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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 나지라기 제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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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1-24 03:11 조회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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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행이 모두 틀림없이 버스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광산직원은 승용차를 몰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고 노무관이 혼자서 버스로 올라왔다.
"
- 여러분은 수많은 경쟁자 가운데에서 뽑혀서 이곳 서독의 광산에 일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국위를 선양하라든가 무슨 민간외교관이 되라든가 하는 판에 박힌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흔히 외국에 나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여러분에게 애국자가 되지 말라고 권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여러분은 돈을 벌어서 잘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이역만리 타국 땅까지 힘든 노동을 하러 온 것이지, 나라를 생각해서 부모 형제와 처자를 남겨두고 고향 땅을 떠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무관의 인사말이기도 한 버스 안 강연은, 애국자가 되지 말라는 놀라운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진 햇내기 파독광부들을 주눅 들게 하면서 계속되었다.

"
여러분이 정말로 애국을 하는 길은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쏟거나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고용계약기간 삼 년을 성실하게 활용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아끼고 모아서 여러분이 서독에 오고자 마음먹었을 때의 목적이었던 돈을 벌어 건강한 몸으로 부모 형제와 처자의 곁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내가 잘사는 것이 바로 나라도 잘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약 세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여러분이 앞으로 삼 년 동안 근무하게될 광산의 기숙사에 도착할 것입니다. 본인은 가까운 시일 안에 여러분을 방문하여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만, 그 안에라도 여러분의 신상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제게 연락을 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주독대한민국대사관의 수석 노무관 임정길입니다."
노무관이 긴 인사말을 마치고 내려가자 버스는 바로 문을 닫고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는 노무관의 인사말을 두고 때아닌 애국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임정길 노무관이라…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던 당신이 바로 독에 있었군, 어쩐지 예감은 좋지 않지만, 당신을 여기서 만난 건 정말 뜻밖이군."
성주는 달리는 버스 안을 가득 채우고있는 가지가지의 애국론을 귓가로 흘리며 한 생각으로 빠져 들어갔다.
- 1960
년대 말,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삼동친목회를 만들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기관마다 단체마다 탄원서다 청원서다 하고 호소하며 다닐 때, 노동청의 평화시장 담당 근로감독관이 바로 조금 전에 인사말을 하고 내려간 임정길이다. 사람 다루는 솜씨가 능구렁이 같은 그는 전태일에게 동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전태일에게 헛된 희망을 게 하는 한편으로는 기업주들과 손을 잡고 전태일의 주변에 감시형사를 배치하게 하여 결국은 전태일을 분신자살로 몰고 간 장본인이다. 그런 자가 영전하여 외공관의 수석 노무관으로 있다니… 이 사람은 지금 독에서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돌보아준답시고 무슨 능구렁이 짓을 하고 있을까 ?

이 버스에 앉아있는 한국 젊은이들, 나를 빼고 서른일곱 명의 파독광부 가운데 누가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을 알고 있을까 ? 내가 파악하고 있는 바로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모두들 자신의 삶을 살아오기에만도 힘겨워했던 사람들일 테니까. 이제 남의 나라 땅에까지 품을 팔러 나와서 의지할 데라곤 우리 서로들뿐이라는 깨달음을 얻게될 때, 그제야 함께 살아야할 '우리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겠지. 옛말에 떫은 배도 씹어볼 만하다고 했지만, 윤형이 말하듯 어쩐지 첫날부터 떨떠름하니 마음에 안 드는 독광부 생활을 그야말로 떫은 대로 씹어가며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성주는 버스의 앞자리로부터 한 사람씩 마음속으로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쉴 새 없이 밝게 웃으며 종달새같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황재근과 허동일,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듯싶은 사회 초년병의 첫발을 파독광부로 내딛기 시작하는 푸른 꿈 가득한 서울 젊은이들, 이들에게 독일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망의 땅으로 보일까? 과연 독일은 이 젊은 출발자들에게 무엇을 안겨줄 것인가? 그것이 실의와 좌절이 아니기를 나는 간절하게 바란다.
뒷자리에 앉아서 버스의 창 밖을 내다보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민준기와 진흥섭은 태백지역 광산촌인 장성 출신으로, 이들이야말로 돈을 마련해서 검은 돼지라고 불리는 광부 신세를 면해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부모와 처자를 광산촌에 남겨두고 서독으로 떠나온, 서른 살 안의 강원도 진짜 산()사나이들이다. 이들의 소망대로 독 광부생활은 정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이들로 하여금 검정돼지 신세를 면하게 해주려는지…. 그 뒷자리에서 침을 있는 대로 튀겨가면서 큰 목소리로 열띤 애국논쟁을 벌이느라고 버스가 달리는지 뒹구는지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선영석과 천기원, 유천훈, 고광만, 이들은 해외개발공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뒤로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삶에 자신만만한 패기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서른 살 안의 호남 사나이들이다. 광산 근처에 가 본 일도 없는 이들은 어떤 꿈을 그리면서 파독광부를 지원했을까 ?
언제 보아도 여유 만만하고 싱글싱글 웃는 모습의 서울까투리 서준기, 실은 중동에 나가려고 용접기술을 배우며 개발공사를 드나들다가 에멜무지로 신청해놓은 서독광부의 길이 먼저 열리는 바람에 석 달도 채 안 된 신혼살림을 거두어 치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새댁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내키지 않는 길을 떠나온 새신랑이다.
저마다 힘겨운 인생의 고갯길을 넘어오느라고 장가갈 겨를도 없어 서른 고개를 바라보는 노총각의 몸으로, 한 몫 잡아보겠다고 산 설고 물 이역만리 길을 떠나온 권영국, 이성현, 이준상, 박인수, 심재철, 이해명, 이종우, 전형섭, 김영봉등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독생활의 밑그림은 어떤 모양들일까 ?
동대문 시장에서 이것저것 걸리는 대로 뜨내기장사를 하다가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처자식을 창신동 비탈동네에 남겨두고 떠나왔다는 이명수, 상계동 한구석의 종묘 파는 구멍가게를 칠순의 늙은 어머니와 숫되기만 한 아내에게 맡기고 돈 마련의 길을 찾아온 더더리 김춘성, 본디부터 말수가 적어서인가 아직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눈이 커서 늘 슬퍼 보이는 화순 사나이 김진화, 별다른 까닭도 없이 아직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볼 기회가 없었던 충청도 대천 사나이들인 이건우, 여승찬과 늘 소리 없이 숫저운 미소를 짓고 다니는 미남 총각 김용완, 광산보안기능사 2급의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은근한 우월감을 갖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직 솔봉이 티를 벗어나지 못한 태백 출신의 박선태와 홍성표, 개발공사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언제나 깔끔한 차림으로 오고 가던 이기선은 태권도 4단의 사범출신이라던가? 강원도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꿈꾸어온 해외웅비의 꿈을 이런 식으로밖에 풀 수 없었노라고 뇌까리며 비행기 안에서 양주잔을 겨끔내기로 비우던 쓸쓸한 모습 그대로 버스 뒷자리에 앉아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정인남은 지금 춘천 집에 두고 온 하나밖에 없는 당금딸을 가슴속에 안고 있으리라.
광산촌인 태백지역에서 전설같이 전해오는 의리의 주먹 '흰 장갑'을 모셨다는 경력을 자랑으로 삼는 도계사나이 백한식은 언제나 서털구털하고, "나는 배운 것이 없어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필요할 때마다 보여준 상주 깜씨 김대성은 땅막한 온몸에서 기나긴 애옥살이 물이 뚜욱뚜욱 떨어지는 것 같고, 떡부엉이 같은 김영곤은 꿈속에 잠겨있는 듯이 늘 눈빛이 흐리고 말끝도 흐리마리하다. 언제 만나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의, 사람 좋아 보이는 이발사 채중석, 얼굴은 얽벅얽벅 얽었는데 살갗은 유난하게 희어 얽배기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는 노총각 최영호, 장성광업소 금천에서 털어먹기 막장의 일류 선산부로 이름을 날렸다는 울진 사나이 오상석, 공항에서 일행의 명단을 쓰면서야 비로소 이름을 알게 된 고성렬은 고위층의 아들인데 공부실력이 모자라서 정식으로 유학은 올 수 없고 해서 편법유학의 길을 알아보기 위해 광부 틈에 끼어왔다는 귓속말 소문이 전해지는 가운데 늘 그와 함께 붙어 다니는 김재원은 한국의 대학 시절부터 경호원으로 따라다녔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해외개발공사의 교육과정에서부터 지금 버스에까지 늘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갑내기 윤영학, 그는 신길동 우신 시장에서 미곡상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는 것을 재미로 알고 살아온 평범한 상인인데, 무엇이 동기가 되어 꿈도 꾸어보지 않은 광부라는 직업을 갖고 독 땅까지 떠나올 엄두를 내었는지 자못 궁금한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이렇게 잠시 마음속으로 어루더듬어보아도 서른여덟 사람 모두가 저마다 다른 터전에서 갖가지의 삶을 살아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한 동아리가 되어 머나먼 남의 나라 땅에까지 가서 삯일하겠다고 나서게 된 까닭은 정말 무엇일까? 이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을 동아리 동아리로 엮어서 낯선 땅으로 내어 보내는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성주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주인공에게 던지며 점점 더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버스는 시원스럽게 뻗어 나간 고속도로를 총알처럼 달려가는데, 마침내 목적지인 레크링하우젠의 표지판이 나오고 앞 유리창 너머로 멀리 루르 공업지대의 매연이 자부룩한 잿빛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산촌의 광경에 들뜨기 시작한 일행들의 왁지껄한 이야기들을 한 귀로 흘리며, 한성주는 끝 가는 데 없는 생각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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