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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608회 작성일 12-12-12 21:40

본문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영주가 어린 시절을 보낸 벌교 앞바다를 보고 싶을 때면 달려갔다는 벨기에의 바닷가 오스트엔데로 향했다. 미리 전화로 예약해 둔 바닷가 뚝 바로 밑에 자리 잡은 방갈로는 정결하고 아늑했다. 짐을 정리하고 뚝을 넘어 철이 지나 한적한 바닷가를 나란히 걸으며, 영주는 신이 나서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꼬막을 캐고 죽합을 잡던 이야기를 쉴 사이 없이 종알댔다.
바다 건너 맞은 편으로 배를 타고 가면, 섬나라 영국에 닿는다는 검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생선요리로 점심을 마친 다음, 두 사람은 오스트엔데의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몇 가지 기념품을 산 뒤에, 시내를 빠져나와 바닷가 언덕에서 온 천지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북해의 황홀한 해넘이 광경을 구경했다.
야아! 정말 장관이네! 바닷물 속으로 해가 빠져들어 가는 광경을 처음 보기는 하지만, 온 천지가 이렇게 황홀한 빛으로 물들다니, 정말 굉장하네!”
성주가 넋을 잃고 바다 한가운데로 잠겨 들어가는 불덩이 같은 해가 뿜어내고 있는. 황홀경에 취해 있는데,
우리 그만 홍합 먹으러 가요.”
하고 영주가 팔짱을 끼며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를 따라 오두막집 같은 홍합 전문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집집마다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오스트엔데의 명물이라는 영주의 설명을 들으며, 성주는 영주가 이끄는 대로 먹음직스러운 홍합탕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보통의 냄비보다 츰이 두 배는 되는 높은 까만 냄비에 깨끗이 씻은 싱싱한 홍합을 가득 담고, 그 위에 양파와 파슬리, 그리고 파를 숭숭 썰어 넣은 다음, 이름 모를 나뭇잎 말린 양념을 뿌린 다음 우유와 물을 붓고 끓여 내온 홍합탕의 맛은 기가 막히도록 시원하고 성주의 입맛에 딱 맞았다.
함부르크에도 항구에 가면 홍합탕 파는 데가 있는데, 여기 이 맛 따라오려면 어림도 없어. 집에서도 해 먹어 봤는데, 아무리 해도 이런 맛을 낼 수가 없어.”
뽀얀 국물을 자그마한 국자로 떠먹으며, 냄비 안의 홍합을 손으로 집어내어 벌어진 껍질 사이에서 끄집어낸 노란 속살을 서로 먹여주며 소곤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다정한 부부였다.
몇 가지의 해물과 빵을 더 주문하여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어둠에 잠긴 북해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닷바람을 몸속 깊이 들여 마셔가며 뚝길을 거닐다가 밤이 늦어서야 방갈로로 들어갔다.
샤워를 한 다음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하여 타오르는 정염을 참을 길이 없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뒤엉켜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다. 신음소리까지 내 가며 성주의 알몸을 탐하던 영주가 만족한 듯 곤하게 잠든 옆자리에서 성주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이런 걸 두고 불륜이라고 하는 건데, 날이 갈수록 영주가 더 좋아지니 이걸 어찌하나? 내 아이를 둘이나 낳아 키우고 있는 아내는 어찌하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나? 이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첩실을 두셋씩 거느리셨던 걸까? 둘 다 버릴 수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법은 한 남자가 한 여자와만 살라고 하나?”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문득 “여여하게 사시게” 하며, 백담사 들어가는 계곡 길을 한 조각 흰 구름처럼 두둥실 멀어져가던 부운스님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마음을 흐르는 물에 흘려보냈으면, 매사에 연연하지 말고 흐르는 물에 맡기고 무심으로 사시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렇지만 스님, 지금 이런 경우는 무심이 곧 무책임 아닐는지요?”
하면서도 성주는 무심으로 가보자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겨우 눈을 붙인 듯했는데, “여보, 그만 자고 일어나요!” 하는 아내 오복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눈을 번쩍 뜨니, 오복이 아닌 영주가 어느새 일어나 세수에 화장까지 다 마치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성주를 깨우고 있었다.
여보, 얼른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먹으러 가.”
? 뭐라구? ”
갑작스러운 ‘여보’ 소리에 심장에서 북소리가 나기 시작했지만, 성주는 애써 모르는 체하면서 일어나 세면장으로 들어가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주가 “여보, 여기 수건” 하고 수건을 건네주며, “구텐 모르겐”하고 성주의 목에 매달리며 입맞춤을 했다. 성주는 두 다리에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듯한 곤혹감에 휩싸여 거실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주가 얼마나 나와 함께 “여보 당신’을 하고 싶었으면 저럴까? 한나도 안젤라도 눈치가 보여 못하다가, 여기 단둘만 있는 곳이니까 마음 놓고 불러보는 걸까? 서로 애타는 마음을 마음껏 불태운 어젯밤의 정사로 우린 정말 서로의 반쪽이 된 걸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삼생의 인연이거니 하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나? 저 정겨운 “여보” 소리를 어떻게 차마 하지 말라고 하나? -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정리한 성주는 세면장을 닦고 있는 영주를 불렀다.
아기노루! 이리 앉아 봐, 그렇게도 여보라고 부르고 싶었어? 그러니까 좋아?“
하면서 성주는 옆으로 와 앉은 영주의 귓불을 다정스럽게 만져주었다.
으응, 여보라구 부르니까 행복해. 그런데 당신을 언니한테 돌려 드릴 때까지만이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알았어, 좋은 대로 해”

방갈로 촌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향이 짙은 커피까지 마시고 나와 영주는 방갈로 촌 한가운데에 있는 주차장에 세워둔 물방개차의 뒷문을 열고, 허름한 바지 두 벌과 고무장화 두 켤래, 그리고 작은 쇠스랑 하나, 플라스틱 소쿠리 하나, 소금 세 통을 주섬주섬 꺼냈다.
이것들은 왜?“
성주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서 물으니, 영주가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썰물 때거든, 지금부터 바닷가로 나가서 서너 시간 꼬막도 캐고 죽합도 잡으려고, 자 어서 방에 가서 바지 갈아입고 일터로 갑시다.“

바닷물이 대신 밀려 나간 드넓은 갯벌은 성주가 한국 서해안에서 본 시커먼 펄 대신 모래가 많이 섞인 밝은 회색이었고 발도 빠지지 않았다.
갯벌이 어째 한국 갯벌 같지를 않아”
뚝 공사하면서 모래와 시멘트를 너무 많이 퍼부어서, 뚝 가까운 곳은 죽은 개펄이라 그렇대. 조금 더 멀리 나가면 살아있는 개펄이 나와.“
영주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참을 더 바다를 향해 걸어나가니 그제야 걷는 대로 발자국이 움푹움푹 드러나는 살아있는 개펄이 나타났다. 영주는 조그마한 쇠스랑으로 개펄을 긁으며 밤톨만 한 꼬막을 골라 줍고, 성주는 영주가 시키는 대로 여기저기에 나 있는 조개들의 숨구멍에 소금을 반웅쿰씩 집어넣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 구멍에서 손가락 굵기의 길쭉한 까만 댓조각 같은 것이 쑤욱 올라왔다.
어라, 이게 뭐야?”
난생처음 보는 물건에 성주가 엉거주춤하고 있으니까 영주가 재빠르게 달려와 그걸 냉큼 잡아 뽑아 올렸다.
이게 바로 죽합이야.“
하면서 영주는 여기저기 소금 집어넣은 구멍에서 쑤욱쑤욱 올라오는 것들을 수리가 병아리 채듯 날쌔게 잡아 올렸다.
이것도 조개란 말이지.“
구멍마다 소금을 집어넣다가 길쭉한 죽합 하나를 들고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성주를 향해,
여보, 뭐해? 여기저기 죽합이 나오잖아. 빨리 안 잡으면 도루 들어가 숨어버려.“
하고 영주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꼬막을 캐며 소리쳤다.
? 참 그렇지. , 이것 봐라. 거 참 신기하네.“
성주는 흥이 나서 <진주잡이 처녀들>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연신 죽합을 잡아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꼬막과 죽합이 소쿠리에 가득 차자 영주는 바닷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로 가서 하나씩 깨끗이 씻기 시작했다.
허름한 옷차림에 장화 신고 머릿수건까지 두르고 잡은 조개들을 손질하고 있는 영주의 자태는 영락없는 어촌의 아낙네였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꼭 어부 마누라 같네. 어부한테 시집갈 걸 그랬나?“
어부한테 시집갔으면, 내가 좋아하는 해물은 원 없이 먹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어부한테 시집갈까 보다.“
갈 수 있으면 가라지, 누가 말려 ?“
그러지 말고, 당신이 어부가 되면 되잖아.“
광부에서 이젠 어부까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희희덕거리는 사이에 씻기를 다 마친 영주는 죽합을 하나씩 까서 속살만 소쿠리에 담가 시작했다.
, 이거, 그러고 보니 맛살이잖아?“
이제야 알아보시네, 서울사람들은 이걸 맛조개라고 하는 모양이던데, 우리 고향에서는 대나무같이 생겼다고 ‘죽합’이라고 해. 그러고 보니 맛살 넣고 미역국 끓여 주시던 어머니 생각이 나네. 이상하지? 내가 미워서 당신 곁에서 밀쳐내셨는데도 그리워지니 말이야.“
그게 바로 정이라는 거야.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말도 있잖아. 미워도 고와도 정은 정이니까.“
그런가---“
영주는 잠시 먼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맛조개를 까며 종알대기 시작했다.
이 맛살을 꾸득꾸득하게 말려 두었다가 풋고추 듬성듬성 썰은 것하구 번철에 기름 두르고 볶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꼬막은?“
꼬막도 그렇게 하면 맛 있는데, 난 젓 담을꺼야. 푹 삭은 꼬막젓을 우리 고향에선 밥도둑이라구 해, 밥이 한 없이 먹히거든.“
밥도둑이란 말에 성주는 문득 어리굴젓을 ‘밥도둑’이라 하시며 즐겨 드시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물었다.
여기 바다에도 굴이 있나?“
왜 없겠어? 여기서 바닷가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홀란드 바다인데, 거기 바다보다 육지가 낮은 동네가 있어. 옛날에 몇 개의 섬을 연결하여 뚝을 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든 간척지야. 거길 홀란드말로 ‘Seeland 섬의 땅’이라고 하는데, 거기 바닷가에 썰물 때면 구죽바위들과 서덜밭이 드러나. 거기에 굴이 있지. 그런데 한국에서 먹던 구죽바위에 붙은 참굴은 얼마 없고, 서덜밭에서 크는 개굴, 왜 있잖아, 서울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팔던 손바닥만 한 큰 굴, 그걸 개굴이라고 하는데, 그게 많아. 그래도 늦가을부터 겨울이 끝나는 이월 말까지는 향긋한 맛이 나면서 참 싱싱하고 좋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껍질을 깐 꼬막살과 맛살을 소쿠리에 담아 맑은 바닷물로 몇 번 헹구어 낸 다음, 두 사람은 멀리서부터 파도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는 갯벌을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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