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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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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1-30 18:38 조회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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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화천 오음리 파월장병 훈련소 입소 명령이 입소 일자 사흘을 앞두고 떨어졌다. 성주는 영주가 알면 부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모르니 성주가 떠난 후에 영주가 알도록 해 달라고 부대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지옥 훈련이라고 부르는 한 달 동안의 지독한 파월 훈련을 마치고 월남 맹호부대 공병참모부에 전입한 성주는 박 상사 내외와 주고받은 편지, 성주가 부대를 떠난 이튿날에야 박 상사가 전해 주는 성주의 편지를 뜯어본 영주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부림치며 대성통곡을 하다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입 초의 어수선한 현지 적응 훈련기간을 거쳐 공병참모부 정보과에 자리를 잡은 성주가 비로소 안정을 찾고 인제의원 정영주 앞으로 서너 번 편지를 보냈지만 무슨 영문인지 답장이 없었다. 그렇게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 후 성주는 석 과정의 맹호부대 월남어 교육대를 수료하고 군사정보대 파견 실습을 거친 다음에 월남군 당국이 실시하는 월남어 통역자격시험에 합격, 월남에 도착한 지 여섯 달 만에 월남정부가 지급하는 통역수당을 군 봉급 외에 더 받는 공병참모부의 월남어 통역하사관으로 정식 발령한다는 특명을 받았다. 군 복무 의무기간을 일 년 더 연장하면서까지 스물네 달을 주월 맹호사단 공병참모부 월남어 통역하사관으로 복무한 성주가 맨 처음 맡은 일은,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중부 월남의 1번 국도와 6번 국도 개통을 위해 실시한 <오작교 작전>으로 피해를 당한 호아다 마을 주민을 위로하고 주민이 원하는 피해 복구작업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또 복구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군부대에서 조달할 수 없는 기와· 특수 목재· 수동식 펌프 등의 민간용 건축자재들을 구하기 위해 19번 국도 주변의 기가마들을 찾아다니는 한편 군용기를 타고 사이공까지 출장을 다녀야 했다.
퀴논 꽁데고등학교 강당 신축공사와 퀴논 공설 운동장 실내 체육관 신축공사에서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월남 방문 시기에 맞추어 공사를 완공하기 위해 밤샘작업을 계속하는 바람에 속내를 모르는 월남 고위 공무원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받았.
퀴논 시 중심가 로 팔각정 신축공사 때는 공병참모가 사람을 시켜 서울 남산 팔각정의 단청을 천연색 사진기로 촬영해 오도록 해 월남인 화공들을 독려해 그 무늬와 단청을 그대로 재현하는 한편, 멀리 19번 도로의 끝 풀레이쿠와 콘뚬 등지 삼림지대의 제재소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팔각정의 기둥감이 될 아름드리 원목을 찾아내기도 했다. 맹호부대 사단 사령부 인근 깐안 마을에 주민의 숙원사업인 성당을 신축해 줄 때에는 월남인 목수들과 미장공들의 작업을 지휘하면서 목수의 딸인 구웬 티 낌(元氏金燕)이라는 월남처녀로부터 애틋한 고임을 받는 로맨스도 있었다.

   맹호 9호 작전 때에는 중부월남 깊숙이 잠입한 월맹정규군 1대가 울창한 대밭 속에 숨어 있는 것을 포착하고 이를 포위하고 포격으로 섬멸하는 과정에서 폐허가 된 답다 강변 풍전 마을의 가옥 예순 채를 다시 지어주면서, 민간용 발전기 한 대와 수동식 펌프 예순 개를 구하기 위해 사이공 초론 상가를 두 번씩이나 왕복하면서, 동칸다이로(東慶大路)의 동칸(東慶)호텔 레스토랑에서 월남인 바이리니스트가 성주를 위해 특별 연주하는 한국민요 '도라지'에 감격해 한 달 통역수당을 팁으로 건네주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성주의 월남복무 스물네 달은 그렇게 분주하게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나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문득문득 몸부림쳐 우는 영주의 모습이 떠올라 성주를 괴롭혔다.

   그렇게 헤어져 소식이 끊긴 지 열한 해만에 독 땅에서 다시 만났으니, 영주가 "하느님이 무심하지 않다."고 하면서 "전생에 인연이 있는 운명"이라고 마음 들떠 좋아라 하는 심정이야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이렇게 긴 헤어짐이 있기 전 강원도 인제천 자갈밭에서 성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강조하는 영주의 눈빛이 성주에게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
영주야, 이젠 네 얘기 좀 해 봐. 왜 간호학교를 안 가 로 왔어? 더라도 학교 졸업하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결혼은 물론 했겠지?"
"
졸업? 결혼? 이게 다 무슨 소리래? 이것 봐요, 성주 씨. 이 정영주의 하늘은 오직 한성주 한 사람뿐이라는 말, 벌써 잊어버렸지. 하기는 그 자리에서 귀담아듣지도 안 했을 테니까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만. 성주 씨,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는 마음 주고 의지하는 사람을 한 해 반이나 헤매 돌며 천신만고 끝에 첩첩산중까지 찾아갔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못 본 체 그 자리에 팽개치고 더는 좇아갈 수도 없는 월남으로 도망쳐 버렸는데, 그렇게 버림받은 여자가 무슨 정신으로 학교 다니고 결혼을 했을라---"
"
무슨? 버림받은 여자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때는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정말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파월을 자원하기 전에 네가 찾아왔더라면 무언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
아니, 달라질 것도 없지 뭐, 월남 가는 일이 없었다면 또 이렇게 말했겠지. '난 책임 못 질 일은 못해, 내가 널 책임질 능력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 줄래.' 하면서 나를 밀어냈겠지 뭐."
   성주는 영주가 제 속을 읽은 듯한 말을 하자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
그런데 내가 월남 가서 바로 인제의원으로 편지했는데 왜 답장이 없었? 또 제대하고 인제 의원을 찾아가서 물어도 삼청동 자애 병원 찾아가서 물어도 모두들 네 소식을 모르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독에 오는 알리지 않았어? "
"
그럴 일이 있었어. 인제 의원에서는 성주씨 월남으로 떠나고 한 달 만에 부랴부랴 떠나야 할 일이 있었고, 말없이 나온 주제에 자애 병원으로 다시 들어갈 염치는 없었, 춘천 개인병원에 잠시 있다가 왔는데---, 할 말이 너무 많아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네. 잠깐만, 지금 몇 시지? 나도 그렇지만 내일 아침 병원 근무 들어갈 사람들이 있어서 타고 온 전세버스가 여섯 시에 출발하기로 했거든. 한 시간 남았네, 한 시간 동안 나 성주씨 살고 있는 기숙사 보고 갈래, 여기서 얼마 멀지 않다면서---"

   영주가 서두르는 바람에 성주는 늦가을의 저물어 가는 햇빛이 인도 위에 떨어져 나뒹구는 칠엽수 잎사귀 사이에서 부서지는 듯한 스산한 호클라마르크 거리를 나란히 걸어 레크링하우젠 남역 옆에 2차대전의 유령처럼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90번지 기숙사로 갔다.
아직 아무도 피로연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 기숙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래서 더욱 유난스럽게 삐걱거리는 나무 층계와 마루 복도를 걸어 312호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영주는 애써 오래 참은 듯 와락 성주의 품에 뛰어들어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나이 어린 처녀가 겪어야 했을 가지가지 고달픔과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피붙이 같은 정을 주었다가 어처구니없이 헤어진 남자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었던 성주는 말을 잃고 눈물을 흘리며 영주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오랜 서러움에서 나오는 영주의 흐느낌은 격렬한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영주의 따뜻한 혀가 더듬어 들어오자, 품에 안긴 영주의 존재는 간 곳 없고 입속에서 꿈틀거리는 혀가 영주인 듯 성주는 입속의 영주가 이끄는 대로 어딘가 알 수 없는 묘한 운명의 섬으로 끌려갔다.
"
이 여자는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토록 나를 원하는가? 또 우리는 무슨 몹쓸 운명을 타고 태어났기에 서로 아끼고 원하면서도 남들처럼 편안하고 즐겁게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눈물 속에서만 만나야 하는가? "
성주는 마음속으로 한탄하면서 문득 어느 서양시인의 시 한 귀절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눈물, 눈물이여 !
어느 거룩한 절망의 심연에서 솟아 흘러넘쳐
가슴을 채우고 눈으로 쏟아짐을
나는 몰라라."

겨우 진정이 된 듯 영주는 양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부끄러운 듯 방그레 웃었다.
"
인제에서의 첫 번 키스도, 오늘 두 번째 키스도, 우리 키스는 왜 늘 맛이 짭짜름할까?"
   그랬다. 두 사람 다 아프고 시린 가슴을 안고 헤어져야만 했던 이별이 있은 지 열 한 해 만에 수륙만리 머나먼 이국땅에서 숙명처럼 다시 만나 애절한 반가움에 못 이겨 서로 끌어안고 나눈 깊숙한 입맞춤은, 두 사람 다 눈물범벅이어서 인제천변에서의 첫 입맞춤과 같이 뒷맛이 짭짜름했다.
영주는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한 인제에서 헤어진 이후의 살아 온 이야기를 끝내 뒤로 미루고, 집 전화번호와 근무하는 병원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다음 주말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함께 온 일행들과 전세버스를 타고 떠나는 영주를 배웅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초저녁 호클라마르크 거리에는 늦가을의 차가운 가랑비가 뿌리고 있었다. 성주는 싸늘한 바람에 날리는 가랑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는지도 모르고 바닥 모를 깊은 상념 속에 잠겨 터벅터벅 걸었다.
"영주, 너는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 전생에 우리는 어느 세상에서 무엇으로 헤어졌기에 이승에서 이토록 서럽게 태어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하는가? 정영주! 따뜻하고 밝은 여자, 나는 너를 평생토록 착한 누이로 옆에 두고 싶었는데, 너는 다른 것을 바라는구나. 엇갈려 열한 해라는 긴 세월이 흘렀어도 너는 여전히 해바라기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바람에 흩날리는 빗줄기 가운데 문득 아내 오복의 원망하는 듯한 자태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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