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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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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11-15 09:50 조회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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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지금 집 사면 후회한다”는 글을 올려 말썽을 빚은 청와대 이 아무개의 인터뷰를 보니 “일산에서 살다 아이 교육 문제 때문에 일원동으로 이사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가 말하는 ‘교육 문제’란 실은 ‘대입 문제’를 뜻한다. 그런데 ‘대입 문제’를 ‘교육 문제’라고 말하는 건 이 사람뿐 아니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대입 문제’를 ‘교육 문제’라 말한다. 근래 한국에서 이런 ‘전국민적인 합의에 의한 말바꾸기’는 꽤 많다. 이를테면 ‘명품’이라는 말. 명품이라는 말은 본디 “뛰어난 물건이나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근래 한국에선 '럭셔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알다시피 ‘럭셔리’는 말은 ‘명품’이 아니라 ‘사치품’(혹은 ‘고가품’)이라는 뜻이다. 내가 이런 소릴 하는 건 ‘바른 말을 쓰자’는 착한 캠페인을 벌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 보이는 ‘전국민적인 합의에 의한 말바꾸기’는 실은 ‘전국민적인 의식의 왜곡’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한국인들은 대입 문제 빼곤 교육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말하자니 민망해서, ‘대입문제’를 ‘교육문제’라 바꿔 말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머리는 텅 비어도 괜찮지만 외제 사치품을 메고 두르지 못하면 부끄러워 못사는 그들은 “사치품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불편하니 ‘사치품’을 ‘명품’이라 바꿔 말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꾼 말에 의해 다시 더 많은 의식의 왜곡이 일어난다. 이젠 대입 문제는 진정으로 교육 문제가 되고 사치품은 진정으로 명품이 되는 것이다. 이런 기괴한 코미디를 끝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국민적인 합의’를 깨트려 가면 된다. ‘대입문제’를 ‘교육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묻는 것이다. “왜 대입 문제를 교육문제라고 말하세요?” ‘사치품’을 ‘명품’이라 말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묻는 것이다. “왜 사치품을 명품이라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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