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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272회 작성일 12-12-14 20:58

본문

 
자정이 넘어서야 첫날 순서가 다 끝나고, 모두 잠을 자기 위하여 배정받은 방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도착등록을 할 때 세 사람이 한 방을 배정받았기에 성주, 태영, 성규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태영이 먼저 화장실을 차지하고 세수를 하는 동안에 성규가 신이 나서 외치듯 말했다.
아아! 오늘은 속이 다 후련하다. 말 잘하는 박사님들, 유학생들이 코가 납작해지는 걸 보니 어찌나 통쾌하던지. 한 형 말에 꼼짝을 못하는 꼴들이라니---, 아암! 지들만 인권 있고,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인권이 없나? 하여튼 한형이 최고라니까---.“
태영이 세수를 마치고 나오며 성규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봐도 한형이 예사 광부는 아니야. 무슨 광부가 그렇게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해? 도대체 모르겠어---.“
이런 일 저런 일, 억울한 일도 많이 겪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 귀동냥으로 듣고 본 걸 말한 것뿐인데 뭘 그래?“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네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하다가 보면 뒤죽박죽이 되어서 나중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는데, 한형은 안 그렇잖아? 딱딱 끊어가면서 군소리 없이 할 말을 다 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먹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야. 이쯤 해서 정체를 밝히시지---.“
정체는 무슨 놈의 정체? 강원도 탄광에서조차 불온분자라고 쫓겨나는 바람에, 처자식하고 살아갈 집 한 칸 장만하려고 서독까지 품팔러 온 광부한테 정체라니?“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얼마 전에 이 박사가 문득 그러더라구, 한 형이 혹시 파독광부로 위장한 중정 요원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을 때가 있다구.“
뭐라고? 그래서 최형도 내게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고?“
그건 아니지만, 이상한 점이 많아서 그러지.“
이상하기는 뭐가? 말 좀 똑 부러지게 한다고 이상해? 기가 막힐 노릇이군. 하기는 시대상황이 이러니---, 하지만 광부 짓까지 하면서 정보원 노릇 할 만큼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이 요즘 한국의 관료사회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불쌍하군. 요즘 한국사람들의 정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책상물림 샌님들의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 아니겠어? 지금 한국사회에는 너나없이 그런 충성심이 사라진 지 오래야.“
그게 아닌 줄은 알지만, 한형이 광부치고는 별종이니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는 거지.“

이튿날 오전은 <조선말 천민집단의 인권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온 임 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조선 말기 대원군 시절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한 백정 선각자들이 ‘수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천대받는 백정들의 권익옹호 활동을 펼치다가 일제의 폭압에 의해 말살된 천민집단의 인권운동을 발굴한 새로운 내용의 훌륭한 강의였다. 모두 진지하게 듣고 질의도 많이 했다. 성주는 임 박사가 강의를 통해 언급하지 않은 백정의 기원과 더불어 고려 말기부터 조선왕조 말엽까지 육백오십 년 기나긴 세월을 사람대접 못 받고 마을 밖에서 서성이며, 세상 밑바닥 중의 밑바닥 삶을 살아온 백정들의 피눈물 젖은 인고를 떠올리며 강의 내용을 매우 뜻깊게 마음속에 담았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늦깎이 유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영모씨가 <유학에 나타나는 인권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 첫머리에 나오는 세 강령과 여덟 대목을 대략 설명한 다음, 맹자의 민본사상을 현대의 인권사상과 비교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가히 옛일을 거울삼아 새로움을 안다는 유학경전의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실감 나게 하는 좋은 강의였다.

세미나를 마치고 기숙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태영이 머뭇머뭇하다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저기, 우리 말이야, 이국땅에서 이렇게 만나 붙어 다니는 것도 보통의 인연은 아닌 것 같은데, 아예 이쯤 해서 평생동지 맹약을 맺는 게 어때?“
평생동지? 죽을 때까지 뜻을 같이하고 함께 가자는 말이지? 그거 좋은데.“
성규가 좋아라 하며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평생동지라? 말은 좋지만, 이 세상에 과연 평생동지가 있을까?“
왜 없어?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도 있고, 그 뭐냐, 죽림칠현도 있잖아.“
다 후세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지. 현실에서는 평생동지가 있을 수 없어. 그래서 난 맹약에는 반대야. 이렇게 말하면 싹수없는 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가 뜻이 서로 맞아서 이렇게 어울리고 있지만, 언제 어떤 경우를 당해서 우리가 서로 생각이 달라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때 가서 평생동지 맹약 들먹이면서 서로 배신했다고 미워하면, 평생동지가 평생원수가 되거든. 차라리 그런 맹약 없이, 뜻이 맞을 때는 같은 길을 함께 가고, 뜻이 서로 다를 때에는 저마다 제가 가고 싶은 길을 마음 편하게 가도록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순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언젠가는 우리가 서로 배신할 수 있단 말이야?“
저것 봐, 자기 뜻하고 다른 말이 나오니까 금방 언성을 높이고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잖아. 사람이란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그러니 자기와 뜻을 달리한다고 해서 배신자니 뭐니 하고 미워하는 것보다는, 격려하면서 웃음으로 떠나보내 줄 수 있는 그런 편한 관계가 더 좋다는 말이지.“
말은 옳은 말이지만, 그렇게 보면 인간관계라는 게 너무 허망하잖아?“
태영이 실망하는 것 같아서 이번엔 성주가 제안했다.
그런 거창한 것 말고, 우리 지금부터 호형호제합시다. 최형이 나보다 두 살 위니까, 지금부터 형으로 대할 터이니, 형은 나를 아우로 대해 줘.“
?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한형이 아제의 아우가 되면, 나도 성주 아제라고 불러야 하나?“
까다롭게 촌수 따지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해.“
성주가 성규에게 핀잔을 주고 나자 태영은 기분이 좋아져서,
아우, 앞으로 잘 부탁해!“
하고 성주의 손을 힘껏 잡아 흔들었다.
 
                             <46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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