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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230회 작성일 12-12-10 20:37

본문

 
       여덟째 마당: 숨죽여 우는 사나이들

새해 들어 석 달의 교육기간이 끝나고 능률급여제, 그야말로 일한 만큼 돈을 버는 도급작업이 시작된 첫 달부터 5진 동료 가운데 부상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귀공자 고성렬이 서투른 채탄작업 중 천반에서 떨어지는 돌덩어리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오른쪽 어깨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노동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고성렬은 레크링하우젠 광부공제조합병원에서 오른쪽 어깨와 팔에 석고붕대를 칭칭 감고 기숙사로 돌아와 풀이 죽어지내다가 한 달 반 만에 석고붕대를 풀고, "독일 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진 귀국을 해버렸다.
이어서 노총각 선영석이 탄 높이 팔십 센티의 안나 갱도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압바우함머로 탄벽을 허물어 내다가 무너져 내리는 탄벽과 함께 천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리에 맞아 왼쪽 정강이뼈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 나왔다.
   영석이 적어도 두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주는 영학과 함께 갈아입을 영석의 속옷과 병실용 가운을 챙겨 레크링하우젠 병원을 찾아갔다. 병실용 가운은 5진 동료들이 매달 5마르크씩 내는 회비 적립금으로 성주가 5진 공용으로 둔 것을 영석이 처음 쓰게 된 것이다.
   병실에 들어서니 영석은 석고붕대를 칭칭 감은 왼쪽 다리를 쳐들어 매달고 누워 병실 청소를 하는 독일인에게 서투른 독일말로 무언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독일인 역시 부은 얼굴 볼멘소리를 내지르며 여기저기를 걸레로 닦고 있었다.
"
선형,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영학이 눈이 휘둥그지며 물었다.
"
나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어. 저 청소하는 부인이 조금 전에 내 침대를 정리해 주길래 고맙다고 했더니 공연히 화를 내고 야단이야. 한형, 마침 잘 왔네. 한형이 한 번 물어봐 왜 그러는지?"
   영석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하며 성주를 반겼다.
"
부인,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
   성주가 정중하게 묻자 독일부인은 성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뾰퉁한 목소리로, "당신은 독일 말을 알아듣는가 ?" 하고 물었다.
"
잘은 모르지만 조금은 알아듣습니다."
"
당신 친구가 나보고 '알테 라우'라고 욕을 했다. 처음 보는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성주는 그제서야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
선형! 이분에게 알테 푸라우라고 했어?"
"
, 내가 그랬지. 침대 정리해 주는 게 고마워서, 그게 잘못된 건가? 내 깐에는 한참 생각해서 아주 정중하게 우리말로 '노부인 고맙습니다!''당케쉔, 알테 푸라우!'라고 인사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
안되지, 독일부인에게 '알테 푸라우'하면 큰 실례야. 선형이 잘 모르고 그랬다고 사과를 해야겠군"
   성주는 나이가 많은 부인을 최대한 존경하는 한국말 '노부인'을 독일말로 직역하면 ‘알테 푸라우'가 되기 때문에 영석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그만 독일말에 서투르다 보니 뜻하지 않은 실례를 범하게 되었다고 설명을 하고 나서 영석을 재촉해 사과를 시켰다.
"
내 이름은 바바라 슈미트다. 당신이 독일말이 서툴러서 잘 모르고 그랬다니, 나도 화를 낸 것을 사과한다. 앞으로는 푸라우 슈미트라고 불러라"
  푸라우 슈미트는 영석이 사과의 뜻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빙긋이 웃었다.
"
아이구 다행이네, 한형이 때마침 와 주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툴툴거리는 바람에 종일 바늘 침대에 누운 꼴이 될 뻔했잖아"
   영석이 안도의 숨을 내 쉬는 걸 보며 성주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쾌활하고 목소리가 커서 자신만만해 보이는 이 호남사나이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국의 병실에 누우니 기가 죽는구나 하는 안쓰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
그게 참, 말 알아듣는 것만 어려운 줄 알았더니, 아는 말도 함부로 했다간 큰코다치겠네. 며칠 전에는 반대로 윤형이 한참 열을 올렸지."
   성주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영학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
윤형이 뭘 어길래?"
   영석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엊그제 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마누라한테 편지 부치려고 우체국엘 들렸는데, 우체국 창구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가 생긋 웃으면서 '구텐 탁, 융에 만!' 하더라고. 그냥 '구텐 탁!' 만 했으면, 응 지금 대낮이니까 '구텐 모르겐!' 대신 '구텐 탁!'하고 인사를 하는 거구나 했을 텐데, 인사말 끝에 '융에 만'을 부치니까 우리말로 '젊은이 안녕하신가'? 정도로 들리더라고. 그러니 내가 열이 안 나게 생겼어? 외국인이라고 얕잡아 보고 나이도 얼마 안 되는 새파란 젊은 년이 '어이 젊은이' 하는 식으로 함부로 대한다는 생각이 왈칵 들어서 언성을 높이면서 ', 융에 만이 아니라 알테 만'이라고 쏘아붙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그 여자에게 한바탕 더 욕을 해 주려고 씩씩거리면서 적당한 말을 마음속으로 찾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형이 기겁하면서 내 입을 틀어막았지. 허리 꼬부라진 할아버지한테도 좋은 뜻으로 말끝에 '융에 만' 붙여서 인사하는 걸 누가 알았나?
   제기랄, 나이 지긋한 점잖은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노부인,-알테 푸라우-'는 욕이 되고, 손아래 젊은 것들을 부르는 '여보게 젊은이-융에 만-'은 상대방을 대접해 주는 좋은 뜻의 말이라니, 이거야 어디 어려워서…, 앞으로 살다 보면 또 얼마나 많은 말이 우리 생각하고는 엉뚱하게 다른 뜻이 되는 건지 걱정이네. 아예 입 다물고 지내다가 가야 하는 건지"
   영학이 한심스러워하자 영석이 파안대소하며 특유의 큰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했다.
"
아따, 성님, 걱정도 팔자요. 그게 문화의 차이라는 게 아니겄소. 우린 삼강오륜의 장유유서 윤리의식 가운데 태어나고 살아와서, 나이 대접해 주는 게 상대방 올려주는 거지만, 여기 독은 상대방에게 나이 들었다는 걸 일깨워 주는 말이 실례가 된다는 걸, 우리나 즈그들이나 어찌 알았겄소, 또 이렇게 서로 알고 나니까 손 마주 잡고 웃으면서 서로 이해해 가는 것 아니겄소. 그나저나 우리 같은 양반들은 길게 살 곳은 못 되는가 싶소. 세상 어느 천지에 나이 대접해 주는 걸 갖고 욕한다고 대드는 상놈들의 세상이 또 있겄소. '구텐 탁! 융에 만' '할로! 융에 만', 요 방정맞은 소리가 사람 얕잡아 보는 말이 아니라 대접해 주는 말이라 이 말씀이지"
   정강이뼈가 세 쪽으로 파열되어 일단 석고붕대를 감았다가 3개월 후에 풀고, 뼈와 뼈를 몇 개의 못을 박아 여섯 달 또는 여덟 달을 고정시킨 후에도 경과를 보아야 한다는 기나긴 치료일정을 애써 잊어버리려는 듯 영석은 수다를 떨며 평소의 그답지 않게 허룽거렸다.
"
어때? 영석이, 심하게 아프지는 않아? 병원에 두 달은 더 있어야 한다면서? "
   영석의 큰형과 군대 동기라서 영석을 아우처럼 대해 온 영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마취 깨고 나서부터 계속 팔뚝에 꽂고 있는 이 주사액에 진통제도 들어 있는갑소. 아직 아픈 걸 느끼지 못하는 걸 보. 백대가리 말로 두 달은 누워 있어야 한다니까, 완치나 될릉가 모르겄소"
영영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영석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대가리, 레크링하우젠 크납샤프트 크랑켄하우스의 외과 과장 슈나이더 박사를 외국인 광부들은 '백대가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이 흰색에 가까운 금발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전사고로 다친 광부들을 함부로 다룰 뿐만 아니라, '작업환경 적응훈련'이라는 '진료소견서'를 발부해 제대로 낫지도 않은 환자들을 걸핏하면 일터로 몰아대는 몰인정한 처사로 악명을 떨치고 있어서 레크링하우젠 일대 광산의 외국인 광부들 사이에선 '백대가리'라는 혐오스러운 별명으로 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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