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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성 노이슈반슈타인성의 건축역사와 루드비히2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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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12,667회 작성일 02-03-19 04:52

본문

루드비히 2세
1999/07/24 Access : 516

{img:0 align=left}노이슈반슈타인의 정신적인 뿌리를 찾고 싶은 사람은 일단 그 성옆에 있는 또하나의 성 호헨슈반가우성을 한번 방문해 볼 만 하다. 젊은 황태자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복구한 이 고성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여기서 그는 특히 19세기의 낭만주의 양식의 화려한 벽화들을 통해 이 고성의 과거의 영화를 떠올렸다. 독일의 옛영웅전설들에서 나오는 영웅들은 그렇지 않아도 풍부한 그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면서 그를 자극시켰다. 그가 성장한 이러한 주위환경과 분위기는 평생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후기에 그가 리차드 바그너와 그의 작품에 열광한 것도 이미 여기서 그 싹을 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61.2.2일 15세의 황태자는 처음으로 바그너의 로헨그린이라는 오페라를 보고 깊은 감명을 체험한다. 바그너의 로헨그린과의 만남은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열쇠가 되는 체험이다. 그는 당장 리차드 바그너의 가장 열렬한 숭배자의 한사람이자 후원자가 된다. 리차드 바그너의 예술세계를 체험하면서 그는 이것을 자신이 성장했던 성부근에 또 하나의 성을 세워 보겠다는 어릴적 꿈과 연결시킨다. 1868년 바그너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푈랏계곡의 호헨슈반가우 고성의 잔해위에 진짜배기 옛 독일 기사성의 양식으로 새롭게 성을 세울 뜻이 있으며 그성에서 한번 살아 보면 기쁘겠다. 티롤지방의 멋진 풍경들이 내다보이는 손님방도 많이 지어 그곳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그곳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신성하며 범접을 불허하는 그런 곳, 세계에서 유일할 정도로 신성과 진정한 축복이 활짝 만개한, 신들의 친구들 위한 위엄있는 성전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리차드 바그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을 헌정하고자 한 셈이다. 노이슈반슈타인이 들어선 위치는 천하절경으로서 마치 원래 그런 목적을 위해 예정된 장소처럼 보였다. 세상과 동떨어진, 인간세상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 그는 성스러운 성"Gralsburg"을 짓고자 했다.

{img:1}
1869년 9월 5일 노이슈반슈티인 공사 시작

이 편지를 보내고 그 일년후 1869년 젊은 왕은 이미 새 성 "Hohenschwangau"를 축성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이름 "Neuschwanstein" 은 사실 그가 죽은 후에 비로소 붙여진 이름이다.

건축가 Eduard Riedel이 성의 설계와 지휘를 맞게 되었다. 그의 계획에 따라 무대화가 Christian Jank도 함께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사실상 도저히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었다. 이 설계도의 기초가 되는 밑그림으로는 1867년 7월 왕이 방문했던 Wartburg이 모델이 되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성이 들어설 고지를 부분적으로 약 8미터정도까지 폭파를 시켜야 했다. 또한 설계도도 여러차례 변경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진척되었다.

1872년말에는 성문이 완공되었고 이제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건축자재가 소요되었다. 그러니까 매일 약 시멘트 40 Ztr. 가 들어갔다. 대리석은 부분적으로 잘쯔부르크인근에서 가져왔고(Untersberger Marmor), 사암은 Württemberg지방에서 가져왔다. 이처럼 많이 소요되는 건축자재들을 당시는 Allgäu의 Biessenhofen까지만 기차를 이용해 수송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말과 황소를 이용해 마차로 수송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던가, 놀랍게도 호헨슈반가우까지 와서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화물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성건축장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재간을 보였다.

1874년 루드비히2세는 이미 Linderhof성을 완공해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전건축책임자 Georg Dollmann에게 건축지휘권을 넘겼다.

루드비히 2세는 1876년부터 영원한 절대왕국에 대한 꿈을 표현하게 될 Thronsaal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꿈을 위해 비잔틴 양식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전체적으로 완공된 궁전내부를 여러차례 뜯어 고치면서 1879년부터 Thronsaal을 짓기 시작했다. 왕은 만족하지 못하고 툭하면  계속 변경을 원했기 때문에 건축비는 계속 천문학적인 액수로 증가했다. 이 홀에서 예정된 maurischer Saal은 내각의 인준이 떨어졌음에도 끝내 완공되지 못하고 말았다.

{img:2}
완공된 왕의 침실

왕의 생활공간은 4년반의 공사기간을 소요하면서 드디어 완공이 되었다. Ludwig 2세는 1884.5.27일부터 6월8일까지 처음으로 성에 들어가 살았다. 그해 왕은 Georg Dollmann을 다시 이전부터 작업에 참여했던 Julius Hofmann으로 교체했다. 그후 1885년 다른 방(Kemenate)어갔다.

건축비는 무한정 상승했으며 더이상 왕의 재원으로만 충당할 수 없었다. Kondotation은 1880년경 매년 약 450만마르크가 들어갔다. 내각은 더이상 재원을 인준해주지 않았다. 부채를 지게 될 것은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의 건축열은 마침내 그에게 하나의 천형과 같은 것이 되었다. 1886년 7월 그가 금치산자로 선언되고 폐위를 당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img:3}
1880년 완공되지 않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의 모습

노이슈반슈타인성은 그가 Starnberg 호수가의 Berg성으로 옮겨가야 할 때 마지막으로 살고 있었던 곳이다. 그가 체험한 노이슈반슈타인은 아직도 건축자재더미가 쌓인 건축장이었다.
지금의 관광객들이 보고 즐기는 모습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가 죽은후에 다시 축성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래 설계에 따라 예정된 강력한 주탑과 성예배당은 더 이상 지어지지 않고 포기되어 버렸다.

{img:4}
왕이 의문의 변시체로 발견된 호수에 세워진 추모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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