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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문득 삼청동 자애 병원 박 원장 부인이 영주의 신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성주에게 조심스럽게 해 주던 말들이 떠올랐다.
영주는 천애 고아였다. 아니 낳자마자 부모들로부터 버려져 자신의 출생 사연을 모르는 고아다면 라리 일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은 없었을 것이라고 박 원장 부인은 안타까워했다.
감옥에서 피투성이로 받아낸 갓난 영주를 길러준 양아버지 벌교의원 정 원장은 노환으로 말미암은 임종을 앞두고 중학생인 영주를 불러 앉혀 놓고 영주에게는 청천벽력과 다름없는 출생에 얽힌 사연들을 낱낱이 들려주고,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키워 달라는 당부와 함께 자애 병원 박 원장에게 영주를 보냈다고 했다.
철이 들면서부터 이웃 아주머니들이 어쩌다 말 한마디 이상하게 뱉어 놓다가 당황하며 말막음을 한다든가 또는 어머니를 비롯한 오빠 언니들이 간혹 자기만 모르는 가족의 비밀이 있는 것 같은 어색한 상황을 보여준다든가 하는 일 들 때문에 전혀 짐작이 없었던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런 짐작과 상상이 사실로 확인됐을 때 열두 살배기 여중 2학년생이 받은 충격과 절망감의 무게를 성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한집안처럼 지내왔던 벌교의원 정 원장의 유언장을 들고 찾아온 여중생 영주를 받아들인 박 원장 내외 역시 영주의 친아버지와 함께 동경유학을 했던 가까운 사이였는데다가 마침 병원에 일손도 리던 참이라 병원 일 경험이 있는 영주가 대견스러워 곧바로 야간중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었는데, 대학 시절 천재 소리를 들었던 친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학업성적은 늘 뛰어나다고 박 원장 부인은 혀에 침 마를 새가 없이 칭찬을 했었다.

광복 직후 삼팔선 이남에서 박헌영과 몽양 여운형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나 마침내는 박헌영을 도와 남로당을 결성한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공산주의 이론가 정하섭이 미 군정청의 좌익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 투쟁하면서 동거했던 무당 소화에게 남긴 일점혈육이 바로 영주였다. 그러나 패색 짙은 전쟁의 와중에서 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된 수많은 인민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소화의 뱃속에서 자신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던 정하섭은 아무 기약도 남기거나 전하지 않은 채 휴전 협상조건으로 이루어진 송환 포로 대열에 끼어 임진강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북한으로 갔다.
한편 신분의 엄청난 차이로 함께 있기만 해도 황감하기만 했던 정인(情人) 정하섭의 영향으로 6.25사변을 남조선 인민해방전쟁으로 받아들여 인민군 진주와 함께 여맹위원장으로 변신했던 무당 소화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어릴 적부터 꿈속에서나 그리던 도련님 정하섭과 보낸 꿈만 같은 두 달 동안의 신접살림이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풍박산이 나면서 '골수 공산주의자'의 죄명이 붙어 체포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영주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했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는 가 봐, 친부모로 알고 살아온 정 원장 내외가 양부모였다는 것과 또 친부모의 비극적인 사연들을 들어 알고도 영주는 여중생답지 않게 너무 의연해. 고향 마을의 소친구 시절부터 동경 유학시절에 이르기까지 영주의 친아버지가 모든 일에 늘 그렇게 의연해서 우리들의 맏형 노릇을 했던 일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 비록 야간학교지만 여고를 졸업하면 메디 센터 부속으로 있는 '간호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가 나이팅게일과 같은 간호원이 되겠다고 중학생 때부터 구체적인 인생 설계까지 가진 것도 제 친아버지와 조금도 틀리지 않아서 우리들 마음을 더 아프게 해."

성주가 보기에도 영주는 그런 아픔과 슬픔을 가슴속에 지닌 처녀애 같지 않게 의젓하고 품위가 있는 데다가 병원 환자나 손님을 대하는 자태가 한결같이 상냥스럽고 깔끔해서 더욱 애틋한 정이 들었었다. 그런 영주가 전방에서 사병으로 군 복무를 하는 성주를 터무니없이 갑자기 찾아와 "빨래도 해주고 싶고, 입을 옷도 챙겨주고 싶고, 밥상도 차려주고 싶다."고 접었던 마음을 펼쳐 보이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영주는 한번 잘못으로 잃어버렸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찾아낸 보물을 반갑고 소중해서 어루만지듯 성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고 웃었다.
"
내가 어리석어서 한 번은 놓쳤지만, 이젠 다시 안 놓칠 거야. 근데 오빠, 월남 간다는 게 정말이야? "
"
, 특명을 받았으니까 "
"
안 가면 안 되는 거야? "
"
그냥 특명을 받은 게 아니고, 내가 자원서를 내서 받은 특명이야 "
"
아니 오빠, 지금 제 정신이야? 남들은 전쟁터 안 가려고 별별 수단 다 쓰고 심지어 탈영까지 한다는데, 자원이라니? 어머니가 오빠 월남 가는 걸 그냥 두고만 보실 것 같아?"
"
안 그래도 석 달 전에 내려온 특명을 여기 이모가 엄마에게 연락해서 엄마 극성으로 취소시켰다. 하지만 이젠 엄마도 포기하셨어. 아니 포기가 아니라 아들에게 설득당했다고 할까, 하여튼 이젠 못 가게는 안 하셔"
"
월남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기를 쓰고 가려고 해?, ? 월남 가서 뭘 하려고?"
"
무얼 하긴, 영주야, 좀 주제넘고 거창할는지는 몰라도 월남에 전쟁이 있기에 가려고 하는 거야. 영주의 부모님과 내 아버님을 앗아간 전쟁의 참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가려는 거야. 또 월남은 이 시대 이 세계의 희생양이야. 거기에 어떤 해결책이, 아니 이 시대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 있을 . 그 해답이 내 생애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
"
난 오빠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어. 문학가가 되겠다는 오빠의 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데, 운이 나빠 전쟁터에서 개죽음하면 꿈도 야망도 허사가 되는 거 아니야?"
"
걱정하지 마, 영주야. 우리 어머니가 꾼 내 태몽에 의하면 아직 내 고생이 많이 남아서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 그 얘긴 그만하고 이제 네 이야기 좀 들어보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전방까지 날 찾아온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때는 언제고 "
"
오빠, 나 오빠를 사랑해.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고, 오빠가 없으면 이 세상 살아갈 의미가 없을 만큼 절실하게 사랑해. 어머니가 그걸 눈치채시고 오빠 앞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도 무섭게 대하시는 바람에 '그까짓 것 잊어버리자'하고 도망쳤지만, 아니야 잊을 수가 없는 거였어, 오빠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여자라는 걸 처음 스스로 깨달았고, 오빠를 통해서 나를 낳아준 부모님의 아픔과 슬픔을 알 수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잊을 수가 있겠어. 오빠한테는 이 영주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겠지만, 영주한테는 오빠가 하늘이고 아버지고 그런 특별한 존재야. 아침 해가 오빠의 얼굴 위에서 떠오르고 저녘 해가 오빠의 등 뒤로 지는 하루하루를 보낼 만큼 오빠를 사랑해. 하지만 오빠, 나 오빠하고 결혼하겠다는 욕심은 없어. 어머니 말씀이 맞아. 골수 빨갱이의 딸년, 무당의 딸년, 게다가 천애 고아 주제에 넘볼 것이 따로 있지, 감히 오빠하고 평생 부부로 살 꿈을 어떻게 꾸겠어. 그래도 오빠를 미친 듯이 찾아다닌 건, 단 한 가지 바이 있기 때문이야."
영주는 문득 말을 끊고 서러움이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성주를 바라보았다. 영주의 마음을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성주였지만 막상 이토록 애절한 사랑의 고백을 들으니, 당황스럽고 쑥스러운 가운데 영주의 존재가 더욱 애틋하게 마음속에 자리 잡아 오는 것 같아 안겨오는 영주를 끌어안고 말았다.
"
그 한 가지 바이 뭐길래 겁도 없이 사내들만 우글거리는 전방을 휘젓고 찾아다녔어?"
끌어안은 채 영주의 등을 토닥이며 성주가 궁금한 듯 묻자, 영주는 주인의 귀여움을 받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며 물기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중에 말해 줄게, 오빠. 지금은 나 너무 행복해서 말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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