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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 재독한국여성모임과 베를린일본여성이니시어티브의 공동세미나 참가기

- 조센징과 쪽발이 여성들의 공동역사정리: 태평양전쟁 시 일본여성들의 역할과 일제치하에서의 조선 „신여성들“의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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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4,848회 작성일 09-11-13 20:20

본문

재독한국 여성모임에서 보내오신 보도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재독한국 여성모임은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1일 3일 에 걸쳐 “조센징과 쪽발이 여성: 공동으로 역사를 정리해본다”라는 주제로 베를린 일본여성이니시아티브와 한자리에 앉았다. 이미 2007년 가을에 그 일부를 다루었던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라는 역사책을 근거해서 지난 일세기를 좌우하는 한일역사를 여성의 측면에서 분석 이해하는 시도였다.

 베를린일본여성이니시어티브의 회원이며 저널리스트인 기요미 이케나가 씨의 한일합방전의 일본 정치상황 설명과 동시에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여성들의 역할”에 대한 첫 번째 발제가 있은 후 뒤따라 재독한국여성모임회원 유 정숙 정치사회학 박사가 “일제치하에서의 조선 „신여성“들의 역할과 현 한국사회� 준 영향”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전 독일에서 참가한 한국여성들은 물론이고 베를린에 사는 일본여성이니시아티브의 회원들은 이 도전적인 역사적인 테마를 주제로 한 이 세미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밤잠을 설쳤다고도 한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이미 지나간 시간이 인간의 많은 희비극을 보따리에 싸서 안고 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기에 뒤 따라 가서 그 보따리를 빼앗아 다시 열어서 일일이 잘못 된 것을 수정할 수가 없다. 그럴 수가 없기에 역사는 왜곡되고 허위보도도 되고 덮어 버림으로써 잊으려고 애쓴다. 그 예로 일본은 아직도 학교교과서를 통해 그들 후세들에게 허위전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가 남기고 간 자취는 알게 모르게 인간사회의 곳곳에 숨어들어가 생각의 원천과 가치관의 기본이 되는가 하면 생활관습이 되고 정치문화의 근거가 된다. 특히 그것들이 다음세대의 교육의 기초가 된다면 한 국가의 피해는 상상해 볼 만하다.

이미 60세 전후에 도달한 재독 한일 여성들이 많은 주제들을 두고 이 주제에 도전한 것은 이 세미나를 통해;


-  역사를 통해 짊어지게 된 오래된 짐을 벗고

-  일본제국주의에서 물려 받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  이런 과정을 통하여 두 여성 단체가 깊은 유대를 맺고 서로 연대하면서

- 오늘의 일본사회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일들을 바로 보면서 자각된 여성으로서 사회에 참여하며 시정하는 용감한 여성들이 되자는 데 있었다. 이러한 시간을 같이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20년 이상 재독한일여성들의 정치적 연대, 특히 일제치하에서 있었던 정신대의 역사적 정리를 위한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기요미 이케나가 씨는 일본작가 요시코 시마다 여사의 „Kinder, Kueche, Krieg (자녀, 부엌, 전쟁)“ 이라는 슬로건 하에1993년에 발표한 작품을 발제의 시작으로 하였다. 한 공간에 진열된 옷걸이에 걸린 Kappogi(앞치마)를 당시 일본여성들이 겪은 전쟁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기모노가 아닌 작업복인 앞치마의 피 묻은 끈이 아래로 처져 내리고 있는데 그 끝에 권총이 매달려 있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당시 일본여성들의 책임을 주제로 했고 “앞치마에 피 묻은 끈은 탯줄이며 그 탯줄 끝에 살인도구 권총이 매달려 있다”고 설명되었다.

일본천황에 충성하고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일본의 모든 여자들 에게 요구했으며, 천황은 일곱 명의 첩을 두어 그들로부터 15명의 후손을 가졌는데 황후 이치조 하루코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했으나 공식적인 인물이었기에 아들을 많이 낳아 황실에 충성하며 일본이 전쟁에 이겨야 한다고 선동했다고 한다. 

위의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알리는 한 예로 남편을 전쟁에 내보낸 젊은 여성이 자살을 했는데 그것은 자기가 살아 있음으로써 젊은 아내생각 때문에 남편이 전쟁에 집중 할 수 없다는 충성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 일은 그 당시 온 일본 메스컴을 통해 모범여성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후에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의 일본 식민지 슬로건에서 본 따  “현모양처“를 주장했다.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일본 젊은 여성들은 살아 돌아오라는 부적으로 천 명의 여성들이 각각 한 번의 땀을 뜬 수를 놓아 배에 감는 띠를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다. 남편은 그 배 띠를 감고 전쟁터로 갔는데 한번 이 띠를 감으면 병사 하는 날 까지 배에 감고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득실거리는 이의 보금자리가 되어 잘 먹지도 못하고 싸우는 군인들에게 괴로움을 부가시켰다고 한다. 1932년 40명의 여성들이 이 전쟁을 후원하고 보조하는 의도를 가진 여성단체가 생기고 5년 후 1937년에는 사백 육십만 명의숫자에 이르렀다가 한국, 타이완 등의 식민인 이웃나라 여성들까지 포함되어 1945 년 해체 될 무렵에는 이천만에 이르는 여성이 여기에 가입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많은 여성들이 특히 식민지 나라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하여 자식과 남편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협력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여성들은 당시 최고학부과정을 받은 신 여성으로 표면에 나타나 일본 군부의 우두머리와 동맹했다.

우리나라 여성 최고학부 이화학당의 첫 총장인 김 활란 씨가 그 대표적인 인물 이었다.
두 번째 유 정숙 씨의 강연은 1927년에 민족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 여성을 총 망라하여 거국적인 조직을 꾸려보고자 시도한 „근우회“의 사진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1868 년에 일본 정부는 “내국식민지“란 말을 썼고 내국은 일본을 의미 했고 식민지는 저변국가, 즉 한반도를 말함으로써 이 시간 이후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계산에 넣고 있었다.

일본을 말하는 “내국“은 „내지”로도 식민지 여성들이 표현하였는데 특히 김 활란은 후에 “일본의 어머니“란 뜻에서 “내지의 어머니들” 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때는 이미 한국에 징병제 실시가 시작된 후이다. 새 가족제도와 호적제도가 실시되어 남자는 호주가 되어 징병과 세금납부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여자는 현모양처로 가장인 남편을 보조해야 한다는 것이 식민지인 한국에도 이전되었다. 친일파 김 활란 씨는 그녀의 글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를 통해 이렇게 전쟁에 협력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이제 우리 도 국민으로 서의 최대 책임을 다 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 함으로 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르게 된 것이다 (신세대 1942년 12월)“.

1885년 조선은 외부로 문을 열었다. 많은 여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여성 교육이 시작 되었다. 이 역사적인 계기는 딸들을 여학교에 보내어 지식여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열광적인 교육열에 발동을 걸었고 이로 인해 근대 지식여성들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부합되어 남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886 년 이화 학당이 생겨 후에 이화여자 대학교로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근대지식여성들은 여성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단체들은 그 이념에 따라 천부인권사상기초와 남녀평등 여학교 설립운동을 통한 여권운동, 축첩반대운동, 민주주의적 여성으로 자강론을 주장했다. 서구화는 일본화라는 모토 하에 일본화를 지지하는 여성단체에 저항하는 운동이 생겼으며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대한애국 부인회 (1919)“가 있었고, 종교를 바탕으로 한 천도교여성회 (1924),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 조선여성동우회 (1924), 근우회 (1927) 등이 있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유 관순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 선 여성들이 태어나고 사회주의사상을 설파하는 주 세죽, 김 조이 씨 등이 있었고 친일파 여성으로는 모 윤숙, 노 천명, 김 활란 등 또한 많은 교육계 여성들이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 중 친일파 여성들이 해방 후에 건국의 기회를 타고 신여성교육과 사회, 문화의 시작과 발전에 발을 디딤으로써 그날부터 대한민국은 일제시대와 전쟁의 잔재를 끌어안고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물로는 현모양처, 한국의 높은 교육열, 기독교의 역할, 몸뻬들을 들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생략). 1966년 진명여중 시절에 교복으로 몸뻬를 입은 친구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과 2005년 서울 이화여자 대학교에 서 있는 김 활란 초대총장 동상 앞에서 김 활란 의 동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유 관순의 동상을 세우자고 데모하는 학생들의 사진으로 막을 내렸다.

며칠 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4.389명의 친일인명록사전을 드디어 출판할 수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국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다. 물론 거의가 남성들이나 적지 않은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여성들은 한국사회의 교육 전반에 걸쳐 또한 한국 정치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현재 남한은 통계적으로 세계7대 경제 (공업) 강대국에 들어가며 세계최고의 교육수준에 도달했다 한다. 그런가 하면 세계 일위의 자살국가가 되었고, 출생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음에도  (독일보다 더 낮다고 함) 외국입양아가 없어지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이러한 부조리현상을 여성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인구의 반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애가 점점 줄어가는 대한민국사회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한 여기서 지적하고 싶다.

강연에 따른 토론이 끝나자 곧 조센징과 쪽발이가 한복과 기모노를 바꾸어 입고 의상 쇼를 했다. 조센징은 쪽발이에게서 일본노래와 춤을 배웠고 쪽발이는 조센징으로부터 한국노래를 배웠다. 새로운 출발의 시도였다. 언젠가는 다 같이 한국과 일본으로 여행했으면 좋겠단다. 저녁식사는 한일합작의 뷔페로 진수성찬을 즐겼다.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은 새로이 결혼한 두 재독한국여성모임회원의 축하잔치로 시작했고, 끝나는 3일째 되는 일요일은 제 31차 총회와 새 사업계획을 의논하는 회의로 막을 내렸다.  안 차조총무의 참석자들과 두 강사에 대한 사의의 표현과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로 끝을 내었다.


류  현옥 (재독한국여성모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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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유미님의 댓글

유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름다운 마음과 정확한 사고의  한국여성과 일본여성들의 만남이었던것 같습니다.
 섬뜩하면서도 맘이 훈훈해지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김활란여사, 유관순언니...
기모노도 한복못지않게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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