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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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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18 20:36 조회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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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수속의 진행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오복과 몇 차례 국제전화를 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식구들이 도착하면 살림을 차릴 방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한 나날이 지나가고 있는 어느 날 밤, 마악 잠자리에 들려는데 집 앞에 차 멎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성주를 불렀다.
한형! 문 좀 열어봐, 큰일 났어!“
?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서 현관문을 여니 겔센키르헨 출신의 연수생인 이강일과 오버하우젠 출신의 전명훈이 들이닥쳤다.
빨리 텔레비전 좀 켜 봐. 박 대통령이 피살당했다고 뉴스마다 난리야.“
뭐어?“
성주는 부리나케 텔레비전을 켰다. 보쿰교회의 태오가 천연색 텔레비전을 사는 바람에 성주 차지가 된 십사 인치 흑백텔레비전을 가져다 놓기는 했지만, 빠듯한 시간에 공부하랴 뭐하랴 하다 보면 켜지 않는 날이 더 많았고, 이날도 식구들 맞이할 준비를 이것저것 하느라고 텔레비전을 아예 켜지도 않았기 때문에 성주는 감감하게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마감뉴스 첫 순서로,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 측근의 저격으로 사망”이라는 자막과 함께, 이날 낮 박 대통령이 삽교호 방조제 준공식에서 테이프를 끊는 사진과 함께, 준공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박 대통령이 측근들과의 만찬석 상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면서, 저격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아니, 왜 저격자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야? 측근이라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성격이 불같은 강일이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누구긴 누구야,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정부장, 뭐 그런 사람들이겠지. 삽교호 준공식에 다녀왔으니까 건설부장관도 동석했을까?“
전명훈이 손가락을 꼽으며 대통령 측근의 직위와 이름을 들먹였다.
그럼 그중에 한 사람이란 말이지.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개네들 모두가 박통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충복 중의 충복 아니야?“
성주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섣부른 추측을 할 수 없으리만치 중대한 사건이었고, 권력 내부에서 일어난 저격사건인 만큼 여러 가지로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혀 있으리라고 짐작됐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남의 집 좁은 셋방에서 늘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한형이 텔레비전 보고 뭣 좀 짐작하는 게 있는가 해서 왔더니, 아예 텔레비전도 안 보고 있었구만, , 이형, 밤도 늦었는데 그만 가서 자자구. 내일 아침이면 자세한 내용이 나오겠지.“
명훈이 재촉하여 강일과 함께 돌아간 뒤, 성주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 분명하지만, 사태가 복잡해지면 계엄령이 장기화하고, 그렇게 되면 오복과 아이들이 당분간 출국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튿날 아침, 연수원에 가니 모두 삼삼오오 모여 서서 웅성거리느라고 아예 일손을 놓고 있었다. 교장을 비롯한 교사와 조교들도 충격적인 소식에 놀랐는지 연수생들을 재촉하지 못하고 멀리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연수원장한테 지멘스 통근버스 한 대 내어달라고 해서, 대사관에 조문을 갔다 오자. 빈소는 차려 놓았을 거 아냐. 가서 대사관 동태도 보고 이것저것 좀 물어보자구.“ 하고 제안을 했다. 모두가 좋다고 찬성하여 연수원장에게 말했더니, 쾌히 승락하고, 얼마 안되어 버스 한 대가 연수원 정문 앞에 도착했다.

대사관에는 조촐한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연락도 없이 버스로 들이닥친 삼십여 명의 단체조문행렬에 당황한 듯 한참이나 우왕좌왕하더니 박 대통령의 영정이 나지막하게 걸려 있는 빈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연수생을 대표하여 채덕겸 조교가 연수생들의 합자로 마련한 흰 국화 화환을 영정 앞에 세워 놓고, 향로에 향을 사른 후 모두 함께 긴 묵념을 한 다음 빈소 밖으로 나와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본부에서도 비상대기 명령만 전문으로 왔을 뿐, 사건 내용에 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의 외신에 의하면, 김재규 중정부장이 총을 쏘았다고 하는데, 김 부장이 직접 대통령을 저격했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그래서 공관에서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중입니다.“
넋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공관직원들을 붙잡고 더 물어보아야 나올 것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 연수생들은 되짚어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성주는 집으로 오는 길에 이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이 박사는 마침 집에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성주는 대사관에 갔던 이야기를 전하며, 대사관에서도 대통령 피살 정국의 실세가 누구인지 몰라서 눈치를 보며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느낀 대로 말해주었다.
이 판국에 실세라니?“
이 박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김재규가 총을 쏘았다는데, 아직 체포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김재규가 군부를 지휘하는 실세로 등장할 것인지, 김재규가 체포되고 다른 군부 실세가 등장할 것인지, 둘 중의 하나인데, 지금으로서는 오리무중이란 말입니다. 어느 영사가 가만히 그러더라구. 사실은 자기네들도 빈소를 차려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망설였다고---.그런데 미국 측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혹시 아는 것 없습니까?“
미국은 또 왜? 전혀 신경 안 써서 모르겠는데.“
김재규가 저격했다는 게 자꾸 미국 CIA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즘 들어서 박통이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잖아요. CIA의 청와대 도청 사건도 그렇고, 카터가 한국에 와서도 박통 만나기 전에 오산 미 공군 기지와 전방 미군기지부터 둘러본 것만 해도 뭔가 낌새가 이상했었는데, 혹시 핵을 개발해서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박통을 좀 더 고분고분한 친구로 교체하려는 미국측의 음모가 아닌가 해서---.“
에이, 비약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설마 그렇게까지야?“
CIA가 남의 나라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국가원수를 간접적으로 제거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라야 이런 생각을 안 하지.“
그래도 그건 아닐 거야.“
아무튼, 미국 측 동향을 좀 알아보시고 내일 또 통화합시다.“
성주는 전화를 끊고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텔레비전을 켜 놓고 뉴스를 지켜보다가 문득 “내가 무슨 정치가나 된다고 이런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나?“하고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어 실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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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ie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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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9년 이군요.  정말 긴장됩니다.
특히 당시 독일에 사시던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저는 주로 책으로만 알기 때문에
한겨레님 글은 제겐 또 다른 큰 정신의 양식입니다


숲에서놀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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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사르다"라고 하는군요. 저는 나지라기를 읽으며 국어 공부도 하거든요. 그것말고 따로 적어놓은 표현도 많은데, 그걸 보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거쳐 나온 글인지 감히 짐작해 봅니다.

아.. 저는 저때 아직 초등학생이었어요. 동네 아이들이랑 집에서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저 소식을 듣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네요. 곁에 있던 아이들도 울먹울먹했더랬죠. 그때 그 꼬마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지..^^


한겨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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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잊혀져가는 우리 말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래 친구들의 별명을 "솔봉이, 까투리, 떡부엉이"등의 순 우리말로 지어 불렀던 초등학생 때의 기억을 되살려써 보았더니 어색하지 않고 감칠 맛이 나더라구요.
"애옥살이-뜨께부부-고살래-광저기" 등등은 신기철 형제분이 편찬한 <새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냈습니다. 앞으로도 아름다운 순 우리말이 심심찮게 나올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숲에서놀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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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멜무지, 숫되기만 한, 숫저운 미소, 솔봉이 티, 서털구털, 애옥살이 물, 흐리마리, 얽벅얽벅.. 이게 다 한 회에서만 찾아낸 보물이에요. 새삼 한국말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안 쓰는 표현도 꽤 되지만, 뭘 알아야 쓸 수 있잖아요.

말뜻이야 혼자 찾아볼 수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 찾아보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거든요. 그런 뜻에서 나지라기는 귀한 '용례사전'을 대신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ImNebel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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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초보 회원입니다.이게 첫글이구요,전 오래전부터 눈팅을 해온지라 한겨레님이나 노엘리님...님등등을 가끔 잘 아는 사이로 착각을 한다는,79년이면 제가 독일에서 학업을 시작한 해군요.나이는 한겨레님보다 아주 아주 훨씬 적지만,어느날 수줍어 학교 한구석에서 강의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당시에만 해도 대다수 독일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도데체 어디있는줄도 모르는 수준이었는데 저에게 관심 가져준 몇 독일학생들이 몰려와 너네 대통령 살해됐다면서 하더라구요.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저는 살인사건이라는 말에 마음과 몸이 덜컹 했구요,한국사람들은 어떤사람은 잘됐어 어떤사람은 아이고 어쩌나 느낌은 반 반 같았습니다.한겨레님,전 이이야기를 읽으면서 왠지 그리웠던 그때 그당시의 생활  모두들 가난했지만 김치찌게 하나만 놓고도 서로 함께 둘러앉아 사이좋게 정을 나눌수 있었던 시절 그옛날 추억들을 되새기는것이 참 좋습니다.자꾸 기다려집니다.감사합니다.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반갑습니다. 79년에 독일에서 학업을 시작하셨다니 마치 옛 벗을 만난 듯한 반가움이 앞섭니다.
79~80년 그 격동의 시기에 분노와 눈물과 한탄을 함께 했던 보쿰대학의 유학생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릅니다. 우린 그때 그럴듯한 레스트랑가서 밥 사먹을 여유도 없이 참 가난했지만, 학생 기숙사에서 Waffel 구워먹으며 서로를 격려했지요.  지금은 거의 모두 중견 교수로서 강단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마음 든든합니다. 님께서도 강단에서 활동하고 계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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