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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900회 작성일 12-11-30 18:34

본문

   이모가 차려주는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성주는 더 깊은 이야기를 둘이서만 나누기 위해 영주를 데리고 인제읍 서남쪽을 흐르는 인제천 가로 나갔다. 사람들은 흔히 소양강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인제천(麟蹄川)이다. 설악산 북쪽 소청봉·마등령·늘목령·황철봉·미실령·신선봉·진부령 등등의 골짜기 물을 모아 흘러내리는 북천과 대청봉 남쪽 청봉에서 오색 약수터에 이르는 독주골 깊은 계곡의 물과 대승폭포·12 선녀탕·옥녀탕 등 수많은 폭포와 ()의 물을 모아 급하게 흐르는 한계천 물이 인제군 합강리에서 만나면 비로소 '인제천'이 되고, 이 물이 흘러 군축령 계곡을 빠져나가 남전리 들판을 가로질러 3군단 사령부를 싸고돌아 구만리를 지나 양구군으로 들어서면, 여기서부터 비로소 '열여덟 딸기 같은 순정을 지닌 처녀가 뻐꾸기 우는 갈대밭에서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떠난 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소양강'이다.
   인제군청 정문에서 시작되는 내리막길1킬로미터 걸어 내려가면 자갈밭 너머로 화강암 계곡을 소리치며 흐르는 인제천을 만나게 된다. 많은 시인들이 강물이 속삭인다고 노래하지만,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군축령 계곡을 지나기 전까지는 속삭이며 출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치며 달려간다. 특히 달 밝은 밤 인제천 자갈밭에 앉아 있노라면 강물이 달려가는 소리가 마치 천군만마가 들판을 가로질러 진군하는 듯하다.

"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면서 밤길 달려가누나"
소리치며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물끄러미 앉아 있던 영주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
왕방연의 탄식 시조인가 ?"
"
왜 아녜요. 금부도사 왕방연이 임금자리에서 죄인 노산군으로 끌어 내려진 단종을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가는 길에 냇가에 앉아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여의옵고, 이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라고 탄식했던 강물도 이 강물처럼 소리치며 흘렀던 게야. 이 강물 소리를 들으니 정말 그 심정을 알겠네.
'
천만리 머나먼 길 돌아 고운 찾았더니 은 날 버리고 천만리 먼 길을 떠난다네
저 물도 내 안 같아 소리쳐 울며 달려가누나' 어때요? 시조가 됐나요? "
   영주는 울고 있었다. 애써 성주를 외면하고 강물만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하는 영주가 너무 안쓰러워 등 뒤에서 끌어안자 영주는 와락 돌아앉으며 눈물 젖은 얼굴을 성주의 얼굴에 벼댔다. 눈물에 젖은 첫 입맞춤이었다. 목말라 헤매던 사슴이 시냇물을 만난 듯 갈급하게 성주의 입술을 탐하던 영주는 깊고 오랜 입맞춤에 마음과 몸을 놓아 버린 듯 성주의 무릎을 베개 삼아 강 가 자갈밭에 누워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5월의 하늘을 배경으로 클로즈업되는 성주의 얼굴을 오래오래 올려다보았다.
"
, 눈부셔라! 오빠, 오빠 얼굴을 쳐다보면 왜 난 항상 눈이 부실까."
영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수줍고 달콤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종알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
또 바보 같은 소리---, 누워서 하늘의 해를 올려다보니까 눈이 부신 거지 그게 어디 내 얼굴을 봐서 눈부신 거니?"
"
아이, 목석 같은 우리 오빠. 하여튼 분위기 깨는 덴 일등이라니까. 저렇게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목석인데, 내가 뭣에 홀려서 이러고 찾아다니는지 몰라. 그런데 오빠, 아무리 목석이라도 꼭 들어주어야 할 소원이 하나 있어.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이것 하나만은 꼭 들어주어야 해! !"
"
뭔데? 들어 봐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 하지---, 말해 봐."
먼저 꼭 들어준다고 약속하고---"
   영주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성주의 새끼손가락에 걸며 약속을 하라고 졸라댔다.
"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덜컥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할 일이면 어떡하라?“
"
오빠, 나 아까 말했지? 오빠는 나한테 특별한 존재라. 내게는 오빠가 하늘이고 아버지라는 말, 그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서울 올라와서 들어간 학교 역사 시간에, 아득한 옛날 곰네(熊女)가 한웅 천황으로 인해 여자가 되고 한웅 천황으로 인해 단군이신 한검을 낳았다는 단군설화를 배우면서 나는 그 옛날 한웅 천황이 곰네에게 하늘이고 아버지고 남편이었듯이 내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냥 생각만 한 게 아니고 그 후부터 아침에 일어날 때,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꼬박꼬박 기도하기 시작했어. '내게 하늘이 되어주고 아버지가 되어 주고 짝이 되어 줄 사람을 보내달라'. 그런데 기도 시작한 지 꼭 백 일되는 날에 오빠가 우리 병원 집에 가정교사로 왔어. 그날 오빠가 처음 병원에 온 날, 오빠를 처음 보는 순간에도 나는 지금처럼 눈이 부셨어. 그리고 나는 들었어.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저 이가 네 하늘이다. 네 아버지다. 네 짝이다.'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지만, 오빠와 내가 만난 건 그냥 우연히 만난 게 아니란 말. 하느님이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영주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빠를 보내 주셨단 말. 근데 오빠는 그걸 모르고 있어. 나는 알고 있는데 오빠는 모르고 있단 말. 오빠, 나 오빠에게 달리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다만 오빠로 밀미암아 여자가 되고 싶고, 오빠로 말미암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뿐이야. 그래서 어머니가 무서워 집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면서도 이렇게 오빠를 찾아온 거야."
   금방이라도 품 안으로 달려들 듯한 기세로 쏟아내는 영주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성주는 말문이 막혔다. 언제부터인가 영주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과히 싫지 않아 내심으로는 그 달콤함을 즐겨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영주와 결혼해서 부부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보지도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니 대상이 누구라 하더라도 아직은 결혼 같은 문제는 염두에도 두지 못할 만큼 혼자 힘으로 공부하며 살아가기에만도 벅찬 삶의 여정을 성주는 걷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남자의 이기심 아니 남자의 이중성이라고 하는 걸까? 성주의 남성은 이미 영주를 여성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으로 꿈틀거리고 있는데, 성주의 지성은 '한 여자의 일생을 책임질 능력을 갖추기 전에 일을 저질러서는 안 돼!'라고 차갑게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
영주야, 네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니? 나도 너를 좋아하는 게 사실이고. 그게 비록 너를 여자로서 좋아하는 건지 새로 생긴 누이로서 좋아하는 건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만 이렇게 규율에 얽매인 군대 생활을 하는 날 찾아와서 무얼 어떻게 하자? "
"
오빠를 찾아 나설 때는 오빠네 부대 근처에 방 한 칸 얻어서 오빠가 제대할 때까지만이라도 오빠의 여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오빠를 만나면 그렇게 떼를 쓸 참이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겨우겨우 찾아냈더니 이젠 아예 좇아갈 수조차 없는 월남으로 떠난다? 그래서 아까부터 생각해 봤는데, 오빠 월남으로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이 영주를 여자로 받아들여 주고 영주의 하늘이 돼 주어야 해. 그게 지금 내가 오빠한테 바라는 딱 한 가지 소원이야.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 ?"
   성주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제 새끼손가락에 걸고 흔들어대며 영주는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졸라댔다.
"
이 철없는 아가씨야, 그래서, 그렇게 하다가 내가 월남으로 떠나고 난 다음에 넌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추억만 간직하고 살아갈 거야? 또 네 말대로 나 때문에 네가 엄마가 되면 그 아기는 어떻게 키울려고? 내가 옆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월남에 가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처녀가 결혼도 안 하고 비 없는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런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이 철부지 아가씨야. 그러지 말고 이제 날 만나 봤으니까 서울로 돌아가, 돌아가서 네가 그렇게 원했던 메디센터 부속 간호학교에 들어가 공부해라. 공부해서 정식 간호원이 되면 네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잖아. 이게 도대체 뭐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고 학교도 중단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난들 마음이 안 아프겠어? 네가 간호학교 졸업하고 정식 간호원 될 때까지 나 도망가지 않고 널 기다릴 테니까 걱정 하지 말고 서울로 돌아가! 내 한 가지는 약속하마! 월남에서 무사히 돌아오고 내가 한 가정을 책임질 만한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때 우리 다시 네 소원이라는 걸 얘기하기로 약속하마. 그 이전에는 그냥 오비와 누이로 머물렀으면 한다."
"
싫어. 벌써 내 마음 다 밝혀버렸는데 어떻게 그냥 누이처럼 지내? 오빠 속마음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난 다 알. 오빠가 뭐라 해도 지금 내게는 오빠가 내 하늘이 되 주어야 해. 그래야 내가 살 수가 있어. 도대체 하늘이 없는 데 장래가 어디 있,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어? "
   다소곳했던 예전의 영주가 아니었다.
"
영주야 우리 약속하자, 나 월남 갖다 오고, 그동안 너는 간호학교 졸업해서 정식 간호 되고, 그렇게 돼서 우리 다시 만나기로---, 이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킬 테니까 지금은 자애병원으로 다시 돌아가 간호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다시 시작해, 알았니?"
"
자애 병원 아버지한테는 말도 없이 나왔는데 염치없이 어떻게 또 들어가. 나 여기 인제 오기 전에 있던 서울 병원에서도 간호학교는 보내 준다고 했어. 그러니 오빠, 나 오빠가 시키는 대로 서울 돌아가서 간호학교 다닐 테니까, 단 한 주일이라도 좋으니까, 오빠 월남 가기 전까지만 나 저녁에는 오빠 팔 고 잠들고 아침에는 오빠 품에서 눈 뜨고 일어나게 해 줄 순 없어? ? 그러면 오빠, 나 오빠한테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부담도 지우지 않고, 그냥 멀리서, 아주 멀리서 오빠 그림자만 보고 살."
"
영주야, 그건 안 되는 거야. 장교도 하사관도 아닌 사병의 영외 거주를 허락할 군대도 아니고, 또 부대에서 특별히 허락한다 하더라도 내가 나를 허락할 수가 없는 일이야. 자 그만 일어나거라, 병원에 들어가 봐야 잖아.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 그리고 나 매일 저녁 아홉 시까지는 박 상사 댁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그리로 연락하---"

   영주는 그날로 시외버스 정류장 아랫골목에 정갈한 방을 하나 얻어 놓고 매일 밤 박 상사네 집 골목에 서서 성주를 기다렸다. 영주의 타는 듯한 목마름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성주는 모른 체라 하면서 늘 영주를 방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어김없이 부대로 돌아갔다.

영주는 낮에도 틈틈이 부대를 찾아와 드러내 놓고 '한 상병의 애인'이라고 밝히면서 사 갖고 온 간식거리로 부대원들의 환심을 사는 한편 중대장에게도 선물 공세를 는 바람에, 중대장까지도 "한 상병, 보자 하니 월남 가는 거 포기하 제대 말년에 여기서 살림 차려야 는 거 아? 어머니는 알고 계시는 일이야?" 하고 걱정을 했다.
"
아무래 어머니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네요. 그냥 내버려두면 무슨 일 나겠네. 영주 양 불쌍한 거 생각하면 한 선생이 그냥 안아주면 될 테지만, 그것 아닌 것 같. 하여튼 결혼할 작정 아니면 조심해요, 한 선생."
   영주가 매일 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이모가 걱정 반 안타까움 반으로 갈팡질팡하듯 성주 역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주를 하숙집 방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면서,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 끌어안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하면서도 '안돼! 안돼!'하고 도리질을 하며 부대로 달려가곤 하는 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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