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앉아 있느니보다 제가 쌀 씻어 밥을 앉힐까요 ? 다른 건 몰라도 밥 하나는 제가 잘 하거든요.“
중구의 말에 순영은 아차 밥부터 앉혀야 하는 건데 하고, 한국식품점에서부터 허둥대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
“그럼요 ! 유학생활 두 해에 늘은 거라군 밥하는 솜씨밖에 없는 걸요.“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세요. 저어기 쌀하고 냄비....“
순영은 썬 단무지를 식초와 설탕을 섞은 물에 담그며, 부엌 한쪽에 있는 쌀통과 냄비를 가리켰다. 중구는 냄비에 쌀을 반쯤 담아 익숙한 솜씨로 씻어 밥을 앉혔다.
“정말 많이 해본 솜씨네요.“
“독일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매일 밥만 해 먹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둘이 부엌에서 일하니까 꼭 신혼부부 같네요. 하~하~하~“
“어머나 ! 농담도 잘하셔 ! 한국에 있는 애인이 들으면 어쩌시려구...“
“애인이요 ? 없어요.“
“거짓말 마세요. 대학생이 왜 애인이 없겠어요 ?“
“참말입니다. 애인 사귈 틈이 없었어요.“
“고시공부도 안 했다면서요 ?“
“그렇긴 하지만, 하여튼 애인은 없어요. 흠없는 순수한 총각입니다. 군대 갔다오느라고 좀 늙기는 했지만...“
“벌써 군대 갔다 오셨어요 ? 그럼 올해 몇이세요 ?“
“스물 아홉입니다. 그러는 순영씨는 ?“
“저도 스물 아홉인데 동갑이네요.“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으시구요 ?“
“저도 간호학교 나와서 메디칼센터에서 일하다가 서독으로 와서 일만 하느라고 아직 연애 한번 못해봤어요.“
“그럼 우리 연애 한번 합시다. 동갑네 애인으로...“
“어머~ 참 쉽게 말하시네요. 우리 연애 합시다 해서 연애가 되어지는 건가요 ?“
“그럼 싫으세요 ?“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처녀가 어디 그렇게 쉽게 '예, 그럽시다' 할 수 있나요...“
“그게 그런 겁니까 ? 첫눈에 반해서 좋다고 해서는 안되는 겁니까 ?“
“차암~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아니면 능청을 떠시는 거예요 ?“
“아니, 정말 몰라서 그래요. 그러게 연애 한번 못해본 순수총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로의 속마음을 조금씩 내비치며,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밥도 다 되고 콩나물국도 끓어서, 마주 앉아 집안 이야기를 하며 김밥 다섯 줄을 남김없이 다 먹고나서 중구는 다시 놀러오겠다며 돌아갔다.
중구가 차를 타고 떠나는 걸 배웅하고 기숙사 현관에 들어서자 정애가 문간에 서서 기다리다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 문둥이 가시나야, 내가 몇시간 동안 애가 타서 혓바닥이 다 말랐다 아이가. 누꼬 ? 니 언제부터 머스마 생겼노 ?“
정애는 숨차게 물으며 순영을 다잡았다.
“남자는 무슨 남자,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
“처음 만난 머스마를 방안에 들였다고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가시나야 ! 니가 그라문 내 모를 줄 알고..... ? 그래 김밥 말아서 느그 둘이서만 싹 먹어치웠제 ? 옆방에서 하마 눈 빠지는 내는 부르지도 않고...“
“김밥 다섯 줄 말아서 둘이 먹었어. 누구 부르고 말 것도 없었어.“
“이 가시나 말하는 것 좀 보래이, 니 그라문 국물도 없대이.“
“정애야 ! 그러지 말고, 김밥 말아줄 테니까 콩나물국하고 저녁 먹자 ! „
“이 가시나, 누굴 병 주고 약 주나 ? 니 빨리 바른대로 못 대나 ?“
“유학생이래, 법대 유학생. 오늘 한국식품점에서 만났어. 비가 많이 쏟아져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나를 차로 데려다 주어서, 고맙다고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했더니 들어와서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김밥 먹고 간 것뿐이야.“
“참말이가 ? 오늘 처음 만났다는 게... ? 유학생이 차꺼정 있는 거 보니 잘 사는 집 아들인갑다. 그제 ?“
“글쎄 ? 그것까지야 내가 어떻게 아니 ?“
“그래 어데 산다고 하드나 ?“
“그것도 안 물어봤는데...“
순영은 아차했다. 가장 중요한 걸 알아놓지 못한 것이었다.
“이 가시나가 뭔소릴 하노 ? 그라문 몇 시간씩 밥 먹어가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데, 어디 사는 지도 모르나 ?“
“그러게 말이야, 그 걸 안 물어봤네...“
“야야, 가시나야 ! 내 보기에는 잘 사는 집 아들같다. 생김새도 귀티가 난다 아이가. 다음에 만나면 놓치지 말고 꽉 붙들거래이...“
정애는 제풀에 신이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날 이후 열흘이 지나도록 중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미처 집을 알아두지 못할 정도로 중구 앞에서 허둥댔던 자신이 야속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제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순영은 중구를 기다렸다. 첫눈에 반했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하며, “우리 동갑네 연애 한번 합시다 !“ 하던 중구의 말이 농이 아닌 진담이기를 바랬다. 그 바램이 중구를 기다리는 순영의 애간장을 더욱 타게 만들었다. 그렇게 속을 태우며 기다린지 보름 만에 중구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어떤 한국청년이 병동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동료간호사의 전갈을 받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보니, 그토록 기다렸던 중구가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와 있었다.
“어머 ! 중구씨가 웬일이세요 ?“
속내로는 왜 그리 소식이 없었어요 하면서도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와아 ! 순영씨, 간호복 입으니까 눈이 부시네요. 정말 천사가 따로 없어요. 세상이 다 환해지는 것 같네요.“
“백의천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세요. 그런데 이 시간에 병원으로 찾아오시고, 정말 웬일이세요 ?“
“지금 바쁘시죠 ? 오늘 몇시에 끝나세요 ?“
“밤 열 시나 돼야 끝나는데, 왜요 ?“
“그렇게 늦게요 ? 그럼 그 시간에 다시 올께 기숙사로 가시지 말고 병원 정문으로 나오세요.“
“무슨 일인데요 ? 밤중에...“
“이따가 와서 알려드릴게요. 지금 말하면 안되는 일이니까. 그럼 근무중이시니까, 나, 갈께요. 이따 열 시 병원 정문, 잊지마세요 !“
중구는 순영의 근무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는 몸짓으로 손을 흔들며 황황하게 돌아갔다.
“무슨 일일까 ?“
궁금증을 참으며 일하는 시간이 왜 그리 더디게 가는지 순영은 내내 조바심을 했다. 마침내 근무시간을 다 마치고, 밤반 근무자에게 업무를 인계한 뒤, 옷을 갈아 입고 정문으로 나가니, 중구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밤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이 지나면 안되니까, 제 생일파티에 순영씨를 초대합니다.“
“예 ? 생일파티요 ? 그럼 낮에 말씀하기지 않고...“
“미리 말하면, 선물 산다 뭐 한다 하고 번거롭게 할 것 같아서 지금 말씀드리는 거니까, 그냥 차에 타세요.“
<3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