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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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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0건 조회 1,545회 작성일 13-01-22 16:08

본문

 
성탄절이 가까워져 오자 오복이 거실에 성탄 나무를 사들였다. 성주가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난생처음으로 성탄 나무를 장식하고 있는데, 오복이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여보, 영주 씨한테서 편지가 왔네.“
성주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봉투를 뜯지 않아도 내용이 짐작이 갔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봉투를 뜯었다.

~사랑하는 성주 씨 !
당신을 가슴에 품고 아버지를 만나러 평양으로 가요. 우리 세 번째의 이별은 이렇게 편지라도 보낼 수 있어서 마음은 아프지만 한결 위안이 되네요. 두 번의 이별이 작별인사도 없이 기약도 없이 헤어진 것이었지만 두 번 다 다시 만날 수 있었듯이, 이번 세 번째 이별도 얼굴 안 보고 헤어져야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떠나면서 작별인사를 전합니다. 이 편지를 당신이 받아 읽을 때쯤이면 영주와 한나는 이미 평양땅을 밟고 있겠지요.
평양산원의 책임간호사로 공식경로를 통해 특별채용된 것이니 서독국적자로서의 신분보장에는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계약은 오 년이지만, 세상과 사람의 일은 어찌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서독땅에 다시 돌아올 것인지 기약은 못해요. 늦게 만나게 된 아버님을 돌아가실 때까지는 모실 생각이지만, 그 또한 사람 뜻대로는 되지 않는 것임을 우리가 살아온 경험으로도 잘 알 수 있잖아요?
나의 하늘 성주씨!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이 세상은 내게 천국이었어요. 당신을 내 마음 속에 품을 수 있었기에, 나는 내가 여자임을 알았고, 당신이 알려주었기에 내 아버님의 귀중함을 알 수 있었지요. 그러기에 당신은 언제나 내 하늘이었고 앞으로도 늘 나의 하늘입니다. 하늘은 헤어질 수 없는 존재이잖아요? 나는 믿습니다. 내 하늘인 당신이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면서 나를 감싸고 있다는 걸---.
성주씨! 언니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언니한테는 무거운 마음의 빚을 지고 떠나가지만, 삼생의 인연이 깊으니, 윤회의 어느 길목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든 언니의 마음 한 자락을 내어준 빚을 갚을 날이 있으리라고 믿어요.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안녕히---
당신의 아기노루가 드립니다.

등 뒤에서 어깨너머로 함께 편지를 읽던 오복이 울음을 터뜨렸다.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구, 아버지를 찾아간다구는 하지만 거기가 어디라고 제 발로 찾아가? 그냥저냥 여기서 우리와 오가며 살지 않고---. 여보! 영주 씨 불쌍해서 어떻게 해?“
성주는 돌아서서 오복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랬다.
괜찮아, 서독국적자로 특별채용되어 간다니까 서독에 오고 갈 수도 있고, 계약 끝나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주는 왠지 모르게 허영거려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영주가 그렇게 의지가 되었었나 생각하니, 영주를 처음 밖으로 불러내게 한 삼청공원 숲 속의 주황빛 하늘나리 꽃이 오련하게 떠오르고, 그 위로 강원도 군부대 앞 아카시아 꽃길을 아기노루처럼 깡총거리며 걸어가던 영주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성탄절 연합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식구들과 함께 두이스부르크 한인교회에 갔다가 성주는 태오를 만나 태영의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늦여름, 직업기술연수를 중단하고 다시 광산으로 들어가려고 마음을 굳히고 보쿰과 레크링하우젠을 오가며 바쁘게 지내던 무렵, 삼 년 계약의 광산 일을 끝마치고 남독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태영이 불쑥 찾아왔었다.
나 곧 귀국하려구---“
무슨 소리야, ? 나한테 가족 불러오라면서 형도 가족 불러와 서독에서 같이 살자고 안 했어?“
그냥 여기서 가족들 하고 편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뭔가 좀 뜻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아서 귀국해서 뭘 좀 해 보려구---.“
뭐를? 여기서 같이 살자 해놓고, 형 혼자 귀국해서 뭘 하려구?“
내가 혼자서 생각해 본 건데, 지금 한국에 건축노동자들이 많찮아? 목공이니 미장공이니 하고---, 이 사람들이 거의 다 하루 품팔이라고,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건설경기로 건설회사들은 떼돈을 벌어 나날이 몸집을 불리고 있는 반면에, 이 사람들은 매일 그 타령이고, 아프거나 다치면 살림이 다 거덜 나는 형편이거든. 이게 다 조직이 없어서 그렇단 말이야. 그래서 이 사람들을 모아서 <노동 두레>를 조직할까 해. 여기 서독에 요즘 새롭고 편리한 목공 도구와 미장 장비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이런 것들을 사 가지고 가서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스스로 권익도 옹호하는 일종의 노동조합을 만들까 하는데, 어때? 괜찮을 것 같애?“
, 구상은 좋은데, 그걸 하자면 세월이 많이 걸릴 거야. 우선은 그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형처럼 생판 모르는 사람이 뛰어들면 적어도 서너 해는 걸릴 텐데, 그 때까지 버틸 자신이 형한테 있어? 아니 자신보다는 경제적 능력이 있어?“
삼사 년씩이나? 그렇게 오래?“
사람 사귀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 더구나 형이 말하는 그런 조직이라면 서로 간의 믿음이 가장 중요한데.“
하여튼 도구와 장비를 벌써 사서 보냈으니, 들어가서 한번 도전해보는 거지 뭐.“
그러고 떠나더니 한 해가 넘도록 이리저리 건축현장을 뛰어다니며 노동 두레를 조직하려고 애를 썼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포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서 아르헨티나에 이민 가 있는 장인의 사업에 일손이 달린다고 하여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태영도, 이 박사도, 영주도 떠나갔다. 어머니도 조만간 성주의 곁을 떠나갈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곁을 떠나간다는 생각에 허전하고 쓸쓸했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고, 떠나가면 돌아온다는 것이 억겁 윤회의 도리라고는 하지만, 이승에서의 헤어짐과 떠남을 삼생의 어느 길목에서 다시 만나지어다 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귓가에 부운 스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여보게 도반! 소중한 사람들이 도반 곁에 있거늘, 뭣 하려고 떠나간 사람들을 아쉬워하는가?“
그랬다. 성주의 곁에는 가장 소중한 아내 오복과 아들 윤기와 준기가 있었다. 떠나간 사람들을 아쉬워하지 말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말씀이었다.
아아! 부운스님! 당신은 지금 어느 윤회의 길목을 돌면서 탁발을 하고 계십니까? 뵙고 싶습니다.“

성주는 새 힘을 얻어 식구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달렸다.
길어야 이십 년이다. 이십 년 후면 아이들도 공부를 다 마치고 의젓한 사회인이 될 것이고, 오복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20년 넘게 부은 주택적금으로 아담한 집 한 채 사고, 연금을 타며 노후를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보내리라. 그러다가 어느 길목에서 옛사람들을 만나면 더욱 즐거우리라.“
성주는 나지라기의 작은 꿈을 꾸면서 옆좌석에서 졸고 있는 오복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나지라기 1부 끝>

댓글목록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끝까지 읽어주신 벗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허락하신다면, 파독간호사와 유학생의 로맨스에 얽힌 유학생 납북사건을 다룬 단편소설 <라인강의 갈매기>를 올려드리겠습니다.

kiosk21님의 댓글

kiosk2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스크램을 열심히 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파독50주년에 다양한 살아온 이야기들과 글들이 모일수 있는 장이 필요할거 같습니다. 꼭 계속해서 글 써 주세요. 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50여년 동안 독일에서 삶들은 무엇 이었을까? 생각하고 기록될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한번 좋은글 감사히 읽습니다.

초롱님의 댓글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와, 이렇게 막 끝내고 되는 건가요? <라인강의 갈매기>를 올려주신다니 일단 용서해 드립니다.

이런 날  시간 약속해서 댓글로 쫑파티라도 열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전 아직 몸이 많이 골골해서 일찍 들어갑니다. 내일 일하러 가고 싶거든요.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초롱님, 뮌헨에도 눈이 많이 내렸나요. 보육원 오가시는 자전거길 정말 조심하시구요. 퇴근하시면 우리 댓글로 쫑파티 열까요 ? 이웃 방에서 초롱님한테 은근히 프로포즈한 분도 초청하구요.

weinrot님의 댓글

weinrot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 정말 잘 읽었습니다..
벌써 마지막이라니요, 이렇게 서운할수가 없네요..

저는 항상 영주씨 이야기가 마음한쪽이 저릿하게 안스러웠는데 그렇게 상상할수도 없는 나라 북한으로 갔네요.
이후 소식은 없었던 건가요?
저희 어머니도 전쟁중에 북한으로 가셔서 연락이 두절된 외할아버지를 평생 원망하면서도 그리워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편지에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다음 소설도 열심히 기대할께요..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영주와 한나의 평양생활도 한편의 장편소설이 될만큼 사연이 많을 거라는 상상으로,  벗님들께서 함께 쓰시는 <릴레이 소설>을 여기 베리에서 시도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이 먼저 시작하실까요 ?  Weinrot 님께서 시작해 보시지요.

숲에서놀기님의 댓글

숲에서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계레님, 수고 많으셨어요. 글을 쓰는 분들은 글쓰기를 '산고'에 비하던데, 덕분에 독자들은 내내 행복했답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면서요. 말 많은(^^) 독자들 때문에 고초도 겪으셨겠지만, 그만큼 애정어린 관심으로 여겨주시길 바랄게요.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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