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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영국 유학생 이경운군 사건 최종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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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09-08 22:28 조회2,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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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운군을 회상한다

이제 경운군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자. 사건의 그간의 정황과 아버지 이영호씨가 겪는 어려움을 강조하느라 막상 경운군 본인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지 못했다.

이영호씨는 언제나 '이 모든 상황의 주인공은 경운이다' 라는 말을 강조하며 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국장 역시 이 사건에 접근하면서 관련된 많은 내용들을 접했고, 경운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조금씩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 젊은 친구가 매우 책임감이 강하고 순수한 청년으로서, 이미 17 세에 한국어와 스페인어, 불어, 영어 등 4 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어학 능력은 물론 모범적인 생활 태도로 인해 살아 있었다면 세상에 보탬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점점 더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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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팔마스 한인학교 졸업식에서 대표로 답사를 읽는 경운군

물론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줄줄이 열거할만한  대단한 업적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영호씨가 이처럼 못 잊고 있는 아들 경운이, 우리가 이렇게 돕고 있는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영호씨의 목소리를 통해 살아 생전의 경운군을 들여다 보자.

* * *

...경운이가 아마 중2 , 여름이라고 기억납니다. 항상 아침에 경진이와 함께 통학버스를 타고 켄터베리 영국 학교(라스팔마스에 있는 영국계 학교. 경운군은 초,중,고를 여기서 졸업했고 이 연장선상에서 켄터베리로 유학을 갔다가 변을 당했다)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일어나냐는 것으로 서로 경쟁도 하던 녀석들인데, 어느 날 경운이가 조금 늦게 일어나보니 동생 경진이는 먼저 가고 학교버스는 이미 떠나고 맙니다.

그냥 초인종을 울려 엄마나 나한테 이야기 했으면 조금 꾸중 듣고 결국 차로 태워주면 되는데,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날은 집에서 걸어서 무려 3 시간 이나 걸리는 경사로와 산비탈을 거쳐 걸어서 학교로 향한 겁니다. 아마 나름대로 반성도 하고 생각 정리하고 그랬겠지요. 학교에서는 하루도 늦거나 빠지는 아이가 아니라서 동급생이나 선생님(영국인) 모두 걱정이 많았답니다. 그런데 경운이가 무사히 도착하고, 집에서부터 걸어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니 모두들 잘했다고 하고 선생님들로부터 오히려 대단하다며 칭찬을 받았다는 겁니다.

* * *

...경운이가 켄트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혼자 배낭을 메고 유로스타(TGV) 편으로
영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켄트 대학교의 세미나에 청강생으로 참여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하루는 켄터베리 공원에서 영국 거지, 노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고픈 생각이 들었답니다.여행을 다녀온 후 이야기가, 오들오들 떨면서 (영국 여름 날씨는 8 월이라도 새벽에는 거의 추울 정도로의 쌀쌀한 날씨입니다) 그곳 노숙자들한테 가서 자기는 스페인에서 왔으며 학생인데 돈이 없으니 여기서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하겠냐는 것을 묻고 한쪽 귀퉁이에서 배낭을 벗삼고 밤을 세웠다는 겁니다. 와중에 핸드폰이 울려서 정체가 탄로나는 등 약간의 사건도 있었구요.

그리고는 그 여행에서 우연히 일본인 및 브라질 사람과 사귑니다. 마침 이 브라질 친구가 유네스코에 근무하는 직원이었으며, 경운이가 장차 유엔에 들어가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자(삶에 대한 경운군의 생각을 좀 더 알고 싶은 분은 여기를 클릭) 너무 반가워 하며 너는 영어 스페인어 불어 한국어 등 4 개 국어에 능하니 참으로 적합한 인물이다. 그리고 너는 한국인임에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활동 하는 게 좋겠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유엔에 근무하게 되면 유엔 여권이 나오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국장 주: 대한민국 여권만 가진 상태에서 외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입국 등 아직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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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에 근무하는 브라질 친구와 함께. 경운군이 사망한 후에 그
사실을 모르던 이 사람에게서 스페인의 주소로 안부 편지가 오기도 했었다고....

그리고는 스페인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그대로 가지고도
오히려 국제적으로도 활동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는 것을 자랑스레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경운이의 국가관이나 국제정치 외교학과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아주 뚜렷했습니다.

* * *

...경운이가 고 2 때 한국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랩이 한참 유행인 것을 발견하고 돌아와 친구들(한인,스페인)과 랩을 작곡,작사,편곡하더군요. 스페인 한인 중 어려운 동기생도 있고, 자기는 영국으로 이제 공부하러 가니 무엇인가 후배들에게 남겨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랩 CD 를 한인들에게 배포하여 성금이 모이면 그것을 한인성당에 청소년 기금으로 주고 갈 생각이었답니다. 영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으나 일이 늦어지자 후배들에게 맡기고 12 월 크리스마스 방학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오면 일을 마치기로 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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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키보드를 연주하고 있는 경운군.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교회에서 반주 활동을 오랫동안 하는 등 음악에 상당히 능했다고.

현재 경운이 미완성 랩 모음이 남은 후배들(스페인인 포함)에 의해 완성되어 있습니다. 이 앨범에는 경운이 사건에 대한 영국 관련 당국의 은폐, 조작을 지적하며 진상 해명을 촉구하는 추모곡도 들어가 있구요.  특히 그 중에 경운이 목소리로, 왜 한국사람들은 서로 서로 싸우니.. 하는 내용이 담긴 곡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녀석도 역사학과를 지망할까도 생각할 정도로 역사에 대한 의식이 뚜렷한 녀석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의 분단된 실정에 대한 안타까움도 나름대로 표현하고자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경운이 추모곡 중에는 스페인 선율(기타)이 담긴 곡에 스페인 친구들 함께 부른, 인종차별에 대한 곡도 담겨 있습니다.(앨범 수록곡 듣기)

* * *

국장 역시 경운군을 만나본 적은 없으니 그에 대해 뭐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의 에피소드들과 그밖에 국장이 들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본다면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현명했던 친구가 아닌가 싶다. 그가 살아서 본인 뜻대로 유엔에서 일했다면, 그래서 고국에 도움이 되고, 크게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했다면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경운군은 이미 숨지고 그의 포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도움이 되고자 했던 조국은 그의 죽음을 해명하는데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재외 국민을 아낄 줄 모른 채 체면치레 하기에 바쁜 재외 공관, 자극적이고 장사되는 사건이 아니면 눈을 돌려 버리는 거짓된 언론들,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미쳤다며 백안시하는 일부 한인들과 공관원들, 어떻게든 사소한 것으로 흠을 잡고 그것을 남다른 능력인 양 즐기는 소수 비인간적인 네티즌들, 이는 비단 그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어쩌면, 경운군은 그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다시 살펴보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 친구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 줘야 할까...

 


이영호씨 인터뷰

두번째 기사가 나가기 직전, 국장은 런던 모처에서 이영호씨를 다시 만났다. 당시 이미 육백여 만원의 성금이 걷히고 이경운 홈페이지의 서명란에 수천명의 서명이 폭주하던  시점이다. 이영호씨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기 어려워했고, 놀라움과 감동으로 감정이 무척 고양되어 있었다. 이런 열화와 같은 반응을 뒤에 업고 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국장의 마음 역시 그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국장은 이영호씨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그의 목소리를 직접 담아 독자 열분들께 전해드리기 위해서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같이 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인터뷰

 

파: 본지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이 있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이: 이렇게까지 뜨거운 성원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딴지일보의 위력이랄까,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 즉 미국, 캐나다, 호주 심지어는 러시아, 중국, 알라스카, 호놀룰루, 남미 등의 네티즌들이 이렇게까지 성원을 해준다는 것, 너무나 놀랍습니다.

파: 현재도 많은 성원과 성금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식사 등 여러 가지 생활 조건이 좀 향상되고 있습니까?

이: 그럼요. 사실 딴지 독자들의 성금이 들어오기 전,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거의 차비조차 없었습니다. 식사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속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거지라고 할까... 국제 홈레스, 뭐 그런 지경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제 독자들이 성원도 보내주고 성금도 주고 해서 지금은 그저 엄청난 부자가 된, 그런 느낌입니다. 허허.

파: 이야기를 좀 바꿔보지요. 경운군의 고향인 라스팔마스 한인 사회는 어떤 곳입니까.

이: 저는 라스팔마스에 약 20 년 전에 주재원으로서 처음 정착했습니다. 여기는 대서양과 아프리카 서부 연안을 중점으로 하여, 지금 한국에서 소비되는 조기, 오징어, 문어 등등 해외에서 들어오는 외국산 수산물이 실제로 잡히고 선적되는 곳입니다. 한국민들의 식생활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는 장소라고 보면 됩니다.

이곳 한인 사회는 어느 해외 교포 사회에 비해서도 제일 향학열이 높고 여기서 태어난 자녀들은 우리말, 글, 얼을 잃지 않고 자랍니다. 경운이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 자랐고, 죽는 날까지 한국인의 얼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경운이 뿐 아니라 여기 학생들은 교육이 잘 되어 있고 예의 범절이 바르고 똑바른 것으로 칭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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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사건 전 경운 가족의 삶은 어떠했고 지금은 어떠합니까.

이: 경운이 사건은 라스팔마스 교민들 전체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가족들의 고통과 시련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민들 모두 지금까지의 사건 하나하나 과정, 또 유가족이 당한 고통을 다들 잘 알고 조속히 해결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희 가족들의 경우, 경운이 사건이 일어난 후 제가 하던 사업을 위시해서 경운이 엄마가 하던 학교 봉사 활동, 동생 경진이의 학업까지도 모두 중지되었었다고 봐도 됩니다. 제 사업의 경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전혀 재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 생전의 경운군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경운이는 남달리 특이한 애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도 그렇고,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기에 천성이 아주 맑다고, 때가 묻지 않고 아주 순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또 나름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챙겨 나가고 계획을 수립하고 몰입하고 그 결과를 얻을려는 타입이었고, 특히 어려움을 참고 견뎌나가는 인내심이 대단한 친구였다는 점만은 아버지로서 분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 경운 군 사건이 있은 후, 어느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상황이 조작되었음을의심하게 되었습니까?

이: 사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저희를 맞아준 사람이 영국 경찰이 아니고 검시관의 보조관이었다는 점부터 조금은 이상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고든 사건이든 담당 경찰이 유가족을 만나 사건을 설명해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대답해 주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까.

그리고 잠시 후 만난 검시관도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습니다. 검시관이 경운이 얼굴만 살짝 보여주고, 우리가 엄청난 충격과 고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와중에 '경운이가 맞냐' 고 질문하길래 '맞다' 고 하자 '나중에 다 설명을 해 줄거고 시신도 보여줄거니 가시라...' 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 의심은 없었는데, 이때 검시 보조관이 부검을 아직 안했다고 분명히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부검 날자와 장소를 가르쳐 주면 그때 몸 전체 포함 다 확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최초의, 시신 확인등의 공식적인 약속이 그 후 무려 열달 이상을 끌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경운이 사건이 조작, 은폐 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파: 그간 티비나 언론에 간혹 보도가 되곤 했는데 생각보다 일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언론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경운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처음부터 모든 관련된 자료를 사용해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보도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사실 한국 티비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도 솔직히 말을 하더군요.

방송 체계상 어떤 사건이던지, 특히 해외에서 발생하는 건을 다룰 때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일단 없고, 어떻게 해서든 가자마자 순식간에 처리를 해야 하고, 또 방송 스케줄을 펑크 낼 수 없다는 압박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방송용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욕이 앞서게 된다는 겁니다. 이래서 사건을 깊이 분석하고 충분히 해석하고 객관적인 상황을 국민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납득시킬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거지요.

영국이나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외국 미디어들은 '인베스티게이티브 저널리즘' (Investigative Journalism), 즉 사건을 철저하게 파고 들어가서 그것을 분석해서 그 결과가 수사 과정에서 반영이 되는 그런 확실하고 전문화된 취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결국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게 현실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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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대사관에서 도움을 받은 부분이 실제로 있는지요. 그리고 대사관에서 무엇을 해 주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대사관의 도움은,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대사관이 전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가족이 현지 영국 실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왔을 때 대사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입장임에도, 여기에 대해 이방인 취급을 했다는 이야깁니다.

제일 먼저 유가족이 대사관에 부탁한 사항은 변호사 선임이었습니다. 만약 사건이 은폐 조작 된 것이라면 변호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주변의 영국인 등이 계속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저희도 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언어나 지리 문제 등은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고, 실질적인 도움, 즉 법률적인 도움을 달라고 청했는데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재 주영대사관은 이런 측면에서는 '먹통'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주한 외국 대사관, 즉 한국 내에 있는 미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필리핀, 에콰도르 등 온갖 나라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그 나라 국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말하자면 법적인 문제에 봉착  했을 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과 함께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에 있는 쟁쟁한 관련 변호사들의 이름, 주소, 인적 사항, 전화번호, 팩스 등 모든 정보가 수록된 것을 보고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러니, 감히 말씀 드리자면 주영대사관은 경운이는 물론 경운이 유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하나도 없었고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파: 대사관 측에서는 초기에 자신들이 변호사를 선임해 줬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까?

이: 전혀 사실무근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거론조차 하기 싫을 지경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각종 증거와 자료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네티즌은 물론 대한민국 법정에서도, 대통령 앞에서든 여왕 앞에서든 저는 떳떳하게, 대한민국 주영 대사관은 제게 변호사를 선임해 주지 않았음은 물론, 변호사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등 어떠한 정보도 알려준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파: 4 년간 영국에 체류하시면서 도와주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압니다. 영국 교민 등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웠던 적은 언제이며 아쉬운 적은 없었습니까.

이: 제가 경운이 사건이 일어난 후 약 7 개월간을 켄터베리에 있었습니다. 일단은 사건이 조작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사건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가능한 모든 자료나 정보를 확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요. 차로 두 시간 반 이상 걸리는 런던 근처 뉴몰든에 한인 사회가 있지만 그 시점에서 거기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곱 달  이상 미행을 당하고 경찰의 각종 수작과 방해 공작, 심지어 경운이 소지품 및  서류를 훔쳐가려고 호텔에까지 잠입을 하는 상황에서 이제 더 이상 켄터베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판단 하에 뉴몰든의 한인 타운으로 오게 된 겁니다.

이후 한인들에게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일부 자료를 공개했으나 일부 한인들은 사건 내용 자체를 파악을 못했고, 심지어 '이런 일은 영국이란 나라에서 일어날 수 없다' 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우리가 사건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는것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한인들 중에는 저희들에 대한 개인적인 험담은 물론 입에 담지 못할 욕까지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망 속에서 영국인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들은 오히려 전혀 태도가 달랐습니다. 경운이 사건의 희생자는 경운이 자신이고, 유가족은 자식이 죽은 이상 당연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거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많은 위로의 말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성당 가는 길에서 거의 쓰러진 저를 간호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영국인은 '켄터베리 일부 영국인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영국인 전체에 대한 나쁜  감정은 갖지 말아달라' 고 당부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기간이 제가 런던으로 옮긴 후 6 개월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좀 힘을 얻은 후, 즉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3 개월이 지나서 다시  한인 사회로 가서 하나하나 길에서 서명운동도 하고 사건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하니 교민들도 조금씩 변하면서 힘을 내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런 과정에서, 그래도 한 핏줄, 한 민족인 대한민국 동포들이 낫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떤 한인 아주머니는 길에서 혼자 서명운동을 하는 제게 빈대떡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는데 그런 고마움은 참으로  잊기 힘듭니다. 성함도 말씀 안 하시고 도망치듯 가신 그 아주머니를 저는 아직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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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개인으로서 이런 일을 끌고 나가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이며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무엇이 계속 버텨 나갈 수 있게 하는가요.

이: 경운이 사건은, 저와 가족에게는 표현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하다 하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상태까지 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제가 직접 경운이의 시신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는, 다시 말해 경운이가 어떻게 다쳤는지 상처 부위 등을 부검 등을 통해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다짐이 있었고, 또 경운이 엄마와 경진이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경운이 엄마와 경진이에게 경운이 시신을 정확히 보여줄 때까지는 절대 물러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경운이 사건의 은폐 조작은 '의혹'이 아니라 이미 명백히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런 만큼 경운이 엄마와 경진이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알 게 모르게 밀어주신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경운이 사건의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합니다. 즉, 진실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밝혀진 진실을 가지고 수많은 분들을 찾아가서 눈물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어야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고, 특히 이번에 딴지일보를 통해 도와주고 계신 많은 네티즌들에 진실을 통해 보답할 때까지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운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났을 때부터 해결되었을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조치할 수 있는 '매뉴얼' 을 만들어 해외 교포들한테 전달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도와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말씀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이영호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 저는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파: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경운군이 장례를 치르고 영면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후의 삶은 사건 이전의 삶과 어떻게 달라질 거라고 보십니까.

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경운이를 데리고 스페인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까지도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기 전에 영국에 계신 교민들이나 영국인 등 관계되는 분들에게 인사를 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경운이의 영면을 위해 성당에서 미사를 정식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시신을 데리고 대한민국에 간 후에는, 아직까지도 경운이가 죽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운이 할머니한테 경운이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목이 메임) 죽었다고, 이제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를 할 겁니다 (한동안 인터뷰가 중단된 채 눈물을 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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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군과 할머니의 즐거웠던 시절. 한국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4 년이 지난 아직도 이 비극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파: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 저는 그거밖에 없습니다. 진실에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고, 어차피 이 사건의 의문은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하나하나에 명쾌한 답을 내려 하지는 마시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봐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세부적인 것들은 앞으로 일이 풀려 나가면서 조금씩 설명이 될 것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경운이 사건을 그냥 해외에서 죽은 유학생 사건이라고 냉정하게 보지 마시고, 한 동포의 죽음으로 생각하시고 사랑을 갖고 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사건은 분명히 해결됩니다. 경운이 자신도 살아서 그 참을성 하나만큼은 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그런 인내심을 갖고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결국은 다 해결될 것입니다.

너무 감사 드립니다.

 

 


자. 이렇게 이경운 군 사건과 관련된 긴 이야기는 일단 막을 내린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란다. 막을 내리는 것은 오로지 국장이 유럽 이야기의 일환으로 연재한 이 3 부작 뿐이다.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 막 해결해 나가기 위한 진정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거다. 관련된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 있는 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기 전에는 이 사건에 끝이란 있을 수 없으며, 경운군의 영면은 물론 이영호씨와 유가족의 휴식 또한 가능하지 않다.

말씀 드렸다시피 본지는 이미 부착된 배너 속의 메뉴들을 통해 기사가 내려간 다음에도  계속 독자 열분들이 사건을 열람하고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 중간중간 굵직한 상황이 벌어지면 즉시 다시 기사화 함으로써 이처럼 많은 관심과 도움을  준 독자 열분들이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났는지' 아실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영호씨는 지금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분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그 의식 수준이 이미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비극 차원을 한참 넘어서고 있음 - 앞의 인터뷰에서 '매뉴얼' 부분 등을 참고하시라 - 을 확인할 수 있다. 4 년 간의 모진 투쟁은 평범한 아버지로 하여금 소수 민족의 인권 문제와 차별에 의한 고통에 새로 눈뜨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현재 (영국) 백인에게 우리 동양인은, 일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한국, 중국,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인 등등은 그저 어딘지도 모르는 지구 동쪽 구석에서 온 후진국민일 뿐이다. 물론 대놓고 차별을 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수백 년 간 쌓여온 인종차별의 관성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라면 경운군 사건 같은 일은 우리 황인종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 이영호씨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이런 영국 백인사회에 대한 큰 경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자존을 높임과 동시에, 향후 영국은 물론 기타 백인사회를 방문하는 우리들의 안전도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일의 실제적인 책임이 어느 선까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건은 이미 지방 소도시 경찰의 사인 조작 사건에서 중앙 정치와 연관된 것으로까지 바뀌어 가고 있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에 따라서는 수백 년 영국 경찰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경질 사태와 내무부  장관의 사과를 받아낸 스티븐 로렌스 건을 능가하는, 영국 역사에 남는 거대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대사관조차 성의 있게 나서주지 않던 사건을 지금 우리들 '평민' 힘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인종차별의 역사, 나아가 영국 역사마저 바꿔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 * *

그러나 국장은 3 회에 걸친 연재의 큰 성과의 보람과 동시에, 한가지 두려움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향후 사건이 더욱 장기화되면서 이영호씨가 다시 얼마 전과 같은 어려운 상태로
돌아가 버릴 가능성이다. 이 사건이 앞으로 얼마나 길게 끌지는 아무도 모르고, 지금 우리가 모은 성금은 아무리 아껴 쓴다 하더라도 몇 개월, 1 년 후에는 다시 거덜이 나고  말 것이다. 다시금 종일 굶은 채, 한때 네티즌들의 도움으로 따듯한 식사를 하고 다니던  시절을 꿈처럼 회상하는 그런 상황만큼은 최대한 막고 싶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성금을 이영호씨에게 모아주는 것은 사실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 기사가 메인에서 내려가고 나면 아무래도 모금은 더 이상 수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천만 원에 달할 각종 부대 비용이나 부검의사 초빙료 등은 다른 데서  어떻게든 구하시더라도, 그 모든 과정들을 치르면서 당분간이나마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기본 의식주만이라도 챙겨 드렸으면 하는 거다.

앞서도 말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힘을 모아 일부 백인들의 잘못된 인종주의에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 뿐더러, 심지어는 우리 민간인들의 힘으로 영국 정부 당국자의  사과를 받아내는 대한민국 외교 역사상 초유의 쾌거가 될지도 모른다. 단지 이를 위해서는 기수가 계속 깃발을 들고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굶주려 쓰러져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럼 다음 시간에 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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