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본지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이 있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이:
이렇게까지 뜨거운 성원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딴지일보의
위력이랄까,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 즉
미국, 캐나다, 호주 심지어는 러시아,
중국, 알라스카, 호놀룰루, 남미 등의
네티즌들이 이렇게까지 성원을 해준다는
것, 너무나 놀랍습니다.
파:
현재도 많은 성원과 성금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식사 등 여러 가지
생활 조건이 좀 향상되고 있습니까?
이:
그럼요. 사실 딴지 독자들의 성금이
들어오기 전,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거의
차비조차 없었습니다. 식사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속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거지라고 할까... 국제 홈레스, 뭐 그런
지경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제
독자들이 성원도 보내주고 성금도 주고
해서 지금은 그저 엄청난 부자가 된,
그런 느낌입니다. 허허.
파:
이야기를 좀 바꿔보지요. 경운군의
고향인 라스팔마스 한인 사회는 어떤
곳입니까.
이:
저는 라스팔마스에 약 20 년 전에
주재원으로서 처음 정착했습니다.
여기는 대서양과 아프리카 서부 연안을
중점으로 하여, 지금 한국에서 소비되는
조기, 오징어, 문어 등등 해외에서
들어오는 외국산 수산물이 실제로
잡히고 선적되는 곳입니다. 한국민들의
식생활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는
장소라고 보면 됩니다.
이곳
한인 사회는 어느 해외 교포 사회에
비해서도 제일 향학열이 높고 여기서
태어난 자녀들은 우리말, 글, 얼을 잃지
않고 자랍니다. 경운이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 자랐고, 죽는 날까지
한국인의 얼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경운이 뿐 아니라 여기
학생들은 교육이 잘 되어 있고 예의
범절이 바르고 똑바른 것으로 칭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파:
사건 전 경운 가족의 삶은 어떠했고
지금은 어떠합니까.
이:
경운이 사건은 라스팔마스 교민들
전체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가족들의 고통과 시련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민들 모두
지금까지의 사건 하나하나 과정, 또
유가족이 당한 고통을 다들 잘 알고
조속히 해결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희 가족들의 경우,
경운이 사건이 일어난 후 제가 하던
사업을 위시해서 경운이 엄마가 하던
학교 봉사 활동, 동생 경진이의
학업까지도 모두 중지되었었다고 봐도
됩니다. 제 사업의 경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전혀 재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
생전의 경운군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경운이는 남달리 특이한 애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도 그렇고,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기에 천성이 아주
맑다고, 때가 묻지 않고 아주 순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또 나름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챙겨 나가고
계획을 수립하고 몰입하고 그 결과를
얻을려는 타입이었고, 특히 어려움을
참고 견뎌나가는 인내심이 대단한
친구였다는 점만은 아버지로서 분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
경운 군 사건이 있은 후, 어느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상황이
조작되었음을의심하게 되었습니까?
이:
사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저희를
맞아준 사람이 영국 경찰이 아니고
검시관의 보조관이었다는 점부터 조금은
이상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고든
사건이든 담당 경찰이 유가족을 만나
사건을 설명해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대답해 주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까.
그리고
잠시 후 만난 검시관도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습니다. 검시관이 경운이 얼굴만
살짝 보여주고, 우리가 엄청난 충격과
고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와중에 '경운이가 맞냐' 고 질문하길래 '맞다'
고 하자 '나중에 다 설명을 해 줄거고
시신도 보여줄거니 가시라...' 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 의심은
없었는데, 이때 검시 보조관이 부검을
아직 안했다고 분명히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부검 날자와 장소를
가르쳐 주면 그때 몸 전체 포함 다
확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최초의, 시신 확인등의 공식적인 약속이
그 후 무려 열달 이상을 끌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경운이
사건이 조작, 은폐 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파:
그간 티비나 언론에 간혹 보도가 되곤
했는데 생각보다 일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언론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경운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처음부터 모든
관련된 자료를 사용해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보도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사실 한국 티비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도 솔직히 말을 하더군요.
방송
체계상 어떤 사건이던지, 특히 해외에서
발생하는 건을 다룰 때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일단 없고, 어떻게 해서든
가자마자 순식간에 처리를 해야 하고, 또
방송 스케줄을 펑크 낼 수 없다는
압박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방송용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욕이 앞서게 된다는 겁니다. 이래서
사건을 깊이 분석하고 충분히 해석하고
객관적인 상황을 국민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납득시킬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거지요.
영국이나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외국 미디어들은 '인베스티게이티브
저널리즘' (Investigative Journalism), 즉
사건을 철저하게 파고 들어가서 그것을
분석해서 그 결과가 수사 과정에서
반영이 되는 그런 확실하고 전문화된
취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결국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게 현실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파:
대사관에서 도움을 받은 부분이 실제로
있는지요. 그리고 대사관에서 무엇을 해
주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대사관의 도움은,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대사관이 전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가족이 현지
영국 실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왔을
때 대사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입장임에도, 여기에 대해 이방인 취급을
했다는 이야깁니다.
제일
먼저 유가족이 대사관에 부탁한 사항은
변호사 선임이었습니다. 만약 사건이
은폐 조작 된 것이라면 변호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주변의
영국인 등이 계속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저희도 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언어나 지리 문제 등은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고, 실질적인 도움, 즉
법률적인 도움을 달라고 청했는데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재 주영대사관은 이런 측면에서는 '먹통'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주한 외국 대사관, 즉 한국
내에 있는 미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필리핀, 에콰도르 등 온갖 나라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그
나라 국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말하자면 법적인 문제에 봉착 했을
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과 함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에 있는 쟁쟁한 관련 변호사들의
이름, 주소, 인적 사항, 전화번호, 팩스
등 모든 정보가 수록된 것을 보고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러니,
감히 말씀 드리자면 주영대사관은
경운이는 물론 경운이 유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하나도 없었고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파:
대사관 측에서는 초기에 자신들이
변호사를 선임해 줬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까?
이:
전혀 사실무근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거론조차 하기 싫을
지경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각종
증거와 자료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네티즌은 물론 대한민국 법정에서도,
대통령 앞에서든 여왕 앞에서든 저는
떳떳하게, 대한민국 주영 대사관은 제게
변호사를 선임해 주지 않았음은 물론, 변호사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등 어떠한 정보도
알려준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파:
4 년간 영국에 체류하시면서 도와주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압니다. 영국 교민 등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웠던 적은 언제이며
아쉬운 적은 없었습니까.
이:
제가 경운이 사건이 일어난 후 약 7
개월간을 켄터베리에 있었습니다.
일단은 사건이 조작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사건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가능한 모든 자료나
정보를 확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요.
차로 두 시간 반 이상 걸리는 런던 근처
뉴몰든에 한인 사회가 있지만 그
시점에서 거기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곱 달 이상 미행을 당하고
경찰의 각종 수작과 방해 공작, 심지어
경운이 소지품 및 서류를
훔쳐가려고 호텔에까지 잠입을 하는
상황에서 이제 더 이상 켄터베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판단 하에 뉴몰든의
한인 타운으로 오게 된 겁니다.
이후
한인들에게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일부 자료를 공개했으나 일부 한인들은
사건 내용 자체를 파악을 못했고, 심지어
'이런 일은 영국이란 나라에서 일어날 수
없다' 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우리가
사건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는것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한인들 중에는
저희들에 대한 개인적인 험담은 물론
입에 담지 못할 욕까지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망 속에서 영국인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들은 오히려
전혀 태도가 달랐습니다. 경운이 사건의
희생자는 경운이 자신이고, 유가족은
자식이 죽은 이상 당연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거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많은 위로의 말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성당
가는 길에서 거의 쓰러진 저를 간호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영국인은 '켄터베리
일부 영국인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영국인 전체에 대한 나쁜 감정은
갖지 말아달라' 고 당부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기간이 제가 런던으로
옮긴 후 6 개월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좀 힘을 얻은 후, 즉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3 개월이 지나서 다시 한인
사회로 가서 하나하나 길에서
서명운동도 하고 사건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하니 교민들도 조금씩
변하면서 힘을 내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런 과정에서,
그래도 한 핏줄, 한 민족인 대한민국
동포들이 낫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떤 한인 아주머니는
길에서 혼자 서명운동을 하는 제게
빈대떡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는데 그런
고마움은 참으로 잊기 힘듭니다.
성함도 말씀 안 하시고 도망치듯 가신 그
아주머니를 저는 아직도 찾고 있습니다.
파:
개인으로서 이런 일을 끌고 나가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이며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무엇이 계속 버텨 나갈 수
있게 하는가요.
이:
경운이 사건은, 저와 가족에게는
표현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하다 하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상태까지
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제가 직접 경운이의 시신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는, 다시 말해
경운이가 어떻게 다쳤는지 상처 부위
등을 부검 등을 통해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다짐이 있었고, 또 경운이 엄마와
경진이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경운이 엄마와 경진이에게 경운이
시신을 정확히 보여줄 때까지는 절대
물러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경운이 사건의 은폐 조작은 '의혹'이
아니라 이미 명백히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런 만큼 경운이 엄마와 경진이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알 게 모르게
밀어주신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경운이 사건의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합니다. 즉,
진실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밝혀진 진실을 가지고 수많은 분들을
찾아가서 눈물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어야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고,
특히 이번에 딴지일보를 통해 도와주고
계신 많은 네티즌들에 진실을 통해
보답할 때까지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운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났을 때부터 해결되었을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조치할 수 있는 '매뉴얼' 을 만들어 해외
교포들한테 전달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도와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말씀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이영호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 저는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파: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경운군이
장례를 치르고 영면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후의 삶은 사건 이전의 삶과 어떻게
달라질 거라고 보십니까.
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경운이를
데리고 스페인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까지도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기 전에 영국에 계신
교민들이나 영국인 등 관계되는
분들에게 인사를 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경운이의 영면을 위해
성당에서 미사를 정식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시신을
데리고 대한민국에 간 후에는,
아직까지도 경운이가 죽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운이 할머니한테 경운이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목이 메임) 죽었다고,
이제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를 할 겁니다
(한동안 인터뷰가 중단된 채 눈물을 흘림).
|
경운군과
할머니의 즐거웠던 시절. 한국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4 년이 지난
아직도 이 비극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
파: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
저는 그거밖에 없습니다. 진실에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고, 어차피 이 사건의
의문은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하나하나에 명쾌한 답을 내려 하지는
마시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봐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세부적인 것들은 앞으로
일이 풀려 나가면서 조금씩 설명이 될
것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경운이 사건을
그냥 해외에서 죽은 유학생 사건이라고
냉정하게 보지 마시고, 한 동포의
죽음으로 생각하시고 사랑을 갖고 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사건은
분명히 해결됩니다. 경운이 자신도
살아서 그 참을성 하나만큼은 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그런 인내심을 갖고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결국은 다 해결될 것입니다.
너무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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