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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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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03 20:05 조회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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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째 마당 : 하늘나리 꽃

   성탄절을 며칠 앞둔 12월 하순, 초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가을 내내 안힘을 쓰며 가지에 매달려 있던 마지막 칠엽수 잎사귀들을 흔들어 떨어트리고 있는 호클라마르크 기숙사 안 마당에 영주는 해넘이의 설핏한 햇살을 받아 까만 윤기가 나는 물방 모양의 폴크스바겐 승용차를 세워 놓고, 상큼한 리본이 달린 둥근 채양이 있는 하얀 모자를 쓰고 발등까지 덮이는 갈빛 긴 드레스에 새하얀 머러를 길게 드리운 모습으로 성주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는 아침반 일을 끝내고 영학과 함께 출퇴근 길 중간에 있는 한국식품점에 들려 쌀과 깻잎 통조림을 사 들고 기숙사로 들어서다가 안마당에 서 있는 영주를 보자 솟아오르는 반가움 가운데 가슴속에서 덜컹하고 뭔가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낯선 이국땅 초겨울 저녁의 아무도 없는 기숙사 안 마당에 오롯이 서 있는 영주의 자태가 지 모르게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뛰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허둥지둥하는 성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영문을 몰라 '누구냐'고 눈짓으로 묻는 영학을 재촉하여 먼저 기숙사로 들여보내고 나서야 성주는 다가서서 영주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
주말도 아닌데 갑자기 웬일이야? 온다는 연락도 없이"
"
, 성주 씨하고 같이 가 볼 데가 있어서---"
"
지금? 어딘데?"
"
가 보면 알아요. 어서 타요."
   재촉에 끌려 얼결에 승용차에 올라탄 성주를 태우고 영주는 서둘러 차를 몰아 기숙사 마당을 빠져나갔다. 차가 긴 호클라마르크 거리를 지나 헤르네 가는 길로 달리도록 영주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말이 없는 영주가 오히려 불안해 성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영주야, 우리 지금 도대체 어디 가는 거야 ?"
"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 성주 씨"
   영주는 달래듯 한 손을 뻗어 성주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불안한 운전 상태여서 그 손을 뿌리칠 수 없다는 이유를 끌어대면서 성주는 잠자코 영주의 따뜻한 손에 자기의 손을 내맡겼다. 헤르네 시 외곽 순환도로인 헬케스캄프 링을 얼마간 달리다가 영주는 시립공원이 건너다보이는 한적한 길옆에 서 있는 전형적인 독일 농가 마당에 차를 세웠다.
"
여기가 어디지?"
"
내리세요. 여기가 영주의 새 보금자리, 독에서 다시 만난 성주 씨와 지낼 새 보금자리---"
"
아니 그럼---, 그 새 이리로 이사했단 말?"
"
뭘 그렇게 놀래요. 어서 들어가기나 해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성주의 손을 잡아끌며 영주는 즐거움에 들뜬 가벼운 발걸음으로 농가 본채의 오른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별채로 향했다. 별채의 현관문이 열리며 서너 살 박이 여자애가 "마미, 마미"를 부르며 쪼르르 달려나와 영주에게 매달렸다. 그 뒤로 살은 더 먹은 것으로 짐작되는 독일부인이 정겨운 미소를 지으며 영주와 성주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서 와요."하고 성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설프게 손을 내미는 성주에게 영주가 소개했다.
"
성주 씨. 이 분은 내 양어머니 안젤라. 내 딸 한나를 키워주신 분이죠."
"
만나서 반가. 헤르 한. 내 딸 영주와의 사연은 벌써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정말 반가."
   안젤라는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서 있는 성주가 귀엽다는 듯 다가와 살며시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
! 그렇습니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영주를 돌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성주 씨. 이 애는 내 딸 한나. 한나야,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
안녕하세요 아저씨, 한나에요."
"
! 한나야! 만나서 반갑다. 내가 네 외삼촌이다."
   성주는 처음 보는 한나에게 보다는 영주에게 하는 소리로 '외삼촌'을 강조하면서 한나를 안아 올렸다.
"
우리 한나 참 예쁘구나. 지금 몇 살?"
"
네 살, 아저씨는?"
"
오 나는, 나는 한나 엄마보다 네 살 더 많으니까 몇 살이지?"
"
응 그럼, 엄마가 삼십 살이니까, 아저씬 십네 살"
"
맞다. 그런데 한나야. 그럴 때는 삼십네 살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서른네 살이라고 하는 거야. 엄마 나이는 삼십 살이 아니고 서른 살이고."
   성주는 한나를 안은 채 영주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며 뭔지 모르게 거북하고 어색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한나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
한나야, 아저씨 힘들다. 그만 이리 오너라."
   안젤라가 한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한나는 도리질을 치면서 성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
그냥 놔두세요. 난생처음 만난 조카인데---. 그런데 이걸 어쩌나 엄마가 한나 만나러 간다는 말을 안 해서 선물도 못 가져왔으---. 미안하다 한나야, 다음에 올 때는 꼭 예쁜 인형을 선물로 가지고 올게. 안젤라, 미안해요. 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영문 모르고 영주한테 붙잡혀 오는 바람에 차림새도 엉망이고, 미처 선물도 마련하지 못해서---"
"
오 천만 말씀. 난 충분히 이해해요. 우리 영주가 서두르는 바람에 퇴근길에 영문 모르고 온 걸 아니까. 영주가 서둘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리지요. 이렇게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영주가 헤르 한 만나고 함부르크로 돌아와서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이리로 직장 옮기고 집 얻어 이사하느라고 많이 아주 많이 바빴어요."
"
엄마는 무슨 쓸데없는 말을---, 나 옷 갈아입고 나올 동안 엄만 홍차나 내 오세요. 성주씨! 아직도 커피보다는 홍차를 좋아하죠?"
"
응 그래, 아무거나--"
   성주는 커피보다 홍차를 더 즐겨 마셨던 십 오륙 년 전 자신의 기호까지 기억하고 있는 영주의 살뜰함이 눈물겨워 뭉클하고 가슴속에서 샘솟아 올라 눈으로 쏟아지려는 뜨거운 눈물을 참느라고 애를 쓰며 얼버무렸다.
   문득 영주와 나란히 앉아 따끈한 홍차를 마시며 토니 달라라의 '라 노비아'와 밀바의 '카사비안카', 그리고 알 마치노가 열창하는 '날이 갈수록 나는 너를 사랑해', 그리고 또 안 마가레트가 달콤하게 부르는 '슬로우리'를 즐겨 들었던 종로 2가 뒷골목의 음악감상실 '디 쉐네(Die Schöne)'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영주가 틀어놓은 듯 오래된 노래 알 마치노의 '날이 갈수록 나는 너를 사랑해'가 방안 가득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단발머리 소녀 시절 영주와의 추억이 담겨있는 정겨운 노래를 들으며 성주는 안젤라가 내온 홍차를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 따뜻한 홍차가 입안을 적시고 알싸한 맛이 혀끝을 통해 전해지면서 가슴속이 따뜻해지자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성주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영이 돌고 있는 거실 구석구석에서 성주는 예나 제나 깔끔하고 야무진 영주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집 같지 않게 모든 것이 잘 정돈된 집안을 살펴보다가 성주는 문득 집안에 남자의 흔적이 한 오라기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관 신발장에도,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남자 용품이 없었다.
"
그렇다면 영주는 아직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분명히 한나가 딸이라 했으니 결혼을 안 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이혼? 별거? ---"
   이런 궁금증 가운데 문득 엄 통역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날 영주가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
이제 여기 독에서 만났으니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으니까 당당하게 '성주 씨'라고 부를 거야. 내가 지난 십오 년 동안 가슴속에 묻고 사랑해 왔던 오직 한 남자 한성주 씨! 하느님이 무심하지 않아 이 불쌍한 년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당신을 내 옆으로 데려다 놓으셨으니, 나 오늘부터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잊지 않고 드릴 꺼야. 성주 씨, 기억나요? 십일 년 전 내가 강원도 인제에 있는 부대로 찾아갔을 때 내가 했던 말을? 당신은 내 청을 뿌리치고 무정하게 월남으로 떠나가 버렸지만, 그때 그 간절했던 내 소망을 하느님께서 기억하시고 이제야 이루게 해 주실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하느님께서 기억하시고 이제야 이루게 해 주다고 매일매일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한, 십일 년 전 영주의 소망, 그것은 다름 아닌 '오빠네 부대 근처에 방 한 칸 얻어서 오빠가 제대할 때까지만이라도 오빠의 여자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니 성주가 파월을 지원하고 전출특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월남으로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이 영주를 여자로 받아들여 주고 영주의 하늘이 돼 달라는 것' 이었다.
"
그렇다면 영주는 지금 혼자임이 분명하다. 남편이 있다면 아무리 나와의 인연이 끈질기다 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영주가 독에서의 첫 만남부터 '십일 년 전의 소원을 하느님이 이제 이루게 해 주셨으니 매일매일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소리친 것을 보아 이제부터 파독광부 삼년 계약 기간 동안 만이라도 부부로 살자는 요구를 할 것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 것을 아는 그럴 리가 없지. 만약에 그렇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하지만---"
   성주가 독에 와서 영주를 만난 날, 그 재회를 두고, '전생의 인연'이요 '하느님의 섭리'라고 까지 말하며 좋아했던 영주가 의논 한 마디 없이 서둘러 성주가 일하는 광산 가까운 도시로 직장을 옮기고 집까지 얻어 이사한 까닭에 짐작이 가 닿자 성주의 마음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마주 앉아 있는 안젤라가 무어라고 말을 걸어 왔지만 마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주는 마치 바늘방석 위에 앉아 있는 듯 안절부절이었다.
이윽고 영주가 옷을 갈아입고 침실에서 나왔다. 성주를 맞으려고 일부러 준비해 놓은 듯, 영주가 입고 나온, 부드러운 어깨 곡선과 고운 허매가 강조된 홈드레스는, 고등학생 때부터 성주가 세상의 어느 빛깔보다 좋아했던 주황빛이었다. 주황빛 하늘나리 꽃! 성주와 영주 두 사람에게는 주황빛 하늘나리 꽃에 얽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었다. 영주는 지금 의식적으로 성주에게 그 추억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명륜동 지국의 신문배달원으로 겨우겨우 등록금을 마련하며 중학교를 마친 성주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친척의 소개로 삼청동 자애 병원의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 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그해 여름, 보름이 넘도록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번갈아 쏟아지던 칠월 하순의 지루한 장마가 개이고 눈 부신 햇살이 반짝이는 한낮의 삼청공원 계곡을 산책하던 성주는, 흙탕물이 소리쳐 흘러내리는 계곡 한쪽 비탈에 수은 빛의 빗방울들을 잎사귀에 굴리고 있는 떡갈나무숲 한 모퉁이에 수줍은 듯 갓 피어난 한 포기 주황빛 하늘나리 꽃의 자태에 숨이 막혀 걸음을 멈추었다. 비가 갓 개어 나무 잎사귀마다 굴러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후두득 후두득 들려오는 숲의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피어난 주황빛 하늘나리 꽃의 자태가 너무 경이롭고 신비스러워 성주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부리나케 자애 병원으로 달려가 영주를 불러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영주를 재촉해서 그때까지도 콸콸 소리를 내며 흙탕물이 소리쳐 흐르고 있는 계곡 비탈의 하늘나리 꽃 앞으로 데리고 간 성주가 감동에 떨며 영주에게 "이 꽃, 꼭 너처럼 아름다워, 아니 신비스러워, 이 빛깔, 이 꽃 모양---" 하고 더듬으며 한 말을 두고 훗날 영주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말이라고 했다.
   성주를 오빠라고 부르며 성주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영주는, 이날 성주가 재촉하는 바람에 얼결에 손을 잡혀 영문 모르고 함께 달려간 계곡 산비탈에서 성주가 주황빛 하늘나리 꽃을 가리키며 '꼭 너처럼 아름다워, 너처럼 신비스러워' 하는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두 사람은 가까워지기 시작해 오누이처럼 지내게 됐고, 그로 말미아마 주황빛은 두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빛깔이 되었다. 비록 세 주일에 불과했지만, 강원도 인제에 있는 동안도 영주는 의식적으로 주황빛 원피스나 투피스를 입고 성주 앞에 서기를 좋아했다. 박 상사 부인의 안내로 부대로 성주를 처음 찾아오던 날도 영주는 주황빛 원피스에 연빛 양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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