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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억과 눈물과의 싸움: 남북이산가족상봉에 대한 taz 기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 이름으로 검색 조회 2,449회 작성일 02-04-26 17:41

본문

기억과 눈물과의 싸움

남북한은 전쟁 후 헤어진 이산가족들을 잠시나마 상봉하도록 하기 위해 새로이 시도한다. 이산가족들의 감정은 요동치고 있는데, 북한측이 이 상봉을 거부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taz 2002.4.26 11면 5단, Sonja Ernst 기명. 번역: 고스라니)

한국 국민 100명과 북한에 살고 있는 이들의 친지들은 이번 일요일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 날부터 이들 한국인들은 북한의 가족들을 상봉하기 위해 금강산을 3일 간 방문하게 된다. 금강산은 폐쇄적인 북한측이 한국인들의 달러를 획득하기 위해 개방한 관광지대이다. 그 후에는 북한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 10월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기) 직전에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9.11 테러 이후 한국측의 비상경계 강화가 (북한의) 주권에 대한 도발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당시 남북한과 북미 간의 대화의지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미국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그 이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켰다.

현재 계획된 4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지난 4월 초 평양을 방문했던 한국의 임동원 특사가 북한측과 합의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1950-1953) 이후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이 살고 있다. 특히 노령층은 생전에 한번만이라도 형제와 부모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전쟁 이래로 이들은 서로 간에 전화나 서신 왕래 등의 연락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만남은 많은 사람에게는 최후의 기회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번 상봉을 위해 선택된 사람의 수는 매우 적다.

"형을 서울에서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당시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루라도 기다림이 연장되는 것은 그만큼 고통이연장되는 것이었다"라고 황종수 씨는 2000년 7월 거의 50년 만에 북한에 살고 있는 형을 포옹했던 당시를 기억한다. 당시 이산가족 상봉에 앞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 간의 평양에서의 역사적인 만남이 선행되었다. 이는 남북 대화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고 1985년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가능케 했다.

63세의 황종수 씨는 서울의 한 수수한 주택에 살고 있다. 그는 (의자도 없이) 방바닥에 앉았다. 작은 방의 여닫이 문은 열려 있고, 마당에는 빨래가 걸려있다. 황종수 씨는 "형의 이름을 TV에서 보던 당시 나는 바로 여기에 앉아있었다"고 말했다. 기쁨과 슬픔, 죄책감과 또 다른 많은 물음들이 그를 엄습했다. 당시 가족을 찾는 200명의 북한인 명단이 발표되었다. "나는 기대도 하지 않고 그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200명의 이름 중 197번째에 '황종태'를 발견했다. 나는 형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라고 황종수 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린다. 황종수 씨는 즉각 적십자사에 전화했고 기억들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황종수 씨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식들은 초등학교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황종수 씨에게는 나이가 6살 더 많은 종태 형이 있었다. 지식욕을 억제할 수 없던 황종태 씨는 서울로 가서 낮에는 노점상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다녔다.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침략한 후 그들 간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전쟁 이후 한반도 분단이 고정된 것이다. 1972년 황종수 씨 가족은 일본 오사카로부터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실종된 형이 쓴 그 편지에는 그가 살아있다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이 편지는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왔다. 이웃사람이 일본을 여행했을 때 황종수 씨의 어머니는 그가 잠깐 오사카를 들를 수 있도록 여비를 내주었다. 그 후 그 이웃사람은 황종태 씨가 잘 지내고 있으며 심지어 냉장고까지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황종수 씨 가족은 생계유지를 위해 힘겹게 일하느라 황종태 씨를 다시 잊어버렸다. 그 후 28년 후에야 그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황종수 씨가 이산가족 상봉 당시를 회상할 때면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워한다. "당시는 두 번째 날이었다. 나와 누이들은 처음으로 형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197번 탁자 앞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선물을 얼마나 많이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형을 위한 선물만 준비해도 되는지, 형수나 형의 자식들도 있는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형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즉각 알아봤고 모두 그저 울기만 했다. 우리는 그를 잊었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북한에서 온 손님들은 모두 각각 "호위대"를 데리고 왔다. 3일째와 4일째에야 비로소 가족들은 자신들만의 시간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간은 통틀어 몇 시간에 불과했다. 황종수 씨는 "어떻게 그 모든 물음과 기억들에 이 몇 시간이 충분할 수 있었겠는가"라면서 머리를 흔든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 저간의 또 다른 진실을 아는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형은 1950년 북한에서는 자유롭게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풍문을 전해 들었다. 그는 (관청에) 자진등록했지만, 거기서 책 대신에 군복을 지급받았고 인민군의 병사가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 후 그는 정보부에서 활동했다. 황종태 씨는 1972년 오사카를 통해 편지를 보내 가족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도록 했다. 그러나 서신 왕래가 계속될 경우 양측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오사카에 살았던 적이 없고, 일본을 방문했던 그 이웃사람은 여비를 횡령했던 것이다.

"작별의 순간은 매우 슬펐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고 서로 강조했다"고 황종수 씨는 전한다. 이제 4일 후면 황종수 씨는 형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형의 주소를 가지고 있지만,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일단 북한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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