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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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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12 21:34 조회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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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번째 마당: 밀월여행

연극을 끝내고 나서 성주는 광산에서 네 주일 동안의 연차 휴가를 받았다. 영주가 미리부터 성주의 휴가를 챙기며 주선하여, 서독천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 클라우젠호프>에서 해마다 열고 있는 두 주일간의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를 위한 독일어 강좌>에 참가 등록을 해 둔 터라, 휴가를 받은 이튿날 영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버하우젠 북쪽의 딩덴이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다.
전형적인 독일농촌마을의 드넓은 밭머리 너머로 빽빽하게 들어선 전나무숲을 뒤로 한 아카데미 클라우젠호프에 도착하여 수강등록을 확인하고 두 주일 동안 기거할 방을 배정받았다. 방은 깔끔하고 햇빛이 잘 들어 환하며, 침대, 책상, 의자, 옷장들은 우중충한 광산기숙사에서 한 해 동안 기거해 온 성주의 눈에는 화려하게 보일 만큼 값나가는 가구였다. 두 주일의 수강료로 일백 마르크를 내고, 이런 정결한 방에서 기거하며 독일어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세끼의 식사는 물론 오후 휴식시간의 페테리아 이용과 밤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여러 가지 오락시설까지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과 부러움을 느끼며, 성주는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장 속에 정돈하고 있는 영주에게 말했다.
"나 아무래도 서독에 눌러앉아야 할까 봐. 가는 곳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니,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의 천국이 아니겠어 ?"
"그뿐인 줄 알아, 여기는 학비도 대학까지 무료야. 그러니 언니와 아이들을 불러올 방법을 찾아볼까? 그렇게 되면 나야 대환영이지."
"삼 년 시한부 계약노동자가 어떻게 가족을 불러와?"
"우선은 독일국적자인 나와 결혼해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국적 바꾸면 가능해,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유혹하지마! 국적 바꾸는 일은 싫다."
성주의 도리질을 얄밉다는 듯 바라보던 영주가 와락 성주의 품속으로 안겨왔다.

독일어 강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로 편성되어 있었다. 오전 네 시간의 강의가 끝나면 점심 산책, 그리고 페테리아에서의 친교 시간,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의 강의, 그다음에는 저녁 식사와 자유시간으로 진행되었다.
강사는 미모의 한국인 전순옥 선생과 일상에서 대하는 독일사람들과는 다른 표준독일어 발음으로 강의하는 마흔 살 후반의 브륄 선생이 맡았다. 전순옥 선생은 남편인 서독국방부의 고위직 공무원과 결혼하기 전에는 서울 연세대학교의 외국인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학당에서 명강사로 이름을 떨쳤는데, 결혼 후 쾰른에 거주하면서 어학 강의의 경험과 능력을 살려 매일같이 아카데미 클라우젠호프로 출근하여 <독일어 말하는 법>을 외국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브륄 선생은 <생활독일어>를 가르쳤는데, 가끔은 숲길이나 밭둑 길을 수강생들과 함께 산책하면서 산책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눈에 뜨이는 동, 식물 등 자연환경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가르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수강생들은 레크링하우젠 광부인 성주를 비롯하여 알렌 광산과 겔센키르헨, 보쿰에서 온 다섯 명의 한국인 광부들과 올덴부르크, 에쎈, 트가르트, 하노버 등지에서 온 아홉 명의 한국간호사들, 그리고 흑 일 점으로 쾰른에서 온 인도간호사 타마라까지 모두 열 다섯 사람이었다.

두 주일째 월요일 아침부터 한 점잖은 독일신사가 넓은 식당 빈자리를 다 놓아두고 꼭 한국인 수강생들이 모여 앉은 식탁의 한 자리를 찾아와 앉아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한국인들끼리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 노신사가 식사시간이면 어김없이 옆자리에 앉는 일이 신경쓰였는지, 사흘째 되는 날 점심 식탁에서 성격이 괄괄한 경상도 출신의 간호사가 그 노신사 바로 옆자리의 간호사에게 한마디 했다.
"이 영감탱이는 뭔데---. 우짠다구 맨날 우리 식탁에 앉노? 하마 니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제 ?"
"이 가시나 뭐라카나? 남새스럽고로---"
두 간호사가 깔깔거리고 있는데, 그 노신사가 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난 아직 영감탱이는 아닌데요"
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이고 우짜꼬, 우리말 알아듣는가 베, 그라믄 뉘 신교?"
"내 이름은 노베르트 야스퍼이고예, 올여름까지 부산에서 십 년이나 살다가 돌아왔심더. 내사 마 겡상도 문둥이 아입니껴."
야스퍼씨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경상도 억양으로 대답하며 당황해 하는 두 간호사의 작태가 귀엽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우야꼬, 우야꼬, 내사 그런 줄도 모르고 실례가 많았심더---."
"어데예, 서로 모르면 그랄 수도 있지예."
익살스럽게 답하고 나서, 야스퍼씨는 자신을 소개했다.
한독기술협정에 따라 서독 측이 부산에 설립한 한독직업기술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여, 십 년 동안 한국생활을 하다가 지난 7월에 서독으로 돌아왔는데, 삼 년 계약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한국의 광부들이 귀국해서 더욱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로 직업교육을 받고 돌아가도록 지원하는 독일천주교회의 새 프로젝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 클라우젠호프 부원장이라는 공식 직함이 찍힌 명함을 돌리며 함께 보여준 사진에는, 십장생 자수 그림의 열두 폭 병풍을 뒤로 두르고 당상관 차림으로 장죽을 꼬나 들고 보료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야스퍼씨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두 딸의 예쁜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국인 수강자들은 모두 일어나 차례로 야스퍼씨와 악수를 하며 자신들을 소개하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야스퍼씨는,
"한국인들은 어느 민족보다 자질이 뛰어나서 지않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여러분도 이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약근무가 끝나더라도 그냥 돌아가지 말고 무엇이든지 신분상승을 위한 직업기술을 배워 돌아가기 바란다." 고 당부했다.
그날부터 식사시간이 되면, 야스퍼씨의 옆자리나 앞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은근한 경쟁이 벌어졌다. 한참 잊고 지내온 한국의 여러 방면 소식을 듣거나, 서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야스퍼씨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스퍼씨의 이야기는 늘 같은 결론으로 끝났다. 한국정부가 창원에 기술공단을 조성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펼치는 매우 고무적인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은 가공수출 공업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지만, 이제는 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기계공업과 중공업 더 나아가서는 첨단기술공업에 도전해야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창원공단 같은 기술집약적인 대규모 중심지가 있어야 효율이 높다며, 그렇게 되면 기술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것이 분명함으로, 여러분이 서독에 있는 기회에 그 수요를 따를 수 있는 기술을 배워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두 주일이 가는 줄 모르게 빠르게 흘러갔다. 강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저녁에는 클라우젠호프의 부엌과 조리시설을 빌려 몇몇 간호사 수강생들과 영주가 요리사가 되어 세 시간이 넘도록 장만한 한국 음식으로 송별만찬을 열었다. 송별만찬을 제안한 영주가 집에서 가져온 배추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클라우젠호프의 부엌에서 수강생들이 만든 잡채, 불고기, 갈비찜에다가 시금치무침, 콩나물무침까지 곁들인 만찬석상에는 그동안 강의를 하느라고 수고한 전순옥 강사와 브륄 강사를 비롯하여 한국여인과 결혼한 클라우젠호프 원장 벤네만 박사 내외, 야스퍼씨와 그의 두 딸, 클라우젠호프 사무처장인 뮐러부인까지 초대를 받고 참석해 떠들하게 잔치를 벌였다.
마지막 순서로 <아리랑>을 합창할 때에는, 야스퍼씨의 두 딸이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아리랑의 선에 따라 곱게 춤을 추어 식당이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영주는 미리부터 성주의 남은 휴가 두 주일 일정에 맞추어 휴가를 내고, 강좌가 끝나는 다음 날부터 성주와 함께 자동차로 한 주일 동안의 휴가여행을 보낸 뒤, 나머지 한 주일은 한나와 함께 놀아준다는 계획으로 여행 준비를 다 해 갖고 왔다.
송별만찬이 끝나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 두 사람은 어둠 짙은 클라우젠호프 뒤쪽의 숲길을 손을 잡고 걸었다.
"? 이게 무슨 소리지? "
문득 성주는 걸음을 멈추고 숲 속에서 들려나오는 가냘픈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영주도 따라서 귀를 기울여 듣다가,
"으응, 저건 아기 새가 잠결에 엄마 품을 파고들며 칭얼거리는 소리야."
하면서 성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는 영주를 끌어안으며 성주는 영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아기 키우는 엄마들은 다 알아. 느낌으로."
"으응, 느낌으로!"
별빛이 초롱초롱한 숲의 어둠 속에서 영주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성주는 문득 두 아이를 잠재우고 있는 아내 오복의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려 가만히 도리질했다.
"어마나! 깜짝이야."
갑자기 놀라며 뒷걸음치는 영주를 뒤로 제세우고 어둠 속을 살피는 성주의 눈에 크고 작은 노루 두 마리가 보였다.
" , 노루잖아! 어미노루와 아기노루 같은데, 우리 때문에 저희도 놀란 모양이야."
숲 속에서 튀어나온 두 마리의 노루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광경을 보며 성주는 문득 십여 년 전 영주가 강원도 인제 산골의 군부대로 찾아왔던 날, 박 상사 부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성주는 피식 웃으며,
" 옛날에, 네가 인제로 날 찾아왔던 날,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서 꽃 비처럼 떨어지는 부대진입로를 걸어가는 너를 보면서 박 상사 부인이 뭐랬는지 알아?"
"뭐랬는데?"
"꼭 갓 태어난 아기노루가 엄마 따라 처음으로 세상 구경 나온 것 같다---."
"어머, 그 거 칭찬이야? 아니면---"
"물론 칭찬이지, 그만큼 때 묻지 않은 기쁨으로 가득 찬 철부지라는 뜻이겠지. 지금 저 엄마노루와 아기노루를 보니까 그때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이야."
"그때 내가 그렇게 철부지로 보였나?"
"왜 아니겠어? 그 험악한 군 지역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헤매고 다니는 처녀애가 철부지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철부지일까?"
"그게 다 당신 때문이지 뭐"
영주가 처음으로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자, 성주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덜컹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주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며 영주의 손을 잡고 밤이 깊어 별빛이 더욱 초롱초롱한 숲길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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