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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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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ioslu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08-06 22:43 조회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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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화원에서 집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건너편 남산 도서관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시청역에 내려야 한다. 나는 단 한번도 이 같은 행로에 변화를 주지 않았는데, 어느 날엔 가 문득 시청역까지 한번 걸어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직장인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문화원 저녁 반 수업을 끝내고, 그날 만큼은 길을 건너지 않고 곧장 걸어내려 갔다. 그런데 어느 정도 걸어 가니, 주위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낮은 구멍가게며, 몇 개의 여관들을 지나치니, 이런 높은 것들 대신 길 왼편에 기다란 난간을 하나가 나타나더라. 이제 길은 답답함을 제쳐두고 뻥 뚫린 공간을 가져 다 주는 것이었다. 그 아래 저만치 낮은 곳에는 또 다른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둑한 여정 도중에 난데 없이 눈 앞으로 떨어진 그 밝은 광경이란, 알록달록 근사한 불빛들이 제법 밤 풍경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난간의 오른 쪽 끝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차리고는 멈칫 하였다. 누군가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있다가, 정말 아름답지 않으냐고 내게 묻는다 라면….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아름답다는 것을 의심치 않은 이 멋드러진 광경을 자아내는 마을의 한 구석 어딘가에는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은 1평 남짓한 자그마한 쪽 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흑백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가파른 계단으로 덮인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새 천년이라는 미래적인 현재가 시간의 흐름을 같이 하고있는 요즈음에도 소위 달동네라고 불리 울만한 마을들이 서울 구석구석에 박혀져 있는 것이다. 결코 단정치 못한 집들. 그 키는 매우 작지만, 그것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서울 저 높은 곳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충 시멘트를 굵직하게 펴 바른 단 높은 계단들. 실로 그 동네의 몇몇 집들은 아직까지도 연탄을 달궈야만 겨울에 시린 손을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연탄 가득한 지게를 짊어지고 가는 이는 보지 못했지만, 연탄 집게로 연탄 하나를 찔러 넣는 할머니는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 골목길에 대문을 두고 있는 집들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 다녔었다.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는 다행이 그 집만은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얼마 안 되는 생활비로 그 허름한 방구석에 하룻밤이라도 더 잠을 청하기 위해 월세를 지불하는 셋방살이 꾼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준 것은 아니다. 수고한다며 바카스 한 병을 억지로 제 목구멍에 넣어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짜증스럽다며 등만 보여준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간혹 너무나도 병약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첫인상조차 제대로 심어줄 수 없었던 이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몸을 이끌고 현관문까지도 나올 수 없기에 문은 항상 열려있었는데, 그 대문의 생김새가 너무나도 초라하여 자물쇠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나는 내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하루가 기쁘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드나드는 좁은 길이 아닌, 보다 넓고 편안한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방문 때마다 등 뒤에 흐르는 땀이 얄미웠다. 동료들은 <공동선>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나를 위로하고 달래도 보았으나, 삶의 변화를 꾀하려는 나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나는 도망치고 말았다. 비가 오는 날엔 우산조차 받쳐 들 수 없을 만큼의 좁은 골목길 안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힘껏 달려간 것처럼 말이다….
나의 바람은 실현되었고, 그리하여 변화된 자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무슨 노력의 대가였는지는 모르지만, 단번에 몇 층인지 알기 힘들만큼 높은 빌딩의 18층 그 어딘가에 나의 책상이 생긴 것이다. 달동네에서부터 달려온 나는 또 다시 그만큼 높은 곳에 올라오게 된 셈인 것이다. 그곳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면 마주한 건물의 창문들로 어지럽다. 그것들은 태양의 빛을 받아 번쩍거리기만 할 뿐 그 구실을 다하고 있는지가 의문일 정도다. 그리하여 그것은 안을 드러내어주기 보다는 마냥 감추는 듯 보이는 것이다. 나의 진실은 보여주지 않고 가리는 모양새. 널따란 도로면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제가 지금 있는 이 곳은 두 다리 쭉 뻗을 만큼의 넉넉함은 없는 것 같다.
형편없는 삶이나마 이어가겠다고 바둥바둥 살던 그 골목길 주민들이 왜 그렇게 미웠는지. 나의 어리석음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나 보다. 실은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렇게 역겨웠던 것이다. 쓸데없이 바둥댔던 이는 알고 보면 나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끈끈한 인정이란 것은 자신을 떠나가도록 내버려두고, 각박하고 간악한 인간들 틈새에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흘러보내게 된 것이다. 여유보다는 민첩함, 칭찬보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존중하는 사회에 빠지게 된 것이다.

새삼 머리 속에 떠오르는구나. 단 한 칸 방이 이루고 있는 주소와 전화번호,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해 적어 두었던 약도 속 필체들, 또한 그 안에 적힌 구멍가게 이름들, 그리고 쪽방의 내부구조.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날 밤 누구나 감탄할 그 밤 속 불빛들에 대해서도 나는 과감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함부로 지껄일 수 있겠는가. 화려한 전광판과 달빛보다 달콤한 가로등 불빛 사이에 들어선 작은 건물의 수십 개 쪽 방 안의 인생이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닌데. 나는 보았었다. 하루 더 그곳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꼬깃꼬깃해진 초록색 지폐 몇 장을 겨우 뒤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인에게 내미는 모습을.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시 되는 것은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한 번 더 의심 해보고, 답을 얻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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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돌님의 댓글

구르는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며칠 동안 어색한 칼럼 분위기 때문에 가려졌던 글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푼수님 너무 애절한 시군요,,, 저 강처럼 저도 반푼수님의 마음을 알아드릴 수 있다면 약간의 위로라도 할텐데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님의 시를 읽고 잠시나마 강물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


반푼수님의 댓글

반푼수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구르는돌님! 반갑습니다. 어설픈 글 읽어주시고 따뜻한 마음까지 보내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님의 글 "쪼코파이와 커피한잔"을  감명깊게 읽고 댓글을 썼었는데 제 기술 부족으로 날라가고 말았어요. 두고 두고 읽고 싶은 글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속에  키피보다 달고 향기로운 님의 따스한 인간애가 흠뻑 배어있군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편안하신 밤이 되시기 빕니다.  반푼수 드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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