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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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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08 21:18 조회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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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신문기사 얘긴 그만. 그때 상황으로는 한형이 그렇게밖에는 파악할 도리가 없었던 거니까. 피차 일면식도 없는 처진데 내가 중간에서 역할을 잘못한 거야. 그나저나 어찌 됐든, 해고를 당한 동료 세 사람을 구하기 위한 우리의 시도는 아무 성과 없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건지? 난 그걸 의논하고 싶어서 이렇게 만나자고 했지."
   태영이 성주와 이 박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만남을 주선한 까닭을 설명했다.
"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지, 그때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밀어붙였어야지, 불길 다 사그라진 다음에 제 와서 뭘 어찌하?"
파독광부로 선발되고도 아직 독일에 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실직자들이 백육십 명이나 있다는 임 수석 노무관의 말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당해고 철회 요구 일일 입갱 거부'를 철회하던 태영의 정 많은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성주는 짐짓 힐난하듯 되물었다.
"
그럼 어떻게 하나? 우리가 시끄럽게 굴면 온다고 적어도 한두 해씩은 건달 살림해 온 백 육십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못 올 수도 있다는 데, 그 기다리는 심정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구. 파독광부로 선발됐는데, 집에서 삼 년을 기다려도 '조금만 더 기다려 봐라. 조금만 --- ' 하니까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더라구. 오죽하면 모두 모여서 개발공사 쳐들어가 난동을 부렸겠나. 신문에도 대문짝만 하게 났던 그 난동자들이 우리 레크링하우젠 3진들이야. 송 회장이나 오 부회장이나 나나 다 그때 개발공사로 몰려갔던 사람들이니까 지금 오지 못하고 한국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지. 그러니 그 소릴 듣고 '그런 건 우리 몰라'할 사람이 누가 있어? 한형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아?"
   태영이 열을 올리며 변명처럼 말했다.
"
누가 잘못했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광산 측이 조만간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으니까 무슨 기별이 오겠지. 그때까지는 기다려야지 별도리가 있겠어?"
"
그러니까, 그때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미리미리 생각해서 준비해 두는 게 좋지 않냐 이 말이야. 내 말은"
"
준비할 게 뭐 따로 있나, 해고 철회 요구는 물 건너간 거, 우리가 할 말은 한 가지뿐 아니야? 해고자들 구제해 달라는 거---"
   성주가 시둥하게 대답하자 이 박사가 끼어들었다.
"
처음으로 마련되는 대화의 자리니까 그것 말고도 몇 가지 요구사항을 준비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 예를 들자면 한형처럼 경사 막장 채탄작업에 적합하지 않은 작은 체구에 힘을 못 쓰는 사람들은 다른 작업을 시켜달라 한다든가---"
"
우리 노동 계약서에 '한국광부들은 지하 채탄작업에만 종사한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데, 그런 요구가 먹혀들어 갈 리가 있겠습니까?"
"
먹히든 안 먹히든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아무 소리 안 하구 저쪽에서 하는 말만 듣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않아? 든 광산 측에서 대화하자는 건, '할 소리 있으면 해 봐라.' 하는 거 아니겠어?"
   태영에게 그리하듯 이 박사는 성주에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그게 참 편안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성주 역시 태영에게 하듯 말을 놓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습관이 안 된 하게 인데다가 또 처음 만난 자리여서 그런지 어정쩡하기만 했다.
"
지난번 우리 청원서를 대하는 광산 측의 태도로 보아서는,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라통과 따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라통이 말하기를 '광산 경영주 측은 물론 노조에서도 해고당한 당사자들이 개별적으로 노조든 광산 운영협의회(Betribsrat)를 찾아와 협의하든 항의를 할 일이지, 이렇게 집단으로 소란을 피울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 기본이다.'라고 합디다. 그런 기본 입장이라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전체적인 문제점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점과 애로를 청취하겠다는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모처럼의 기회가 결국 중구난방으로 끝나고 말 건데, 이건 노동쟁의 대처 경험이 많은 저들의 전략일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일종의 김 빼기 작전, 터질 듯 팽팽하게 긴장관계를 일단 대화의 자리로 끌어들여 개개인의 애로사항을 말하게 하면 격렬했던 투쟁의지에서 일단 김이 빠지게 마련이거든---"
"
그러니까, 더욱 준비가 필요한 거 아니겠어? 광산 측에서 그렇게 유도해도 거기에 말려들지 않게 미리 준비해서 아무나 중구난방으로 말하게 하지 말고 발언자도 미리 정해야 않겠어?“
   성주는 이 박사의 말을 끊고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
이형!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의 의미를 아십니까?"
"
갑자기 웬 조삼모사는???"
   이 박사는 엉뚱하다는 듯 어리둥절해서 성주를 바라보았다.
"
간식거리를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나,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나 하루에 일곱 개 먹기는 매일반인데도 원숭이들이 앙앙불락 한 까닭은, 한꺼번에 일곱 개를 주던 간식을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기로 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여도 자기들의 의사가 반영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받기로 하고 원숭이들이 희희낙했다는 옛이야기는 이번 우리 일에 견주어 보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형이 말하는 대로 발언자를 미리 정해서 중구난방으로 말하는 걸 막는다면 오히려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이 자중지란만 일어납니다. 자치회가 분열될 위험도 있지요.
예를 들자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 실패한 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개화파의 부국강병책과 개혁안은 현대의 안목으로 보아도 매우 뛰어난 것이었지만 그들이 백성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을 깨우치고 가르쳐 나라 사회를 개화시키겠다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일도 마찬가지죠. 무엇보다도 이 일에 동료들이 흥미를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똑똑하다는 몇몇 사람이 도맡아서 앞장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필연코 실패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좀 멀리 돌더라도 좀 답답할 정도로 세월이 오래 걸리더라도 당사자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
그거 어느 세월에---"
"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보쿰 한인교회가 공관이나 교포사회로부터 '빨갱이 교회'로 지목받고 있는 까닭도 바로 이런 이야기들과 무관하지 않을 . 목회자나 핵심 교인들이 교포사회보다 훨씬 앞서 가면서 따르지 못하는 교포사회를 계몽해야 한다는 의식을 고 있다면, 교포사회의 반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필연이지요. 한국사회 그런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인 건 새삼스런 일이 아니고---"
"
그러니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얘기를 그냥 잠자코 듣고 있다간 얼마나 더 엉뚱한 데로 이야기가 흘러갈까 염려하는 눈길로 태영이 성주의 말을 끊었다.
"
말하고 싶은 사람들 말하게 하고 우선은 들어야지. 쓸 데 없는 말 한다고 아니면 답답한 말 한다고 말 막으면, 그게 시간 절약하고 빠른 것 같지만 실은 아무 소득도 없이 공연히 우리끼리 미워하고 분열하는 결과를 가져와, 그걸 해결하노라 본래 문제는 사라져 버리거나 그 해결이 더 오래 걸리거든."
"
그래 모처럼의 좋은 기회인데, 어중이떠중이들이 중구난방으로 함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태영이 답답하다는 듯 조바심을 하며 채근을 하는데, 그때까지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성규가 입을 열었다.
"
, 한형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요. 교회에서도 무슨 회의 때나 세미나 같은 모임에 가 보면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나 뭘 좀 안다는 친구들이 자기들 말만 실 떠벌리고, 우리네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말 좀 하려고 하면, 말을 턱턱 가로막고 나서는 데, 사실 말이지, 어떤 때는 불만 정도가 아니라 판을 아예 엎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구---"
   성규는 말을 하면서 제 풀에 흥분되는 듯 언성을 높였다.
"
허 참, 이 사람, 잘하면 아제 치겠네"
   태영이 성규의 노기 띤 어조에 무안한 듯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농을 걸었다.
"그럼 한형 생각은, '조만간 광산 측과 만나는 자리는 사전 조율 없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자' 이건데, 그래서야 무슨 효과가 있을까? 얻는 것이 있을까?"
   이 박사는 선뜻 내키지 않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성주를 바라보았다.
"
그날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만, 어차피 뭘 주려 만나자는 거 아니니까, 뭘 기대했다간 실망만 하게 되지요. 그러니 차라리 이 사람 저 사람 마음대로 얘기하게 해서 답답한 속이나 풀게 하는 게 잘하는 일일 꺼요."
"
그럴까? 노동운동 현장경험 있는 한형 말이니 어련하려. 하지만 뭔가 모르게 허전하네---"
  이 박사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태영이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
아 참, 그날 통역은 이형이 좀 해줘야겠소. 아무래도 나통은 믿을 수가 없어서"
"
그게 가능할까? 광산 측이 승낙 안 할 ---"
   이 박사는 망설였지만 태영은 확신에 차 있었다.
"
우리 자치회 이름으로 강력하게 요구하면 들어줄 . 지난번에 우리가 청원서와는 별도로 나통을 불신임한다는 뜻을 광산 측에 전달한 일도 있으니까."
"
아무튼, 해 봅시다."
"
해 봅시다가 아니고---,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한 사회상담실을 개설하기 위한 정지작업 겸 홍보작업이라 각오하고 전력투구해야지---"
"
어이쿠 최형, 알아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태영의 핀잔에 이 박사는 얼굴을 붉히며 절절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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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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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님 !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광산의 사정을 잘 모르실 거라고 생각해서 설명을 하다보니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기왕에 광부이야기이니 남들이 모르는 광산 사정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지루하지 않게 속도가 좀 빨라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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