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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의 갈매기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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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1-27 18:46 조회1,535회 댓글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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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늦게 잠이 들어 늦잠을 자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서둘러 헝크러진 머리 매무새를 고치고 겉옷을 걸치고 내다보니 꽃배달이 와 있었다. 붉은 장미 스물아홉 송이를, 푸른 파초잎을 받치고, 하얀 안개꽃과 연분홍 리본으로 장식한 화려한 꽃바구니였다. 꽃 사이에 꽂혀있는 하얀 봉투를 열어보니, 그리는 사람답게 예쁜 그림바탕 위에 그림같은 글씨체로, ”내 스물아홉 해의 삶을 순영씨 당신에게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윤중구” 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에게서 받아보는 꽃바구니와 사랑의 고백에 숨이 탁 멎어버릴 것 같았다.
초인종 소리를 들었는지 옆방에서 정애가 달려왔다.
이기 뭐꼬 ? 꽃바구니 아이가 ? 그 머스마 불붙었구마 ! 밤새 잠도 못 잤는갑다. 이렇게 일찍 꽃배달 시킨 거 보니..... 순영이 니 단대히 잡혔대이. 도망가기는 틀렸는갑다.“
정애는 꽃바구니를 안고 있는 순영이 부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간호학교 시절부터 단짝으로 붙어다녀 동성연애 한다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로 서로의 알몸까지도 속속들이 아는 사이여서, 그게 오히려 남자를 사귀는데 방해가 되어 서른 살이 다 되도록 연애를 못한다고 선배들이 충고를 하는 바람에 방을 따로 쓰고는 있지만, 한 방에서 함께 자는 날이 더 많은 둘이었다. 그런데 이제 순영에게 남자가 생겨 떠나갈 날이 가까이 온다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팔다리에 맥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정애의 고향은 밀양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맏딸로 태어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억척스럽게 공부를 했다. 학비가 안드는 간호학교를 나와서도 두 남동생을 공부시켜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일념으로 봉급을 타는대로 고향집으로 보내 밭도 사고 소도 사는 소문난 효녀였다. 서독에 와서도 여유가 있는 순영의 도움으로 두 남동생의 대학등록금을 힘들이지 않고 보내줄 수 있어서 순영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컸기에 더욱 마음이 허전해지는 지도 몰랐다. 남동생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시집도 안 가고 연애도 안 한다는 서독 올 때의 결심을 한 오라기의 흔들림 없이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순영이 곁에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순영이 이제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아 배신감이 들기도 했지만 부러운 마음이 더 컸다. 가끔씩은 마음에 드는 한국광부들이 기숙사로 찾아와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기에 갑작스러운 순영의 연애가 더욱 정애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니다 ! 삼년만 더 버티자 ! 막내동생까지 대학교 마치면, 그때는 내도 내 길 찾아가야제 !“ 정애는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갑자기 깊은 생각에 빠진 정애의 침묵이 마음에 걸려 순영이 물었다.
? 무슨 걱정있어 ?“
아니다. 내 머스마는 지금 어디서 뭘 하나 생각했다.“
~~~, 내 님은 누구일까 ? 어디에 계실까 ?“
그래 맞다 ! 내도 언젠가 그런 꽃바구니 앵겨줄 남자가 생길지...“
그러게 왜 그 아헨광산에서 일한다는 청년 사귀지 그랬어 ! 그만하면 괜찮든데, 성실한 사람같고...“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삼 년은 더 버텨야 한다 !“
막내동생 대학 졸업할 때까지 ? 하여튼 너같은 누나는 세상에 둘도 없을 거다. 네 동생들 머리털 뽑아 네 신 삼아도 그 은공 다 못갚을 꺼야.“
은공이 뭐꼬 ? 좋은 직장 들어가고, 좋은 처자 만나서 결혼해 갖고 부모님 잘 모시면, 그걸로 내는 만족이다. 그라믄 내도 마음 놓고 연애 좀 해 보고....“
그러자면 너무 늦잖아 ? 지금부터라도 시작을 해야지.“
이 가시나가 와 이라노 ? 안 그래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그러다가 다 된 죽에 코 빠치면 어이하라꼬 ? 내사 마 앞으로 삼 년은 눈 딱 감고 버틸기라.“
내가 니 동생들한테 편지해야 하겠다. 누나 공덕비 하나 안 세워주면 사람이 아니라고....“
와 또 이라노 ? 치와 뿌리라 ! 누가 그런 거 받자고 공부 시켰드나. 다 즈그들 잘 돼갖고 부모님 잘 모시라고 한거제. 야 야 순영아, 그만 밥 해 먹고 일 나갈 준비하자 !“
정애가 서둘러 쌀을 씻어 밥을 앉히는 동안에 순영은 된장을 쌀뜨물에 풀어 시금치국을 끓였다.
이튿날 아침 열 시, 이번에는 일백 송이의 붉은 장미가 들어있는 꽃바구니가 배달되어 왔다. „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순영씨에게 바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중구” 라고 쓰여진 그림카드에 순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남자 참 대책없이 밀어부치는구나 생각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엄마야 ! 이기 다 뭐꼬 ? 야 야 순영아 니 뭐시라캐도 이 머스마한테 시집가야 할끼다. 예사 머스마 아니다. 디게 물렸다 아이가 ? 절대 니 놓지 않을끼다.“
정애가 들어와서 백 송이의 장미꽃바구니에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내일은 또 몇백 송이의 장미를 보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순영은 근무를 마치고 중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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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근데 중구씨 왜 이리 집요혀요? 첫사랑치고 망설임도, 설레임도 없이 너무 확실하게 작업 추진.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겨? 간첩? 헐, 내가 장미꽃 100송이 샘나서 그러나?

암튼 흥미진진, 스릴만점입니다. 한겨레님, 고맙습니다.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ㅎㅎㅎ~~~ 간첩이 평범한 간호사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작업씩이나----  스님들 말로는 다 전생의 인연은 끊을 수가 없는 것이라 하니,  여기 베리에서 만난 벗님들과의 인연도 내생에 어떤 모양으로 만날지 모르는 것이니 소중하게 가꾸어 나갑시다 !

초롱님의 댓글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아우, 식구들에게는 만두국 끓여주고 저는 미역국 끓여서 김치 하나 하고 저녁을 뿌듯하게 먹고 왔어요. 이런 저녁엔 여왕도 부럽지 않아요. 한겨레님은 식사 잘 하셨어요?

저는 부처님을 존경하지만 전생과 내생은 믿지 않아요. 이생의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은 저에게 있으나마나 한 존재고, 이생의 제가 경험하지 못할 내생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전 이렇게 종교적 믿음이 부족한, 건조한 인간이어요. 용서해주셔요. ㅠㅠ

베리에서 만난 벗님들과의 인연은 이생의 인연으로도 충분히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잘 가꾸어나가고 싶어요.

한겨레님 방을 찾으시는 모든 벗님들, 좋은 저녁 보내시고, 푹 주무시고, 활기찬 한 주 맞으시기 바랍니다.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저는 영혼의 윤회를 믿는 불교신자입니다. 그 믿음을 토로한 자작시 한 수를 제 소설 열심히 읽어주시는 답례로 올립니다. 내용은 불경의 하나인 맹구경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Wie froh bin ich !

Wie froh bin ich !
Wenn wir uns begegnen
als eine Morgensternlilie
und ein Regentropfen,
auf unserer Seelen-Wanderung.

Rolle ich mich
als Freudebebender Regentropfen
auf deinem zarten Blütenblatt
lasse mich fallen in deinen Wurzelballen,
würde ich dich noch glänzender machen.

Wie dankbar  bin  ich !
Wenn wir uns begegnen
als eine blinde Schildkröte
und ein Einbaum,
auf dem unendlichen Ozean.

Lasse ich dich einsteigen
auf meinen rüstigen Platz
wie in dein heimliches Bett
und durchpflüge gegen die eindringenden  Wogen,
würde  ich  dich  ins Paradies  führen.

                얼마나 반가우랴 ?

만약에 우리가
우리들 윤회의 길목에서
한 그루 하늘나리와
빗방울로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우랴 !

나는
기쁨에 떠는 빗방울로
그대의 다소곳한 꽃잎 위를 굴러
뿌리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
그대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

만약에 우리가
망망한 바다에서
눈 먼 거북이와
통나무로 만난다면
얼마나 고마우랴 !

나는
그대의 아늑한 침대처럼
튼실한 자리에 그대를 태우고
거센 파도를 헤쳐나가
그대를 낙원으로 인도하리라.

초롱님의 댓글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참 아름다운 시네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을 인연의 힘으로 표현하셨군요. 이렇게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내용이라니... 독일어 버전도 좋고 한국어 버전도 좋습니다. 어느 언어로 먼저 쓰신 건지 여쭤 봐도 돼요?

두 번째 문단에 둘째 줄에서 Freudebebender는 형용사니까 소문자로 쓰는 게 맞지 않나요? freudebebender로. 아님 시적으로 하시느라 이렇게 쓰신 걸지도...

초롱님의 댓글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앗, 동시접속이어요.  안녕하세요, 트라움프님?

저 두 사람 결혼할 것 같아요, 그죠? 님은 아직도 불안하세요? 사실 너무 승승장구라서 무슨 소설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ImNebel님의 댓글

ImNebel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미안합니다, 제가 모든 분들의 즐거운 분위기를 깨지 않나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립니다.
한겨레님, 한국 강단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입니다.
한겨레님, 초롱님,물봉선님,스누피님,저랑 대화 했던 모든 분들이 저만 빼놓고 모두 조리있게 글 잘 쓰신답니다.
안부 전하랍니다.
저 꽁무니만 따라 다니면서 트집 잡는 사람이 또 하나 동지를 데려와 그 사람에게도 베를린리포트 즐겨찾기 권했답니다.
저 더러 이제 님께  그만 억지 부리지 말고 깨갱하랍니다.
님이 마음이 넓으셔 제 억지 를 다 들어 주시는 좋은 분이랍니다.
이 것 보세요. 저 같은 사람을 상대 함으로서 님 들께 칭찬이 높이 솟아 오르는 것을, 누가 그러더라고요.
선 보러 갈때 절대 자기 보다 더 예쁜 사람 데려 가지 말고 아닌 쪽으로 해야 더 빛난다고요.
전 지금 저 를 희생하면서 다른 분 들을 빛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겨레님은 여성 fan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직접 남자분 들께 전화해 물어 볼랬더니 저 를 말렸습니다.
자기네도 좀 야한 부분 때문에 남자 분들께  권하기 쑥스러웠는지 그래서 저는 원래 눈먼 사람이니까 아무 상관 없으니 제가 물어 본다니까 또 제가 실수 할까봐, 다음 부터는 직접 보면서 말하라면서 제가 말 주변 없는 것을 알고 한국 왔을때 직접 물어 보랍니다. 이상 합니다, 전 괜찮은데 자기네들 끼리 내숭들 떨어서리, 기회 봐서 남자 분 들께도 권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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