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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 겨레의 행진가 <아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황성봉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댓글 2건 조회 2,592회 작성일 02-08-15 18:50

본문

겨레( 民族)란, 한 핏줄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한 삶의 터전에서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 정치. 문화. 경제의 생활을 오랜 세월 함께 하여 온 경험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굳게 결속되고, 그러한 토대 위에 민족의식(民族意識)이 형성됨으로써 더욱 굳게 결합된 역사적 의미의 생활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형태의 민족의식은  13세기말 몽고의 침략과 통치를 받았던 고난 가운데에서 형성되었다.
신라의 통일전쟁 이후로부터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겨레의 양심을 마비시켰던 모화주의(慕華主義) 학풍은, 관리를 뽑아 쓰는 <과거제도>에서 시험과목을 지나의 경서로 할만큼 민족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고군의 잔혹한 약탈행위와 수탈통치가 90년간이나 이어지면서 우리 선조들은 비로소  "우리는 누구인가 ?" 하는 물음을 역사를 향하여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물음의 답으로 형성된 민족의식에 의하여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이 암의 <단군세기>가 쓰여졌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편찬되었다.  
13세기 말에 우리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이와 같은 서책이 나온 역사적 배경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외세의 침략과 수탈통치라는 뼈아픈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우리 겨레 고대사의 기록을 풍부하게 갖고있지 못한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제왕운기와 단군세기 그리고 삼국유사는, 우리 한겨레 모두가 한할아버지 한검의 후손이요 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한 핏줄 한겨레인 우리 한겨레(韓民族)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들의 세계지배정략의 희생제물이 되어 남과 북으로 갈린지도 벌써 반세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 동안 7·4 공동성명으로부터 시작하여 200년 6.15 남북정상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의 통일장정을 걸으며 남·북한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정권유지 차원의 줄다리기에 불과할 뿐,  남·북한 정부당국 그 어느 쪽도 겨레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통일의 소망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남북한 정부당국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통일대화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망정, 국제적인 종교모임이나 학술모임 또는 체육행사 등에서 남북한의 사람들은 이제 옛날과 같은 적대적 관계는 아니다.
                    
이러한 남북한 사람들의 만남에서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들은 어김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눈물 젖은 두만강> 그리고 <아리랑>이다.  

한 때에는 남북한 체육관계자들의 모임에서 올림픽에 출전할 남북한 단일 팀이 구성될 경우에 <아리랑>을 나라의 노래로 연주할 것을 합의한 일도 있었다. 또 왠만큼 한국을 안다고 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리랑>을 한겨레의 대표적인 민요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아리랑>은 무엇인가 ?
<아리랑>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
무엇때문에 이 노래는  통일의 노래와 함께 남북한 겨레 모두에게 애창되고 있는가 ?  남북한의 겨레가 만나는 곳에서 마다 이 노래가 불리우는 데에는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서가 우리 겨레 모두에게 공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지 않고 누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유구한 역사를 살아 온 우리의 얼 속에 이어 흐르는 무의식에 가까운 의식을 선험의식(先驗意)이라 하는데, <아리랑>은 이러한 우리 겨레의 선험의식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린 유일한 노래이다.

물이 솟아나는 곳을 일컬어 우리는 "샘(泉)"이라 한다. 이 샘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를 "내 (川)"라고 부른다. 여러 줄기의 "내"가 모여서 큰 물줄기가 되면 이를  "가람 (江)"이라 부르고, "가람"이 힘차게 흘러내려 산야를 지나 들에서 다른 가람들과 만나  더욱 큰 물이 되어  온 들의 생명의 젖줄이 되어 유유히 흐를 때  우리의 선조들은 이를  "아리 (河)"라고 불렀다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의 우리 선조들은  "아리"가 유유하게 흐르는 큰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화스럽게 살았다.  동쪽의 아리 <지금의 압록강으로 옛책에는 청하(靑河), 동압록 (東鴨綠), 열수(列水), 아리수(阿利水)등으로 나온다.> 와  서쪽의 아리<지금의 요하 (遼河)인데, 옛책에는 구려하(句麗河), 서압록(西鴨綠)으로 나온다.>,그리고 북쪽의 아리<지금의 흑룡강으로 옛책에는 흑하(黑河), 아리수(阿利水)로 나온다.> 이렇게 세 아리의 가운데로 크게 펼쳐진 만주들을 삶의 터전으로 하고 살았던 이 시대는, 마치 지나사람들이 요순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듯 우리 겨레가 선험의식 속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복된 이상향의 시대이다.
살육과 약탈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던 BC 200년경의 지나세력의 침공을 피하여 삶의 터전을 한반도로 옮겨야했던 우리의 선조들은 그때부터 이상향을 상징하는 "아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서라벌 사람들은 그들이 옮겨 자리잡은 땅에 흐르는 작은 내를 일컬어 "아리내(謁川)"라 했고, 백제사람들도 남쪽으로 옮겨와서 쌓은 성밑을 돌아흐르는 물을 "아리 <지금 한강으로 옛책에는 욱리하(旭利河)로 나온다.>"라고 불렀다.
<아리랑>에서 "아리"의 뒤에 붙는 "랑"은 "낭"으로서, 낭떠러지라는 요즈음 말의 본디 모습이다. 즉 <아리랑>이란  "아리(河)"가 내려다 보이는 낭떠러지 위의 고갯길을 말한다.
1950년대의 서울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 지금은 없어진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정능으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를 기억할 것이다. 그 고갯길을 올라가노라면 점점 앞이 막히면서 머리 위의 하늘만 보여 답답한 느낌을 주다가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앞이 탁 트이면서 발밑으로 낭떠러지가 있고, 낭떠러지 밑으로 펼쳐진 들판 저 쪽에 소리치며 흐르는 맑은 정능천을 바라보면서 뭔지 모르게 마음이 트이는 느낌을 주던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이러한 지형의 고갯마루를  "아리랑"이라고 불렀던 우리 선조들은 수십 차례에 걸친 외적의 침입이나 불의한 통치자들의 학정이 횡포를 부리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갈 때마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달라"는 사연의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는 자신들이 살고있던 어둡고 답답한 시대로부터 첫선조들이 살았던 아리의 시대와 같은 복되고 평화로운 시대로 넘겨 보내달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아리랑> 노래의 가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정선 아리랑>이다.  정선 아리랑에는 몇 가지의 다른 가사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이 있는 가사는, 고려 말  이성계의 혁명으로 왕씨의 고려왕조가 무너졌을 때, 이성계를 피하여 정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던 일곱 명의 고려유신들이 지어 불렀던 다음의 <아리랑> 가사이다.

  <註:정선에는 이들 일곱 명의 고려유신들이 머물렀음을 알려주는 거칠현동(居七賢洞)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이 가사가 담고있는 의미는 고려왕조의 최후와  이성계가 저지른 두문동 참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비장한 감회와  한(恨)이다. 달리 말해서 이 노래는  이성계의 유혈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왕조 초기의 암울한 시대분위기로부터 우리를 탈출시켜  복되고 평화로운 시대로 넘겨 보내달라는 소망을 담고있는 것이다.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보면 이때까지만해도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 이상향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를 아리랑 고개로 넘겨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미독립만세운동(1919년) 이후 뜻있는 젊은이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로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우리 선조들은 광복된 조국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미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라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사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역사인식의 열매로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가사의 <아리랑>이  1920년대 이후부터 불리우기 시작했고, 1930년대의 천재 나운규는  이러한 <아리랑>의 의미를  주제로 한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온 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아리랑 !  이 노래는  반만년 우리 역사의 한(恨)과  소망이 담긴 노래이며 아울러 이상적인 미래를 향하여 흥겨웁게 나아가는 겨레의 행진가이다. 그저 뜻도 모르고 흥에 겨워 부를 때보다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아리랑>을 부를 때, 우리는 반만년 역사의 무게가 우리 어깨에 실려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엔  별도나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포신문 편집실
추천4

댓글목록

운영자 백림님의 댓글

운영자 백림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오늘 광복절날 이렇게 격에 맞는 글을 올려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귀한 글을 계속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Han in MZ님의 댓글

Han in MZ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강원도 아리랑

지나가다 한개씩 놓고간돌이
돌무더기 되어어서어 길표가 됬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이요
아리아리 고오개에로 넘어가안다.

제가 좋아하는 아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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