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Home > 새아리 목록

독일 한 독일인 카메라맨과 광주

페이지 정보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05-22 02:22 조회3,108

본문

 Seoul (dpa) - Jürgen Hinzpeter가 부인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의 한국방문은 환영과 수상 그리고 인터뷰 등으로 채워졌다. 많은 한국인들은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NDR방송언론인이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으로 중요한 비극적인 사건을 필름에 담았던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의 민중봉기는 계엄상황하에서 적나라한 폭력과 함께 유혈진압되었다.

그때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자신의 최근세사에서 가장 어두운 한 장을 추모한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의 봉기는 정치적으로 한 전환점이 되었고 민주화운동의 한 상징이 되었다. 당시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2백명정도, 비공식적으로 2천여명으로 추산된다.

힌츠페터에게 광주항쟁은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이력에 핵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소요가 있다는 보도가 나자 자신의 지국이 있는 동경에서 서울로 향했다. 그는 5월 20일 자동차를 몰고 처음으로 봉쇄된 도로를 뚫고 광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군인들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들은 시내로 진입할 예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광주에 들어가자 "민중들과 학생들은 외국인이 왔다고 기뻐하고 환호했다."

그는 즉각 광주항쟁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사태가 너무나 엄중하고 비극적이라  찍은 그대로 즉각 송출해야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찍은 필름은 "당시 세계로 송출된 유일한 화면"이었다.

그는 특히 한줄로 결박당한 시체들을 촬영했다. 한때 의학을 공부한 그는 "머리에 중상을 입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이들"을 발견하고  이것이 의도적인 사살임을 확신한다.

그는 또한 필름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이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음날 이 위험한 필름을 숨겨 손짐으로 들고 해외로 빼내는데 성공했다. 같은 날 독일 공영방송의 간판뉴스프로그램 타게스샤우는 광주항쟁에 관한 첫 화면을 내보낼 수 있었다.

힌츠페터가 위르겐 베르트람이라는 언론인의 도움을 받아 자료화면을 편집해 다큐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9월 17일 야당지도자이자 후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계기로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이제 25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보도의 댓가로 힌츠페터는 한국의 카메라영상언론인협회로부터 "이달의 명예카메라리포터"상을 수상했다.그는 이미 2년전에는 송근호 언론인상을 받았다. "그의 보도는 한국 현대사의 소중한 증언"이라는 것이 수상의 변이었다.

 

추천 3
베를린리포트
목록

댓글목록

Home > 새아리 목록

게시물 검색


약관 | 사용규칙 | 계좌
메뉴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