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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986회 작성일 12-12-15 22:11

본문

 
일요일 오후 늦게 이 박사 내외가 예배를 마치고 왔다며, 장 목사 내외와 열 명 가까운 교인들과 함께 와 문병을 하며 빠른 치유를 기원하는 간단한 기도회를 가진뒤 돌아갔다. 교인들이 다 돌아간 뒤 남은 태영과 성규는 의논할 일이 있다고 성주를 바퀴 달린 의자에 태워 휴게실로 밀고 갔다.
, 오늘 교회 총회가 열렸는데, 노동부가 새로 생기고, 내가 노동부장이 됐어.“
성규의 들뜬 말에 성주가 의아해서 물었다.
교회에 노동부장이라니? 교회에 그런 직제도 있나?“
그러게 새로 생겼다구 했잖아. 예배부, 선교부, 회계부, 문화부, 봉사부, 성가대, 여신도회가 있었는데, 이번에 노동부가 새로 생겼지.“
아니? 그럼, 당회도 없고 제직회도 없이 그런 부서만 있단 말이야?“
성주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태영이 나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게 말이야, 여기 한인교회들은 대부분 한국인 목회자가 세운 교회가 아니라, 목회자 없이 교인들이 스스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자생한 교회거든. 목회자가 없었으니까 일반 친목단체 마냥 총무부장, 회계부장, 예배부장, 봉사부장 하면서 일을 분담해 오다가, 나중에서야 장 목사님이 담임목회자로 오셨지만, 주말에 예배 인도하러 다녀야 할 교회만도 열 군데가 다 되니, 교회 직제 같은 건 염두에 둘 겨를이 없었던 거야. 또 교인들 대부분이 삼 년 계약 끝나면 귀국해야 할 사람들이니 굳이 집사, 장로 세워서 당회 조직할 필요도 없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도 각 부서장이 모여서 제직회의를 대신했고, 일 년에 한 번씩 교우 전체가 모여 공동의회 대신 총회를 열었고, 당회는 장로가 없으니 당연히 없고, 그 대신 장 목사님이 예배 인도하는 여덟 지역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지역교회 대표자 회의’를 열어서 중요한 연합 안건과 연중행사를 계획하고 협의하는 실정이야. 교회의 창설 과정이 다르고, 교우들조차 삼 년에 한 번씩 절반 이상이 바뀌니까 한국교회처럼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그럴 수밖에 없겠군. 그럼 노동부가 하는 일은 뭐야?“
성주는 당회와 제직회가 없을 수밖에 없는 한인교회의 현실을 이해했다는 얼굴빛으로 성규에게 물었다.
교우 절반 이상이 노동자니까,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를테면 해고를 당한다거나 고용주 측과 분쟁이 생겼을 때, 이를 이 박사의 사회상담실에 빨리 알리고, 그 처리를 돕는 게 주 임무인데, 난 이참에 노동자의 의식화 운동을 시작해보고 싶어.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도 하고 싶고, 그래서 한형의 도움을 청하려구 아제와 함께 찾아왔는데---.“
내가 도울 일이 뭐가 있는데?“
우선은 내년 삼월 근로자의 날에 교회에서 ‘근로자의 날 예배’를 드리고 2부 순서로 노동자의 의식을 일깨우는 연극을 하고 싶어서.“
연극이라?“
지난번 연극 보고 우리 교회 총각 처녀들이 자기들도 출연하는 연극 한번 하자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내년 삼월이면 앞으로 다섯 달이 채 안 남았거든, 연습하고 준비하자면 지금쯤 각본이 나와야 할 것 같아서, 형이 병원에 있을 때 각본을 좀 써 달라구 부탁하러 왔지.“
어째 말하는 뽄새가 나 병원에 입원하기를 기다린 사람 같어.“
에이 설마, 하여튼 미안해유. 아픈 사람한테 이런 부탁을 혀서.“
알았어. 좋은 일이니까 한 번 해보지.“
어느 경전이었던가,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붙잡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성주는 성하지 못한 몸인 것을 잊고 각본 쓰기를 응낙하고 말았다.
태영과 성규가 좋아라 하면서 돌아간 텅 빈 병실에 누워서 성주는 연극의 얼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우선 소재는 캐나다에 있는 김재준 목사가 이끄는 ‘민주동지회’에서 발행하는 <제삼일>에 얼마 전 소개된 청계피복노동조합원들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으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모두의 어머니로 모신 피복노동자들이 그들의 배움터인 노동교실을 폐쇄하려는 당국의 폭압에 항거하며 농성시위를 하다가 모두 체포 구금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이었다.
성주는 이 사건을 간단명료하게 보여 주면서, 칠흑처럼 어두운 어린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바로 보라고 자신의 몸을 불태워 횃불을 밝힌 전태일의 뜻을 자연스럽게 알리는 데에 주안점을 두기로 작정하고 침대에 앉아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남녀 다섯 명의 피복공장 노동자들이 청계천 평화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통금 직전의 막차를 기다리며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재단보조공으로 일을 마치고도 집에 가지 못하고 재단대위에서 잠을 자 가며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던 전태일의 이야기와 그 뜻을 이어가는 여공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어째서 우리는 날마다 막차만 타야 하나?“하는 막내 여공의 탄식과 함께 첫 막을 마무리했다.
둘째 막은, 경찰 병력에 의해 봉쇄된 노동교실에서 들려나오는 ‘노동교실 사수 결사선언’에 이어 농성노동자들이 피 터지게 부르는 ‘오! 자유! ‚우리 승리하리라!’ 등의 투쟁가에 섞여 간간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함성이 들려오고, 약솜과 빨간약 병을 든 어린 여공 미경이 두 경찰관의 제지를 받고 승강이를 벌이다가 한 경찰관의 팔을 물어뜯고 노동교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을 끝으로 막이 내리도록 했다.
셋째 막은, 이들 구속 노동자들이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꾸몄다. 판사의 위압적인 호통과 능글능글한 심문, 인권변호사의 분노에 찬 변론, 그리고 노동자들의 순박하기 그지없는 눈물 어린 진술이 이어지는 가운데, 막내 여공 미경의 ‘프롤레타리아’가 무슨 말이냐?’ 라는 울음 섞인 물음이 만장의 심금을 울리며 막이 내리게 했다.

연출 책임까지 성주가 맡아 스무 명 가량 가려 뽑은 보쿰교회 남녀 교우들이 각각 배역을 맡아 주말마다 교회 친교실에 모여 맹렬한 연습을 하는 가운데, 음악 지도는 때마침 유학을 온 이 박사의 아우이자 성악가인 이 다니엘 교수가 맡았고, 조명은 김명호 집사가 장비를 더 갖춘 한층 발전된 기술을 발휘했다.

성주는 각본을 다 쓰고 나서, 한동안 고심 끝에 연극의 제목을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 정했다. 교회의 연극이니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는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같이, 한국의 노동자들이 비록 오늘은 핍박받고, 잡혀가고,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고 하는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지만, 사흘째 되는 날에는 부활하여 새 세상에서 살게 되는 노동의 새벽이 밝아오리라 하는 확신을 갖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각본을 쓰는 사이, 성주는 입원치료를 끝내고, 두 주일의 통원치료를 받은 다음, 한 주일의 작업적응훈련으로 다시 지하작업에 들어가라는 처방전을 받아들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작업적응훈련’이라는 처방전은 광부공제조합 질병보험에만 있는 특별한 제도였다. 서독에서 노동자가 병가를 내거나 근무 중의 공상으로 장기치료를 받게 되면, 첫 여섯 주일은 고용주 측에서 근무할 때의 임금을 그대로 지급하고, 그다음부터는 질병보험에서 평상임금의 약 팔십 퍼센트를 지급했다. 광부공제조합으로서는 치료기간이 여섯 주일이 넘으면 병원비에다가 임금까지 지급해야 하니 큰 손실이 아닐 수가 없다. 특히 병가와 공상이 다른 직종보다 많은 광부의 경우는 그 손실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병원 운영과 보험 업무를 함께 하고 있는 광부공제조합이 창안해 낸 손실 절감책이었다. 아무튼, 공제조합은 어떻게 해서든 환자들을 여섯 주일 안으로 일자리에 복귀시키기 위해 작업적응훈련 처방전을 남발했고, 웬만한 환자들은 귀찮아서라도 아픔을 참고 일자리로 돌아갔다.
 

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바로 앞의 글에서 "없는 놈은 발 벗고 쫓아가도 따라잡지 못하는 이놈의 세상"이라고 하는 대성의 말과 “어째서 우리는 날마다 막차만 타야 하나?“하는 막내 여공의 탄식이 겹쳐지는 복선의 기술이 대단합니다. 사랑과 노동의 역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엮이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합니다. 그런 전개를 통해 준비하시는 절정은 과연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개인적으로 노동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몸소 겪으신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글을 만난 인연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겨레님과 자유로니님께 깊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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