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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918회 작성일 12-12-04 23:40

본문

 
성주는 흐느껴 우는 영주의 결 고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군대 시절 강원도 인제 백담사 들어가는 한계천 계곡길에서 두 번째 만난 부운 스님으로부터 들은 '전생의 업보' 라는 말을 떠올렸다.
"
전생의 업보?"
   영주는 울다 말고 고개를 들어 성주를 쳐다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
그래, 전생의 업보야. 너와 내가 이렇게 안타까운 처지로 만난 것도, 살아도 살아도 끝나지 않는 머나먼 돌밭 길을 걸어가야 하는 고달픔도, 모두가 너와 내가 살았던 전생의 인연이니, 야속해도 야속해하지 말고 달게 받아가며 걸어가야지."
   성주가 혼잣말하듯 벽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영주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도리질을 했다.
"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그리 서 그렇게 가엽게 태어났어? 무슨 업보가 있기에 한 번도 편하게 누구에게 안겨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 돌며 살아야 해? 말 좀 해봐 오빠? ? 내 팔자가 왜 이런지 오빠가 말 좀 해봐."
   성주를 만난 세월 십오 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속 저 밑바닥에 묻어둔 자신의 출생에 대한 한과 누구에겐지 모를 원망을 쏟아내는 영주의 푸념에 성주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언제나 의젓하면서도 밝은 얼굴로 주위를 환하게 만들어 온 영주의 자태만을 기억하고 있는 성주에게는 무너지듯 자신에게 몸을 내던지며 눈물 범벅진 얼굴로 들이대는 영주의 낯선 모습에서 성주는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았다.
"
그만 진정해 영주야. 네 얘기가 아니야, 내 얘기야. 내 말 들어봐. 내가 왜 광부로 독까지 왔는지, 그걸 내가 왜 전생의 업보라 하는지, 이 얘길 들으면 너도 마음이 좀 가라앉을 . 이 얘기는 아직 누구에게도 하지 않고 가슴속에 묻어둔 얘기야. 내 인생에는 지금까지 두 번의 좌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 놓고도 등록금 마련할 길이 없어서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적이 있었지, 이것이 첫 번째의 좌절이야. 영주 너를 만나기 몇 달 전의 일이야. 학교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절에 들어가 불교공부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집을 나섰는데 발길이 속리산 법주사로 향하더군, 아마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산 이름에 이끌렸을 거야. 그때가 늦은 5월인데 보은에서부터 걸어서 말티고개를 넘어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뻐꾸기가 이 산봉우리 저 산봉우리에서 어찌나 처절하게 울어대는지 나도 뻐꾸기 따라 꺼이꺼이 울면서 산길을 하염없이 걸었지. 법주사를 오리쯤 남겨두고 숲길 옆으로 흘러내리는 물가에 앉아서 물끄러미 흘러가는 물길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길래 뒤돌아보니 죽장을 짚고 바랑을 멘 웬 노스님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며 길섶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더군. 무심코 일어나 합장 례를 하고 다시 앉아 있던 바위 위에 앉으니 그 노스님이 내 옆으로 내려와 말을 건네더군.
'
젊은이, 예서 뭘 하 있나. ?'
'
흐르는 물을 보고 있습니다.'
'
그래~, 물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
'
마음이 물 따라 흘러가 버려서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무심코 내키는 대로 내뱉은 내 대답에 그 노스님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물었어.
'
여보게 도반, 내 보기에는 서울청년 같은데 무슨 일로 빈손으로 산에 왔는가 ?'
'
스님, 감히 제가 어떻게 '도반' 호칭을 듣겠습니까? 말씀 거두어 주시지요.'
'
부를만하니까 그렇게 부르네! 개의치 말게.'
'
스님, ()를 배우고자 산을 찾았습니다.'
'
()! 마음이 없으면 도()도 없는 것인데, 마음이 물 따라 가버린 사람이 도를 배워서 무엇에 쓸고.'
   나는 벌떡 일어나 그 노스님에게 큰절을 올리고 간절한 목소리로 청했지.
'
스님 저를 제자로 삼아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
내가 이미 젊은이에게 도반이라 했거늘, 제자란 당치도 않은 말이야. 내가 보니 도반에게는 도를 찾는 공부가 필요 없을 것 같네. 그러니, 그냥 산에서 내려가시게'
'
스님 부디---'
'
어허. 도반의 손에 도가 있거늘 어디서 도를 찾아 배운단 말인가. 세상 살기 힘들어도 그냥 여여하게 일하고 밥 먹고 인연으로 만나지는 사람들 사랑하, 그렇게 살면 그게 도야. 도가 어디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든가.'
'
하오면 스님, 막막한 인생길을 어찌---'
'
물 따라 마음을 흘려보냈으니 인생길이 어찌 막막하겠는가? 마음이 없으니 막막한 인생길도 아기자기한 인생길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름에 달 가듯 살아가시게'
   인생길을 '막막하다.' '아기자기하다.' 구별 말고 구름에 달 가듯 여여하게 살아가라는 말에 나는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지. 그래서 다시 일어나 큰절을 올리고,
'
잘 알겠습니다. 스님 가르침 받아 산에서 내려가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함자를 평생을 두고 기억하고자 합니다.' 하고 여쭈었지.
'
정처 없이 떠도는 한 조각구름이라네.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
'
그러면 제자는 부운(浮雲)스님으로 기억하옵지요.'
'
아무려나'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기약 없이 헤어진 노스님을 군대 시절 인제 백담사 들어가는 한계령 계곡에서 정말 떠도는 구름처럼 다시 만났지. 그 무렵 난 중대 작전계로 보직을 받고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중대본부에서 비밀취급 인가를 신청했는데 군 정보부대에서 불가통지가 왔어. 6.25 동란이 일어 직후의 어느 날 밤 만주 독립군 시절의 동지라 하는 사람이 찾아와 잠시 나갔다 오겠다 평상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이후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정보기관에는 월북자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중대 인사계 박 상사를 통해서 그때 처음 알았어. 그제야 한 해에 한두 번씩 동대문경찰서 형사가 집 주변에 와서 이것저것 우리 가족이 사는 형편을 수소문했던 까닭을 알 수 있었어. 박상사의 말로는 연좌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 같은 월북자의 가족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한국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나 빨 신호등으로 진로가 막힌다는 거야.

그것이 두 번째의 좌절이야. 얼마나 허우적거리며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들어갔는데, 그 대학을 고학으로 마친다 해도 어디를 가나 빨 신호등이 내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 뻔하다면 그까짓 대학은 다녀선 무얼 하나,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대고 비빌 언덕은 없고 비바람 치는 망망한 들판뿐인데다가 여기저기 물웅덩이뿐이니 흠집투성이 가려운 몸뚱리 어데 가서 비바람을 그어야 하는가 하는 고뇌를 안고 있을 때였는데, 한여름의 집중호우로 유실된 작전도로의 교량을 공병부대원들이 다시 놓는 한계천 작업장 옆길을 지나가던 부운 스님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부르셨어.
'
여보게 도반, 날 알아보겠는가?'
'
! 스님!'
   나도 첫눈에 알아보고 전신을 감싸는 반가움에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합장배례를 했지.
'
여여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더니, 도반의 눈빛이 어찌 그리 담벼락 마주 보고 있는 쇠눈 같은가?'
'
스님, 담벼락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
담벼락이 어디에 있는고? 있지도 않은 담벼락 만들어 세워 놓고 소를 찾아 나서야 할 사람이 소가 되어 우두커니 서 있으면 어찌하는고?'
'
스님, 소를 찾기는커녕 가는데 마다 빨 신호등으로 막히고, 길은 또 어이 그리 험하고 멉니까'
'
그게 다 도반이 치야 할 업보라네, 전생의 업보'
'
제 전생이 그리도 업보가 많습니까?'
'
그렇다네, 도반은 전생에서 남이 누리지 못하는 것까지 다 누렸으니, 이승에서는 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
그러하오면 어찌 저를 산에서 내려가라 하셨습니까 ?'
'
산에 들어와 보리(菩提)를 구해 성불(成佛)하는 일도 누릴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네. 도반은 전생에서 누린 것들을 속세에서 중생들에게 다 베풀고 난 다음에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그런 업보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산에서 내려가라 할 밖에---'
'
스님, 베풀 것이 있어야 베풀지요. 이 한 몸뚱리 끌고, 길 찾아가기도 힘에 겹도록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
그렇겠지, 온갖 것을 다 누릴 때는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힘에 겨운가를 염두에 두지도 않은 눈이니 베풀 것이 없다 하겠지. 그 눈으로 마음 베이 물질 베보다 더 큰 것을 어찌 보았겠는가. 전생의 그 우매함을 온통 업보의 짐으로 둘러메고 험한 길을 가야 하니 힘겨울밖---, 그렇더라도 도반, 그 길의 끝에 열반으로 들어가는 해탈의 문이 있으니 힘들다 말고 열심히 가시게'
'
스님, 전생의 일을 제가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걸 제가 다 갚아야 한다고 하십니까? 저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
받아들이고 아니 하고는 도반 마음대로지. 허나 윤회의 도리를 외면하고 몸부림치고 발버둥쳐 보았자 누릴 것이 없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인생이 더 힘들고 허망하기만 하다네. 진작에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것 받아들이면서 여여하게 살아가노라면 그냥 마음도 몸도 편하게 살아지는 거라네'
'
스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데, 무슨 업보가 있고 베풀어야 할 것이 있다 하십니까 ?'
'
허허허…도반이 지금 혜능선사의 흉내를 내는 건가? 됐네 됐어, , 도반의 입에서 그 말 나오라고 이말 저 말 했네. 본래무일물이니 굳이 가야 할 길도 없고 또 갈 길 막아서는 담벼락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허허~~~본래무일물이라---, 그래 됐네 됐어'
'
하오나 스님. 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승의 제 삶이라면, 아니 본래무일물이 제 본색이라면 굳이 살려고 발버둥칠 일 없지 않습니까?'
'
그걸 어찌 내게 묻는가? 도반은 저기 달려가는 계곡물에 마음 실려 흘려보내듯 살아오지 않았든가?'
'
스님, 그건 생각과 말이 그렇지 살아가는 일이 그리됩니까?'
'
도반, 엄살떨지 마시게. 억울하고 힘겨워서 짜증 나고 그만 치워버리고 싶은 이승의 삶이겠지만 그게 도반이 살아가야 할 몫의 인생인 걸 어쩌겠나. 흘러가는 저 물같이 그냥 무심(無心)으로 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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