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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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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11 22:21 조회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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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는 영학을 비롯한 몇몇 동료 지하 막장에서 일하다가 다친 다음부터 겪은 어려움들을 줄거리로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을 그려내는 세 막짜리 연극대본을 쓰면서, 제목을 <난 어떻게 해야 하나 ? -Was soll ich tun->으로 정했다. 이 말은 광산에서 함께 일하는 독일인 동료들이 답답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기도 했다.
대본 쓰기를 마친 성주는 성규의 작은 녹음기를 빌려 갱내에 갖고 들어가 막장의 채탄기 굉음과 석탄 덩어리가 굴러떨어지는 요란스런 소리 가운데 간간이 멀리 들려오는 한국광부의 고함 녹음했다.
 
"시간도 촉박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된 연기를 기대할 수는 없고, 크게 감동을 줄 만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분위기를 살리는 배경음악과 조명효과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배경음악은 그런대로 골라 놓았지만, 조명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야."
하는 성주의 걱정을 태영으로부터 전해 들은 보쿰교회의 김명호 집사가 태영과 함께 성주를 찾아왔다. 성주가 극의 구성과 줄거리를 설명하고, 영주가 모아 놓은 전축 판에서 골라 녹음해 놓은 배경음악을 들려주며, 장면마다 필요한 무대 분위기를 설명하자, 김 집사는 자신있는 어조로 장담했다.
"그 정도면 환등기 두 대를 활용해서 색색의 필름을 렌즈 앞에 갈아 끼우면서, 무대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전체조명과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따르는 집중조명으로 변화를 주면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바이린 연주곡 <집시의 달>이 애잔하게 흐르며 막이 오르면, 어두컴컴한 채탄막장 구가 보이고, 음악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요란한 채탄작업장의 소음들이 한동안 들리는 가운데 허리를 다친 한국인 광부가 막장에서 업혀 나와 들것에 실려 나가는 당황스럽고 안타까 장면으로 첫째 막이 내린다.
둘째 막은, 병원에서 담당의사와 마주 앉은 허리 다친 광부가 여전한 아픔을 호소하는 장면으로 열린다. 허리의 통증으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주춤한 세로 호소하는 광부에게 독일인 의사는,
"의학적으로는 다 나았는데, 아직도 계속 아프다면 그건 향수병 때문이다. 일을 못할 정도로 아프면 일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의 치료방법이다. 한국 가면 낫는 병이다."
하고 냉정하게 말한다. 냉정한 의사의 말을 들은 허리 다친 광부는 안절부절하다가 실의에 빠져 이리저리 방황하고, 그 움직임에 따라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모두의 귀에 익은 <고향의 푸른 잔디> 곡이 애절하게 흐른다. 무대는 처연한 감정을 나타내는 검푸른 조명에서 점점 어두워지다가 막이 내린다.
셋째 막은 채탄막장이다. 허리를 잘 가누지 못하는 땀투성이의 광부가 겨우겨우 걸어나와 물병의 물을 벌컥벌컥 들마시며 탄벽에 기대앉아 빵조각을 먹고 있는데, 하얀 안전모를 쓴 독일인 작업반장이 등장하여 "글뤽 아우프 !" 하고 갱내 인사를 한 다음, 하얀색의 종이를 꺼내어 읽어준 다음 건네준다.
"당신은 이번 달에 작업성적이 매우 불량하여 도급 기준단가에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받게 된다. 이런 상태가 석 달 이상 계속되면 해고를 할 수도 있다"
라는 내용의 경고장이다. 대충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경고장을 받아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는 광부가 실의에 빠지는 모습을 비웃듯이, "Wenig Arbeit, wenig Geld-일을 적게 하면 노임도 적다- 라고 외치며 작업반장이 퇴장하면, 광부는 주먹으로 탄벽을 치며 오열한다.
"이 개 같은 자식들아! 일하다가 다쳐서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일을 더 하라구 그러니---? 이번 달에도 송금을 적게 하면, 적금 붓는 액수밖에 안 되는데, 내 아내와 아이들은 무얼 먹구 살라구? ? 무얼 먹구 사냐구?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귀국해야 하나? 돌아가 보았자 뾰족한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아아! 도대체 난 어찌해야 하나? "
한탄하며 오열하는 광부의 모습에 스포트라이트가 한참 비추다가 점점 어둠 속으로 잠기며, 한국가곡 <가고파>가 구슬프게 울려나오면서 천천히 막이 내린다.
 
1978 에발트광산 관련 WAZ 신문기사.jpg
(사진 설명)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꿈의 직업이라는 기쁨도 잠시, 한국광부들은 열악한 작업조건과 환경으로 인해 환상에서 깨어난다"라는 기사 밑에 광산 측의 인사담당 소장과 노조위원장이 "지하의 힘든 일로 병가율이 높다"고  해명한 WAZ 신문.
허리를 다친 광부역은 성주가 맡고, 냉정한 의사역은 성규가, 능글능글한 작업반장역은 태영의 사촌 동생인 태오가 맡았다. 김 집사의 환등기 조명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몇 번의 연습을 마치고, 한인 사회상담실 개설 축하예배를 보쿰교회에서 드린 다음에 친교실 무대에 올린 연극은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성주가 보기에는 여기저기 어설픈 구석이 많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무대 뒤에서 진행을 돕던 태영이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가고파>의 곡에 따라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성주의 한탄과 오열에 그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고, 객석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참 좋았네, 아주 감동적이었어. 이 박사를 통해 말은 들었지만, 한군이 이런 재주꾼인 줄은 미처 몰랐네, 앞으로 여기 서독에서 할 일이 많은 것 같구만."
장 목사 내외가 성주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용이 너무 빈약해서 부끄럽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만하면 훌륭해, , 정말 훌륭했어. 눈물 흘린 교우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우리 집사람도 손수건이 다 젖을 만큼 훌쩍거리던데 뭘---."
이 박사가 달려와 성주를 덥석 껴안으며 치하의 말을 하려다가 코를 쥐고 물러섰다.
"아이구 한형! 빨리 가서 샤워하 옷 갈아입고 나와야겠네. 거 땀 밴 작업복 냄새 한번 고약하군."
연극의 효과를 올리려고 일부러 땀과 석탄가루에 찌든 광산업복을 그대로 갖고 와 입은 탓인지 아닌 게 아니라 성주에게서는 걸래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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