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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대 할머니 스위스 방문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swis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697회 작성일 05-06-10 05:00

본문

제 2차 세계 대전 종전 6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정신대 대책 협의회와 양대 노총 후원으로 정신대 희생자 할머니 한 분이 2005년 6월 3일 스위스 베른에 방문하였다. 이 분은 일본측의 공식 사과 요구 및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입장 표명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성명서로 전달하고, 정신대 문제를 강제노동 규약 위반으로 91차 제네바 ILO 총회에 안건으로 채택되어 다루어 줄 것을 촉구할 목적으로 오셨다. 다음의 내용은 발표회 순서와 내용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일시: 6월 3일(금) 14:15~16시 장소: 베른대학(Hochschulstrasse 4) 115호 인사의 말씀 : Mission 21 대표 한국 소개 : 정미현 할머니 증언 정대협 안내와 경과보고 : 윤미향 질의 응답 기자 인터뷰 * 한국역사 소개 1910년 : 한일병합조약 체결, 일제식민지 시대 시작 1919년 : 2.8일 독립선언, 3.1 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일본의 문화정치 시작 1923년 : 관동 조선인 대학살 (6천명 살해) 1935~1945년 : 제 2차 세계 대전 1941년 : 일본군의 펄하버 침략으로 태평양 전쟁 1945년 6월 8일. :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 1945년 8월 10일: 나가사키 폭탄 투하 1945년 8월 10일 : 일본 항복 1945년 8월 15일 : 광복, 건국준비위원회 발족, 미•소 군정 시작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1공화국)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은 일본이 침략 행위를 시작 한 것은 잊고 원자폭탄 피해자라는 인식만 갖고 있다. 여러 아시아 여자들이 위안부로 있었으나 한국 여자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모집하기가 쉬웠다. 일본 정부에서는 아직도 서류를 공개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나, 전쟁 당시 한 위안부가 상대를 해야 했던 군인 수로 추측할 때에 위안부로 한국에서 약 20만 명 정도가 모집 되어 간 것으로 추측되고 나이는 11살에서 28살이었고 1년에서 14년간 (1931년부터 1945년까지) 강압아래 성 노예로 종사해야 했다고 한다. 평일에는 5~30명까지, 주말에는 40~50명까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인 한국 여자들이 군인들의 화장실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잠자리 공간은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다다미 였고 이렇게 혹사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식사로 주먹밥과 단무지 뿐이 공급되어졌다고 한다. 어떤 여자 아이는 다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가 너무 많은 남자를 상대를 하여 기절을 하면 마약 주사를 놓아 주었다고 한다. 주말에는 4~5대의 마약을 맞았고 해방 이후에도 그들은 마약 중독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위안부를 모집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였다고 한다. 취직을 시켜준다고 하기도 했고, 일정 나이의 여자들은 방앗간으로 모이라고 하고 몸무게를 달아 무게가 나가는 여자들은 트럭에 실고 갔다고 한다. 어떤 딸은 어머니의 보는 앞에서 끌려갔다고 한다. 이들은 여러 방법으로 동원 된 여자들을 일정 장소에 집합 시켜놓고 지시를 기다렸다고 한다. 조직적으로 위의 기관의 통제를 받아서 기차와 군용 차를 이용하여 군대 있는 곳으로 수송을 했다고 한다. 첫날은 일본 장교들의 여자로 일을 해야 했고 그 후에 사병들의 차례가 왔다고 한다. * 정대협 (The Koreans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윤미향 씨의 보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990년 6월에는 일본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을 때에 이것은 민간 업체가 주선한 문제이고 정부는 상관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일본 학자들이 정부가 허락했다는 관계 서류를 발견. 1937년 당시 조선 여성의 성병을 검사하는 책임자였던 군의관의 일지를 발견하였으며, 일지 내용에 의하면 한국 여성들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군인들을 위한 하사품이었고 “위안부는 공중화장실”이라고 쓰여짐. 한국과 일본 여성들의 위안부 문제를 밝히는 활동이 적극적으로 추진 되기 시작했다. 1992년 일본 정부의 첫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군이 개입을 했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었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왔었다.” 라고 발표를 함. 그 이후에 강제성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오고 일본 군이 개입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강제성을 뜻한다는 것을 밝힘. 1993년 일본정부가 강제성을 인정하였으나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그리고 보도상으로도 사과가 없었다. 1995년 일본에서 아시아 여성을 위한 기금을 마련. 도의적 책임하에 위로금 모금. 이에 여성단체는 위안부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강제성 인정과 사실을 시인하는 사과로 정신적으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요구. 1997년도 일본 교과서에는 위안부 문제를 언급했으나 2002년도 교과서에는 이 사실을 아예 삭제하였다. 그리고 아시아를 서구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한 전쟁을 하였다고 주장을 한다. 일본 내에도 여러 NGO 단체들이 위안부 문제를 바로 보자고 한다. 일본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 정식 사과하도록 시도를 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정식으로 주소를 알리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서 협박하는 압력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기관이 있고 1992년부터 남한과 함께 협력하고 있음. 해방이 되어도 남들은 즐거워 하는데 혹시 위안부로 일 한 것이 알려질 까봐 숨어서 살고, 노래도 춤도 마음껏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이 노인들을 위하여 “쉼터”를 만들어 정신적 치료와 위로를 주는 장소를 마련하였음. 이들은 그 공간에서 만이라도 그림 그리기, 노래하기, 춤추기... 등 으로 마음껏 즐기며 동료의식으로 위로와 치료를 받고 있으며 정대협 활동가들과 연대의식을 가지며 서서히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의성을 위한 시위를 벌리고 있다고 한다. 정대협이 위안부들의 주소를 찾아 나섰을 때에는 약 215명의 생존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118명만 생존해 있고 연령은 78세~92세라고 한다. 그래 시각을 재촉하는 문제이다. 몇 분의 살아 계신 분들에게라도 빼앗긴 꽃다운 청춘과 전 인생에 대한 정신적 배상을 받아 드릴 때이다. * 스위스에 오신 할머니의 증언 저는 13살에 아버지가 빚을 많이 지어 감옥에 가게 되어 취직을 시켜 준다는 소리를 듣고 돈을 벌려고 역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군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남자들을 많이 상대를 하니까 병이 났는데 낳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깨어보니 난소를 두 군데 다 제거한 병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후에도 후유증이 커서 계속 열이 나고 아팠으며 결국은 한국으로 보내졌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먹고 살 수가 없어 군이 부대 안에 들어가서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만주로 끌려갔습니다. 해방을 맞고 모두들 좋다고 하는데 저는 살길도 막막하고 남들이 내 정체를 알까 봐 두려워 하며 살았습니다. 인천에서 행상 노릇을 하며 고아를 하나 키웠습니다. 그 아이를 의지하며 희망으로 삼고 살 수 있었으나 두 입에 풀칠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아들이 자라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 인천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그 아들도 어머니의 뒤를 따르겠다고 고아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호소 합니다. 저는 아이도 못 나아본 병신입니다. 제 모든 청춘을 빼앗겼습니다. 일본의 돈을 다 준다고 해도 보상이 안 됩니다. 이 억울함과 일본의 이런 야비성을 전 세계에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할머니, 이렇게 오셔서 증언을 하시면서 잊고 싶었던 과거를 다시 떠 올리게 된 것에 미안함과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할머님의 수고가 돌아가신 분들에게 칭찬 받을 일이라는 것으로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며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 드리고 헤어졌다. 약소국의 슬픔이 과연 이 할머니들 문제 뿐이랴? 나라 잃었던 서러움도 감당하기 힘든데 강제로 위안부, 노무자, 학도 의용대로 끌려가 고난 당하고 죽은 선열들을 볼 뵐 낯이 없다. 어언 해방 60년을 맞았는데 해방 이후 우리는 과연 자주적 정권이 들어서 있는지 그리고 현 정부와 국회는 진정한 자주성을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남북 통일을 위하여 하나가 되려고 과연 최선을 하고 있는지... 등 질문이 자꾸 꼬리를 물고 생긴다. 작성: 이명숙-Traber 출처: 스위스 한인연합회 (www.swisskorea.com) [이 게시물은 베리공동관리자님에 의해 2005-06-10 09:40:11 자유투고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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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kim님의 댓글

mirakim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내가 사는 도시에도 정신대 할머니가 한 분 사신다.
지난 설명절에는 떡국을 같이 먹었지만, 그 할머니를 뵐때마다
마음이 산란하여 잘 가게 되지 않아서 가끔 전화를 드리고 하는데,
오늘은 꼭 할머니를 한 번 찾아뵈어야 겠다.
꽃다운 나이에 수년 아니 십수년 동안이나 그 못된 짓을 강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있는 자의 사과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니...
죽어서도 그 분함을 삭일 수가 있을까?...
일본은 분명 범죄자의 집단임에 틀림없다. 그들을 응징하려면 우리도
힘을 길러서 세계무대에서 그 악랄한 일본의 전범자들을 샅샅이 알려야
한다.
늦게나마 정신대 할머니 문제를 세상에 알려서 먼저 가신 많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게 해주신 할머니께 감사드리면서, 이제 남은 일은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나서서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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