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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2건 조회 1,389회 작성일 13-01-15 19:31

본문

 
식구가 늘어 거실 한가운데에 교자상 하나를 펴 놓고 모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오후 내내 말이 없던 어머니가 뜬금없이 성주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네 아버지도 살아있으면, 지금, 우리가 살던 만주에 들어가서 살고 있을 거다. 거기에 네 아버지가 다른 여자한테 장가갔다고 목매달아 죽으려고 했던 처녀가 있었는데, 살려놓으니까 죽을 때까지 시집 안 가고 혼자 산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여자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행방불명이 된 지 서른 해가 넘었는데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거니 하면서 살아오신 듯했다.
어머님도 참, 아무려면 그 여자분이 그때까지 시집 안 갔겠어요 ?“
얘 좀 봐라! 그때가 만주에서 나온 지 다섯 해밖에 안 되었다. 그쪽도 세월이 어수선했을 테니까 시집 못 가고 있기가 십상이지. 게다가 우리 살던 집이고 살림이고 농사도 소도 그대로 놓아두고 나왔으니까, 몸만 들어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영주가 북한에 살고 있는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아버지 생각이 새로운 모양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시작한 피난살이가 험난한 귀환길의 공포로 이어지다가 겨우겨우 집 하나 장만하여 자리를 잡을 만하니까 또 난리가 터져서 남편과 생이별하고 생사를 알 수가 없는 그 아픔이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가실 리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니 성주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이튿날, 영주가 앞장서서 천주교의 성지인, 성모발현지로 알려진 벨기에 산속의 <바뇌 약수터>를 찾아갔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간 산마루에서 약수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샘물이 터질 곳을 알려주었다는 전설과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이 성수를 마시고 치유되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 성소가 있었고, 거기에서 신유의 은사를 기원하는 이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성주와 오복도 아이들과 함께 촛불을 하나씩 밝히고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위하여 신유의 은사를 기원했다. 영주는 한나와 함께 촛불을 밝히고 정성스럽게 묵주신공을 드렸다. 그러고 나와서 샘솟는 성수를 받아 어머니께 드리고 온 식구가 양껏 마셨다. 한국의 어느 천주교회에서는 이 성수를 비행기로 날라다가 큰 미사를 드릴 때의 성수로 사용한다며, 영주는 한 말들이 물통을 두 개 사서 성수로 가득 채워 어머니 계실 동안 날마다 드시라며 차에 실었다.

돌아오는 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목욕했다는 아헨의 유황온천에 들려 몸을 담그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온천물이 뜨겁지 않아 한국온천보다 못하다고 신통치 않게 여겼다. 천년세월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황제성당을 구경하고 나서, 그 뒷거리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성주는 은근히 어머니가 걱정되었지만, 뜻밖에도 잘 드셨다.
어머니, 위가 안 좋으시다며, 괜찮으시겠어요 ?“
오복이 보기에도 기름기 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았는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물었다.
얘야, 걱정 말아라. 여기 온 뒤로는 아프지도 않고 소화가 잘 돼서 기분이 좋다. 오늘은 그 성수를 마시고 온천욕을 해서 그런지 더 잘 먹히는구나. 이거 먹어봐라! 참 맛있다.“
어머니는 쾌활하게 대답하면서 큰 구슬처럼 동글동글하게 빚어 튀겨낸 탕수육 한 점을 집어 윤기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복도 덩달아 한 점씩 집어 준기와 한나의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보다가, 영주는 오리요리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성주에게 받아먹으라는 눈짓을 했다. 성주는 당황해서 내가 애들이냐고 도리질을 했다.
남자들은 다 애들이나 똑같아. 그렇지 언니?“
그러엄! 애기도 그런 애기가 없지.“
오복이 영주의 말을 거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얘들이 이젠 애 엄마가 됐다고 에미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내 아들이 어디를 봐서 애기냐? 엣다! 이거나 하나씩 먹어봐라!“
어머니는 아들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다툼없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것이 과히 싫지는 않은 듯 영주의 접시에도 오복의 접시에도 해물요리 한 점씩을 얹어주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어머니는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참 호사했다. 내 평생에 아들 며느리 손자에다가 영주 모녀까지 한 자리에서 좋은 요리 먹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
어머니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래오래 사셔야 제가 이북으로 모시고 만주까지 가서 아버님을 뵙지요.“
죽어도 원이 없다는 말에 영주가 질겁을 하면서 어머니의 오랜 소망을 일깨웠다.
글쎄다, 그런 날이 올까? 이젠 너무 늦은 것 같다.“
어머니는 오래 못 산다는 걸 예감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다음날은 온 식구가 쾰른으로 가서 유람선을 탔다. 코블렌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라인 강 주변의 경관을, 영주의 설명을 들으며 어머니는 별로 볼거리가 없어 시들했는지, 한국 남해바다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셨다.
언제 한국에 오면 한려수도 유람선 한번 타 봐라. 여기다 비할 바가 아니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 경치는 역시 우리나라가 제일이다.“
쾰른 선착장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 백화점들과 유명상표를 내건 상점들을 돌면서, 어머니가 귀국할 때 챙겨드릴 선물을 몇 가지 샀다.
참 곱다! 이걸로 내 수의나 한 벌 맞추면 좋겠다.“
어머니는 옷감 집에서 짙은 자주색의 벨벹 원단을 보시더니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시면서 마음에 들어 하셨다.
어머니는, 벌써 무슨 수의를 말씀하세요? 긴 드레스 맞춰 입으시면 곱겠지요? 마음에 드시면 사 드릴게 가실 때 갖고 가세요.“
오복은 드레스 세 벌 감을 샀다.
, 뭐 한다고 그 비싼 걸 세 벌 감이나 사냐? 한 벌이면 족하다.“
동서들도 있잖아요. 아니면 그냥 어머니 다 해 입으시든지---.“
, 참 그래! 네 동서들도 있었지. 그 생각은 못했네, 그래도 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
걱정 마셔요. 그만한 여유는 있어요.“
어머니는 반기시는 빛이 역력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들 내외가 돈을 너무 많아 쓰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오복이 들려주는 묵직한 옷감을 받으며, 성주는 어머니가 수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메어졌다.
 
그렇게 한 달이 가는 줄 모르게 흘렀다. 아이들의 학교 시간에 맞추느라고 주중에는 오후 반나절 거리의 로렐라이 언덕, 쾨닉스뷘터 고성과 용의 동굴, 에쎈 구르가 공원, 브륏쎌의 황금광장과 골목시장, 코이켄호프의 꽃 전시장 구경을 다니고, 주말에는 판타지아란트와 암스텔담을 다녀왔다. 파리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어머니에게는 무리가 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한 번도 통증을 일으키지 않았다. 병마도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달라붙지 못하는 거라고 성주는 생각했다.
추석이 가까워져 오자 어머니는 한국에 있는 두 아들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곧 추석이 오는데, 이 애들이 제사 준비나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가야지 안 되겠다. 얘 큰애야! 나 이번 주말에 가게 비행기 좌석 예약 좀 해라!“
어머니, 기왕 오셨으니 더 계시다 가세요. 한번 오시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요? 다들 장가가서 아이들 키우는 가장인데 뭐가 걱정이세요. 제사는 여기서 저희가 모시면 되잖아요?“
아니다. 조상님네들이 낯선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오시겠느냐? 그리고 내 아들이 운전하는 자가용 타고 다니며 그만큼 구경 다니고, 그만큼 놀았으면 됐다. 작은 애들 걱정 때문에 좀이 쑤셔서 더 못 있겠다.“
오복이 더 계시라고 권했으나 어머니는 가신다는 의사를 꺾지 않으셨다. 속내로는 통증을 일으키시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던 성주와 오복은 더 말리지 않고 비행기 좌석을 예약했다.

그럼 가마, 언제 또 너희를 보겠냐? 이게 마지막일 것 같다. 오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오복의 시선을 피하듯, 어머니는 돌아서서 탑승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할머니 !....“ 하고 준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할머니의 뒤를 쫓아가려는 걸 윤기가 잡았다.
오냐! 내 새끼야! 공부 열심히 해서 꼭 박사 되거라! 할머니 또 올게.“
어머니는 돌아서서 준기에게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며 뒷걸음으로 걸어 탑승구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머니이~ 으흐흐 흑흑~“
오복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성주는 말을 잊은채 멍하니 서서 어머니가 들어가신 탑승라운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머니 더 오래 사실 거야! 어디 그동안 환자 같으셨어? 그러니 그만 울음 그치고 인제 그만 돌아가요.“
영주가 옆에서 두 사람을 위로하며 재촉했다.
 

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그러게 말이어요. 저도 영주에게 감정이입이 되니 되려 속이 타서 그러지요.

근데 딴 건 다 이해하겠는데 오복이 앞에서 성주 입에 오리고기 넣어주는 건 쪼매 그렇지 않나요? 오복이 여장부니까 기냥 넘어가죠, 저 같은 보통여자였다면? 한겨레 님과 드론한마리 님  상상에 맡겨욧!

weinrot님의 댓글

weinro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말 코끝이 찡해지면서 가슴이 먹먹하니 아프네요..
저도 열심히 매일 기다리면서 읽고 있습니다.
댓글다는게 왠지 쑥스러워 눈팅만 하는 편인데, 좋은 글 감사하게 잘 보고 있다고 인사를 드려야 할듯 해서요..

Noelie님의 댓글

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연이겠지만
저는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오복만 빼놓고 제 주위에 다 있다보니 가끔 느낌이..아....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설마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사연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  어떤 독자분은 영주가 ㅇㅇ 에 사는 ㅇㅇ이 아니냐고 집요하게 묻는 바람에 당황한 적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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