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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1,343회 작성일 12-12-05 20:38

본문

 
"영주! !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됐어. 어서 식탁으로 와!"
   안젤라의 경쾌한 목소리에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성주의 얘기가 끊겼다.
"
그래요. 그만하, 우리 밥 먹어요."
   영주가 젖은 눈가를 닦으며 일어나 성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영주의 깔끔한 성격이 배어나는 듯 금방 칼로 깎아낸 것처럼 환하고 정돈이 잘 된 부엌의 식탁 위에는 한음식과 독일 음식이 섞여 놓여 있었다. 천주교 신자인 듯 안젤라는 식탁 앞에 앉아 기도하고 성호를 그은 다음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성주에게 식사를 권했다.
"
내가 준비한 독일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영주가 준비한 것은 입에 맞겠지만. 어서 들어요!"
"
감사해요. 안젤라.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콜라비를 깎아서 담은 깍두기 김치, 그리고 양배추와 무와 당근을 채 썰어서 고춧가루 양념에 버무린 대용 김치를 권하면서 영주는 미안하다는 듯 "배추 파는 데를 찾을 수가 없어서 김치가 이 꼴이야"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맛있는데 뭘, 배추는 우리 기숙사 부근 슈퍼에 늘 나와. 아마 우리 기숙사 친구들이 많이 찾으니까 그런 모양이야."
"
정말 그렇겠네. 당장 내일이라도 가서 사 와야지. 오빠 이거 한번 먹어봐. 우리 엄마가 제일 잘하는 건데, 우리 한나가 아주 좋아해."
   영주는 성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이 반찬 저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성주의 밥 접시 위에 놓아 주느라고 자신은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태는 열대여섯 해 전 서울에서 성주의 밥상 시중을 들던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시중이 못내 어색하고 거북스러워 성주는 건너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한나에게 말을 걸었다.
"
우리 한나는 무얼 젤 좋아하나 ? "
"
아저씨 난 이거 융에보넨이 젤 맛있어."
  한나는 올리브기름에 살짝 익혀내 소금간을 한 연빛 깍지 콩을 들어 보였다.
"
! 그래, 어디 아저씨도 하나 먹어볼까."
그러는 성주를 흥미롭다는 눈길로 건너다보며 안젤라가 물었다.
"
어때요 맛이? 입맛에 맞아요? 그게 내 작품인데---"
"
! 맛있어요! 참 맛있어요! 담백하고 풋풋해서 아주 입에 맞네요."
"
영주 말로는 이 융에보넨이 한국에는 없다고 하던데---"
"
! 아니에요. 영주가 잘 몰라서 그래요. 깍지 요리해서 먹는 이 융에보넨이 나 어릴 때 우리나라에도 있었어요. 언제부턴가 잘 안 먹게 되어 지금은 농가에서도 잘 재배하지 않아서 보기 어렵지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 융에보넨을 '광저기'라고 했던가 그래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보기 드문 옛것들을 여기 독일에 와서 보게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 예를 들면 표주박처럼 생긴 독일 배도 실은 백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흔했던 '고살래'라는 이름의 토종 배였지요. 지금은 과수원의 개량종에 밀려 멸종되고 옛날 민속화에서나 볼 수 있게 됐지만 말예요. '풀라우메'는 우리말로 '오얏'이라고, 내가 일곱 살 때까지만 해도 동네 밭 가에 흔하게 서 있던 과일나무인데, 지금은 개량종 '자두'에 밀려 그 이름까지 잊혀 가고 있지요. 여기 독일 와서 풀라우메 나무를 보니까 어릴 때 소장난하면서 밭 에 서 있는 오얏나무에서 채 익지 않은 시디신 오얏을 따서 진저리 쳐가며 꼬마 각시와 나눠 먹던 생각이 나네요. 그래요 '풀라우메'가 우리말로는 '오얏'이고, '비르네''고살래', '융에보넨''광저기' 또 뭐가 있더라. 하여튼 지금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옛것들이 여기 독에는 일상의 것들로 있어서 기분이 묘할 때가 있어요."
   "
아무튼, 우리 오빠는 참 아는 것도 많아. 엄마, 뭐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성주 씨한테 물어봐. 백과사전이 따로 없을 걸 아마."
영주가 더듬거리는 성주의 독일말을 도와 통역을 해 주면서 곁들였다.

"그런데 헤르 한, 언제 이리로 이사할 생각이야 ?"
  저녁 식사를 끝마친 식탁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홍차 잔을 가져오며 안젤라가 묻는 말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 성주가 '이사라니? 무슨 이사?'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젤라와 영주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자, 안젤라가 딱하다는 듯 영주를 채근했다.
"
영주, 도대체 저녁 내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정작 해야 할 얘기는 안 했잖아?"
"
무슨 말입니까? 안젤라?"
"
헤르 한! 영주가 애를 써 가며 여기 헤르네의 마리엔 호스피탈로 직장을 옮기고, 이 넓은 농가 별채를 새 보금자리로 구한 까닭은---"
"
엄마, 내가 얘기할 게, 오빠 이리 좀 와 봐 "
   영주가 안젤라의 말을 끊으며 일어서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성주는 얼떨결에 영주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
오빠, 여기가 오빠 방이야."
   영주가 문을 열고 보여주는 방안에는 일인용 침대가 벽 쪽으로, 창문 쪽으로 아담한 책상과 책장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 일인용 소 2개와 찻상이 아늑한 분위기를 발하며 놓여 있었다.
"
내 방이라니?"
성주의 놀라움은 아랑곳없이 영주는 성주를 재촉해 방안으로 들어섰다.
"
오빠,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가 말했지.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오빠를 내 옆으로 데려 오셨다. 이제 오빠가 내 옆에 있는 한 오빠를 기숙사 홀아비로 놓아두고 구경만 할 수는 없어. 광산 일 끝내고 귀국할 때까지만, 그러니까 삼 년 동안만 더도 말고 딱 삼 년 동안만 여기서 함께 살아. 여기서 오빠네 광산은 광산 통근버스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데, 내가 비번이거나 시간이 맞으면 내 차로 오빠 통근을 시켜줄 거야. 내가 옮긴 병원은 여기서 5분도 안 걸려, 마리엔 호스피탈이라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야. 함부르크 있을 때 나를 간호학교에 보내 준 수녀님이 간호과장이어서 쉽게 옮겨 올 수 있었어. 어때 오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줄 거지?"
"
아주 단단히 작정했구나. 날 아예 오도 가도 못하게 붙잡아 놓기---"
"
아냐 오빠, 삼 년 계약 끝나면 미련 없이 귀국해, 얼굴은 못 봤지만, 틀림없이 착한 언니한테 삼 년 후에 오빠를 고스란히 보내 줄게, 그 이상은 더 바라지도 않아--- 말이 쉽지, 선비 같은 오빠가 그 힘든 광산 일하면서 홀아비 기숙사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꼴을 내가 어떻게 그냥 보기만 해. 내일 당장 짐을 이리로 옮겨, 오빠, 그럴 거지? "
"
아니, 그럴 순 없어. 첫째, 남편을 외국에 보내 놓고 마음고생하고 있는 아내를 배신하는 행위가 돼서 안 되, 또 너를 정말 아끼기 때문에 그건 안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좋은 남자 찾아서 결혼해야지.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
아니야, 난 결혼 같은 거 하지 않기로 작심한 지 오래야. 이것저것 생각해도 난 보통의 한국남자와의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바랄 수가 없어. 내 사정을 잘 아는 안젤라 엄마가 차라리 성실한 독일남자와 결혼하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국사람 핏줄인 우리 한나가 너무 불쌍해서 그럴 수도 없어. 오빠. 내가 이렇게 사정할, 삼 년만 우리 한나 아빠 노릇을 해 줘, 딱 삼 년만."
"
그럼?, 그다음엔?,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
한나가 일곱 살이 되면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는 나이야, 나도 그랬으니까. 그때 엄마가 살아온 얘기 해 주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야지"
"
그러지 마, 그러지 말고 정말 좋은 남자 찾아봐, 평생토록 영주 너를 사랑하고 한나를 제 딸처럼 여기고 키우면서 함께 살 그런 남자가 틀림없이 있을 거야."
"
오빠, 정말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나한테는 열여섯 살 때부터 남자는 오빠 한 사람뿐이야. 오빠 말대로 전생의 업보인지 뭔지 때문에 자꾸만 엇갈려서 오빠를 놓치 다른 여자한테 빼앗겼지만, 그래도 아직 내겐 오빠뿐이야. 오빠가 내 평생의 하늘이란 말."
   마침내 영주는 성주의 품을 파고들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렸다. 달리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는 성주는 하염없이 흐느껴 울고 있는 영주를 멍청하니 끌어안고만 있었다.
"
금제비라구 했어? 그 월남여자는 그렇게 쉽게 받아 들였으면서, ? ? 난 안 된다? 오빠, 평생 책임지라는 것도 아니 딱 삼 년만 함께 살아 달래는 데, 왜 안 된다는 거야?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
   영주는 흐느낌 사이사이로 울음소리가 범벅된 원망을 쏟아 놓았다.
"
그만 울어라 영주야! 나 내일 새벽에 일 들어가야 해, 제 그만 기숙사로 데려다 줄래?"
   그냥 놓아두면 흐느낌과 넋두리가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아 성주는 두 손으로 눈물 젖은 영주의 얼굴을 받쳐 올려 부드럽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 입맞춤에 영주는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부르르 온몸을 떨며 성주의 목을 끌어안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 뜨거운 영주의 입술이 성주의 뺨과 목에서 불길을 확확 뿜으며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영주의 혀가 성주의 입안으로 들어와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자 성주는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하면서도 영주가 태워 올리는 애욕의 불길에 휩싸여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황빛 홈드스를 벗어 던지고 하얀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꿈틀대는 영주의 타는 듯한 목마름을 채워주면서 성주는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자신의 몸통과 팔다리 그리고 심장과 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심지어는 한 결의 숨까지도 영주를 원해 소리쳐 일어서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랬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외침은 성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학교에서 배운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가 머릿속에 박혀 나오는 공허한 소리일 뿐, 열대여섯 해를 두고 서로 원해 온 젊은 남녀가 만나 일으키는 불길 가운데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긴 울음 끝으로 이어진 애무였기 때문일까? 울부짖음 반 신음 반의 뜨거운 정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나른한 충만감에 젖어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서도 서로의 얼굴을 바로 보질 못하고 있었다.
"
고마워 오빠, 날 내밀지 않고 받아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
   영주가 반듯이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성주는 영주에게 손을 잡힌 채 근원을 알 수 없는 평안함에 잠겨 나른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댓글목록

haki님의 댓글

haki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 님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어느날 사진 올리다 보니 바로 위에서 한겨레 님이 올리신 글이 저를 반기네요.
삶의 발자취를 담으신 글 시간내어 천천히 읽어보렵니다.

웬지 한겨레 님과 함께 조용필 가수의 ,꿈, 이라는 노래 같이 듣고 싶군요.

http://www.youtube.com/watch?v=ICSe-LWaFhw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Haki 님, 링크해주신 조용필의 "꿈" 고마운 마음으로 잘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고향을 찾아가는데 나는 여기에 남아있네"하는 노랫말이 꼭 제 심정을 대변하고 있어서 울컥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 여기도 마지막 한 페이지 분량 중복되었네요. 정말 잘 쓰셔요.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귀한 글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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