그리하여 위정자로 하여금 안심케 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바쳐 무조건 친일에 일로매진하자는 이처럼 열띤 유석의 주장을 두고 60년이 지난 오늘 고작 `범친일파'쯤으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

<<당시 삼천리사의 발기로 전시보국단체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되자 이 단체의 위원 35명 가운데 조선일보 후신 <조광> 발행인 방응모도 들어 있어 윤치호, 이광수와 함께 전비 조달차 가두에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일보 전무 유석이 앞서 방응모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
육당의 친일이 거의 혼자만의 매국이었다면 유석의 그것은 훨씬 더 조직적·지능적 배족(背族)이었다. 한데도 그는 스스로 참회한 적이 전무하였다.

임중빈/문학평론가·인물사가
(한겨레 2001.3.26)

2. 조병옥의 친일회의 참석

<내선일체구현>

- 전 략 -

이와 함께, 이른바 시국적인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대소 규모의 각종 좌담회가 사회각 계층에 걸쳐서 베풀어지곤 하였다. 신문. 잡지에 그 기록이 실려서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는 데, 그 몇 개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시국유지원탁회의 : 1938년 12월 14일 부민관 강당. 참석자 : 갈홍기, 권충일, 김동일, 안준, 류형기, 윤형식, 이각종, 이광수(李光洙), 인정식, 조두원, 조병옥(趙炳玉), 주련, 주요한(朱耀翰), 차상달, 차재정, 하경덕, 현영섭. 내선일체 구현, 동아협동체 건설, 국내 혁신문제 등을 의논하였다.

- 후 략 -

(임종국 `실록친일파` p190~191,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minjok.or.kr/n_pds/chinilpa99/banmin/heesang/juyh/ju2.html)




3. 조병옥과 4.3 항쟁의 비극

제주 4 .3 항쟁이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에서 비극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1948년 총인구 27만 명의 섬에서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은 5백여 명의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고,

경무부장인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 극우세력은 폭행, 고문, 살해, 방화를 일삼았다.

육지에서 유입된 토벌대는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 방화, 무차별 학살을 자행 '북촌 주민 학살 사건' 등 집단적인 주민학살을 자행했다.

[연표한국현대사](김천영 편저, 한울림, 1985)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에서는 "8만 6천명 살상, 1만 5천호 방화, 7만 8천두의 소와 2만 2천 필의 말 및 2만 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 5천 석, 고구마 4백 2십만 관, 면화 9만 7천 관, 소채 9십만 관이 소각"되었다.
<최은아/ 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레드헌트 인권해설)

http://www.sarangbang.or.kr/hrfilm/2003hrfilm/jaryo2_search_view.html?mv_num=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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