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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834회 작성일 12-12-03 20:12

본문

 
"나 어때요? 예전처럼 예뻐요?"
   옷을 갈아입고 침실에서 나와 전축 판을 고르며 고개를 돌려 성주에게 묻는 영주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이사는 웬---?"
"
나 옛날처럼 예쁘냐 묻잖아요. 지금, 옛날 그 삼청공원 하늘나리 꽃 마냥---"
"
글쎄다. 아무려면 그 시절 갓 피어난 수줍은 하늘나리 꽃만 할까 ?"
"
미워라. 그때처럼 예쁘다 하면 뭐 손해볼 거 있다---. 성주씨! 이 노래 기억나요?"
   영주는 눈을 곱게 흘기며 성주의 맞은 편 소에 앉았다. 전축에서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주의 고등학교 진학을 축하해 주던 날 영주와 함께 난생처음 구경했던 오페라가 명동에 있던 당시의 시공관에서 공연 중이던 <토스카>였다. 남주인공 카바라도시가 옥중에서 부르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과 여주인공 토스카가 부르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던 단발머리 여고생 영주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라 마주 앉은 영주의 얼굴에 포개어졌다.
   영주가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틀어 놓고 기억나느냐고 묻는 것은, 단순히 곡을 기억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이른봄의 꽃샘추위 바람이 부는 밤길을 명동에서 삼청동까지 '춥다'는 핑계로 팔짱을 꼭 끼고 걸었던 그날 밤을 기억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
넌 별걸 다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구나"
   성주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넘기려 하자 영주는 정색을 했다.
"
별거라니? 성주 씨! 이 노래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랑 같이 들은 애절한 사랑의 노래인걸. 그러니 나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노래라. 그날 밤 이 노래 들으면서 관중석에서 내가 성주씨 손을 잡은 일 기억나요?"
"
그런 일이 있었나? 난 기억 없는데---"
"
그렇겠지 뭐, 나는 늘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리며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고양이마냥 성주 씨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보아도, 성주 씨는 어쩌다 한 번씩 눈길은 주면서도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지는 않았으니까."
   영주의 원망 어린 추억담을 더 듣다가는 또 무슨 엄청난 주문이 나올지 몰라 성주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한나 아빠는 같이 안 살아?"
   성주가 조심스럽게 묻자 영주는 막혔던 봇물이 터져 쏟아져 내리듯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한나아빠는 떠났어. 아니 떠난 게 아니라 내가 한국으로 등 떠밀어 보냈어. 함부르크대학에 다니던 가난한 유학생이었어. 간호보조사로 독일에 왔지만 병원 측 배려로 야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독일 정식 간호사 자격을 따기 위해 직업학교 학생이 된 내가 간호사 실습을 하고 있던 병원에 그 사람이 위궤양으로 입원해서 만나게 됐어. 너무 가난해서 돈 벌면서 공부하다 보니 끼니를 제때 제때 챙겨 먹지 못하는 바람에 영양실조에 위궤양이 돼버린 거야. 그 사람을 보니까 문득 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성주 씨 생각이 나더라. 성주 씨도 지금쯤 학비 벌면서 공부하느라고 이 사람처럼 영양실조로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남의 일 같질 않았어. 처음엔 안타깝고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마음뿐으로 정성을 기울여 병상 시중을 들었는데, 차츰 가까워지면서 보니 외모도 분위기도 성격도 꼭 성주 씨를 닮았지 뭐야. 아니야,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처음부터 성주 씨와 닮은 데가 많아서 끌리기 시작했던 거야.
   퇴원할 무렵 내가 먼저 다가가서 매달렸어. '공부 끝날 때까지 내가 도와줄게요.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뒷바라지해 주겠어요. 뭘 바라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라도 뭘 바라거나 매달리는 일 없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함께 살면서 공부에만 전념하세요. 내게도 황상구 씨와 처지가 비슷한 오빠가 있어서 그래요.' 라고, 그래 그 사람 이름이 황상구야.
   그 사람도 그 무렵 많이 지쳐 있었던지 크게 마다하지 않고 내가 잡아끄는 대로 내 자취방으로 책 살림을 옮기고 그날부터 뜨께부부 살림을 시작했어. 정말이지 그 사람이 맘에 들거나 사랑을 해서가 아니고 혼자 돈 벌어가며 대학 다니고 있는 안쓰러운 성주 씨 모습을 그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성주 씨 돕는 일이라는 마음이 들어서였어.
   그렇지만 내가 유학생 황상구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간직한 다른 남자의 대역이라는 것을 그 남자가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어.
   보물 함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묵은 사진첩에도, 일기장에도 온통 성주 씨 이름으로만 채워져 있었으니까. 심지어 잠자리에 함께 들어서 애무를 받아도 그 손길이 황상구의 손길이 아니라 한성주의 손길이라는 환상에 잠길 때가 았으니, 어느 남자가 그걸 눈치 못 채겠어. 그래도 황상구 그 사람은 착한 남자였어.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대신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영주 씨 가슴속에 있는 첫 남자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겠느냐, 자기는 언제까지 정영주의 껍데기만을 차지하고 살아야 하는 거냐 슬픈 눈으로 호소하는 정이 많은 남자였어. 그럴 때마다 난 그 남자에게 죄스럽고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주 씨 생각이 더 나서 눈물을 흘려야 했고, 그러면 또 그러는 내가 싫어서 오히려 내가 화를 내면서 '뒷바라지해줄 테니 공부해서 학위 끝내고 한국으로 가서 출세하라고 했지, 누가 평생 같이 살자 했길래 내 마음속에 있는 소중한 사람 들먹이'고 소리를 지르곤 했어.
그렇게 세 해가 지내고 그 사람은 마침내 박사과정을 끝내고 학위를 받았어. 한국정부 부처에서 그 사람을 특채하기 위해 연락이 오가는 와중에서 그 사람은 많은 고민을 하는 눈치였어. 나와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도리로 보아서는 결혼을 해야 하겠지만 다른 남자를 가슴에 안고 사는 여자와 평생을 같이 할 생각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눈치였어. 아니 그건 그럴듯한 겉핑계였고 더 큰 걸림돌은 따로 있었어. 고위 공직자의 길이 열린 그 사람에게 나 같은 여자는 어울리기는커녕 방해물이 된다는 것이 뻔했으니까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을 .
   그 무렵 난 한나를 배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그 사람의 등을 떠밀었어. 상구 씨, 난 앞으로 당신이 가야 할 길에 도움이 안 되는 여자이니 제 그만 나를 두고 한국으로 떠나세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약속한 대로 아무 부담 느끼지 말고 홀가분하게 떠나세요. 내가 왜 당신보고 나를 떠나라고 하는 지 그 까닭을 말해 줄 터이니 잘 들으세요. 내 아버지는 남조선노동당 고위 간부로 6.25동란이 끝나갈 무렵의 휴전회담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북한행을 선택한 골수 공산당원이고, 내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체포되어 감옥에 있으면서도 아무 기약도 아무 소식도 없는 정인을 기다리며 사상전향을 거부하다가 숨을 거둔 맹목의 공산당 여맹원이에요. 게다가 난 지금 그런 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난 한국에서 살기 싫어서 외국에 나온 여자에요. 나는 지금 한국을 내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 내가 고위 공직자의 길을 가야 할 당신과 결혼해서 한국으로 돌아가 살 생각을 하겠어요. 나는 한국에서의 출길을 걷기 시작한 상구 씨 당신의 반려자가 될 수 없는 여자임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아무 미련 두지 말고, 아무 부담 갖지 말고 홀가분하게 떠나가세요. 난 여기 독에서 길이 열리면 북한에 계실 내 아버님을 찾아가 만나뵐 수 있다는 소망 하나에 의지하고 살아갈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감옥에서 태어나게 하고 내 어머니를 감옥에서 죽게 만든 한국에는 안 돌아갑니다. 그래도 내 가슴속엔 상구씨도 알다시피 평생을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떠나세요. 웃는 얼굴로 보내드릴 테니까---.
그렇게 등을 떠밀어 그 사람을 한국으로 귀국시키고 나서 여섯 달이 지나서 한나가 태어났어. 그 무렵 난 병원에서 알게 된 안젤라를 양어머니로 하는 입양 절차를 끝마치고 안젤라 엄마가 혼자 는 집에 함께 살고 있어서 갓난 한나를 안젤라 엄마가 키웠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춤주춤 떠나간 그 사람은 무엇이 두려웠는지 떠나간 날로 소식이 끊기고 지금까지 편지 한 장 없어. 기다리지도 않았지만 말.
"오빠! 정말 오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나'라고 하는 내 딸의 이름은 '한성주와 나' 라고 하는 내 운명의 첫 글자와 끝의 글자를 합해서 지은 거야. 한나가 내 운명의 소산이라는 건 오빠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한나의 이름을 오빠와 연관시킨 건 억지라고 오빠가 나무란다면 난 할 말이 없어. 그렇지만 어쩌겠어, 한나가 내 몸속에서 생겨날 때도, 아버지가 없어도 내 뱃속에서 잘 키워 세상 빛을 보게 하겠다고 결심할 때도, 또 한나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오빠의 얼굴만 떠오를 뿐인걸. 정말 오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애인데 왜 자꾸 오빠하고 연관되는지 나도 모르겠어."
   다시 만난 날부터 애써 '성주 씨'라고 바꾸어 부르던 호칭이 갑자기 '오빠'로 돌아가면서 영주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
알았다. 영주야. 더 말하지 않아도 아니까 그만 진정해라"
   성주가 영주 옆으로 옮겨 앉아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양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자 영주는 와락 성주의 품으로 파고들어 몸부림을 치며 격한 울음을 터트렸다.
"
야속해, 정말 야속해, 오빠 야속하, 하느님도 야속하, 모두 모두 야속해---"
"
그래, 나도 야속하다.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한 우리 운명의 신이 야속하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우리 전생의 업보가 야속하다. 영주야, 실컷 울어라. 야속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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