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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째 마당  : 햇내기 광부들

오전에는 강의실에서 작업도구의 이름들과 갱내 표지판을 비롯하여 지하작업에 필요한 간단한 독일말을 배우고, 오후에는 모조갱도에 들어가 갱내작업의 분위기와 요령을 익히는 지상교육 첫째 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강의와 실습의 사이사이로 갱내작업복과 장비들을 지급 받고 앞으로 이용할 시설물들을 확인하고 직번(職番)을 받고, 개개인 명의로 루르탄광주식회사 산하의 에발트광업소와 고용계약을 맺었다. 독일어와 한글로 된 고용계약서의 주요 내용은 성주로 하여금 선뜻 서명하지 못하게 하는 점들이 있었다.

1: 1. 고용주는 상기 피고용자를 취업지에 도착하는 날로부터 삼 년간을 루르탄광주식회사 산하의 한 광업소에 지하작업광부로서 고용한다.
2.
첫 삼 개월은 수습기간으로 정하며, 이 수습기간 중에는 2 주간의 시효로 언제든지 고용관계를 해약할 수 있다.
3.
피고용자는 실질적인 지하작업장의 작업과정에 익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4.
피고용자는 상기 기간동안 상기 과정에 해당된 작업을 수행하고 작업에 익숙해진 후에 기록된 시간임금제 지하작업이나 능력제 지하작업을 수행한다.
5.
규정에 의한 고용계약 만료 이전이라도 신상조건 및 근무태도 여하에 따라 제한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이를 이유로 하여 고용주가 피고용자를 해고조치함이 가능하다. 단 한국인 피고용자의 경우 해고를 당하면 즉시 귀국해야 한다.

성주는 여기까지 읽어내려 오면서 속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가슴을 쓰다듬었다. 한국인 광부는 모두 지하작업에만 투입하겠다는 계약조문이야 비용을 들여가며 멀리 극동에서까지 노동력을 들여와야 하는 독광산의 심각한 지하노동력의 부족을 고려하여 이해한다 치더라도, 일 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심사다 수속이다 교육이다 하고 허위허위 몸부림치며 도착한 일터에서 자칫 잘못하면 수습기간 삼 개월 안에라도 되 쫓겨갈 수가 있고, 수습기간이 끝나고 고용이 확정되어도 고용주의 의사 여하에 따라서 언제라도 해고를 당할 수 있다는 위험부담, 게다가 해고를 당하면 다른 기회도 없이 즉시 귀국을 해야 한다는 부대조건, 이런 것들은 이들 독광산 고용주 측이 한국인 광부를 노동력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는 의식의 표현이 아닐까? 노동자에게는 어딜 가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장벽이 놓여있는 것인가? 심지어 선진국이라는 독까지도---,
고용계약서 내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시시덕거리며 서명을 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성주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성주는 앞자리에서 동료의 서명을 도와주고 있는 라 통역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
삼 년 계약이 끝나기 전에 해고당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까?"
"
물론이요, 노름에 빠져서 무단결근을 하다가 해고당하고 귀국 조치당한 사람도 있고, 당뇨병으로 지하작업 불가의 판정을 받고 귀국한 사람도 있소."
"
무단결근이라---?"
"
! 그걸 설명해 드려야겠군, 기왕이면 모두 함께 들으셔야 하겠는데---"
   라 통역은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
- 여러분! 제 말씀에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독광산은 여러분에게 해마다 서른 공수(工數) 내외의 휴가를 줍니다. 개인적인 여행이나 볼 일은 대개 이 휴가를 활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자기가 받던 노임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또 몸이 아프면 의사가 병가증명을 발부해서 의사가 지시하는 기간만큼 치료를 받으면서 쉴 수도 있습니다. 에도 노임은 그대로 받습니다. 또 특별한 경우에 소속 감독의 허락을 받고 노임을 받지 않는 특별휴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절차들을 밟지 않고 일을 안 나가면 그게 바로 무단결근인데, 무단결근 삼일이면 아무 항변의 권리 없이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라 통역이 말을 끝내고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성주는 다시 나지막하게 물었다.
"
아까 당뇨병 때문에 되 쫓겨간 사람도 있다고 하셨는데, 일하다가 병이 나거나 혹은 일하다가 다쳐서 지하작업을 못하게 될 경우에도 다른 일자리로 옮겨주지 않고 해고를 시킵니까 ?"
"
일하다가 다친 경우는 다르지요, 그건 광부면 누구나 가입하게 되어있는 광부공제조합의 사고보험에서 처리하게 되지요. 그러나 다른 병이 있거나 해서 일을 못할 정도가 되면 보따리를 싸야 겠지요. 이 사람들은 우리를 지하작업광부로 부리려고 불러왔으니까요."
"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우리 모두 해외개발공사에서 엄격한 기준의 신체검사를 받고 건강한 몸으로 이곳에 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하다가 병이 났는데 치료도 안 해주고 보상도 없이 해고에 귀국조치다 이 말입니까 ?"
"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그러나 한형, 한번 생각해 봐요, 이 사람들이 우리를 삼 년 시한부의 지하작업광부라는 조건으로 데려올 때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소. 냉정하게 말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건강하고 성실하게 일해줄 노동력이지 다른 걸 귀찮게 요구하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오."
"
그건 그렇지만, 이런 비인간적인 고용조건들은 시정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광부 파독의 역사가 십오 년이 되도록 이런 것 하나 고치지 못했다니 그동안 우리 정부는 무얼 했답니까?"
"
모르는 소리 하지 마소, 한형! 한형 더 있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동안 우리 한국사람들이 광부로 독에 와서 한 짓들을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한국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독광산 경영주들의 참을성도 어지간한 거요. 그동안 한 사람이라도 더 독에 보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한국정부 당국자의 눈치놀음도 눈물겨운 데가 많았소. 사실 고용조건의 개선이고 시정이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이 말이오."
"
아무리 그렇더라도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단순한 노동력으로만 본다면 이건 그냥 놔둘 수 없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
한형 뭣 좀 많이 아는 사람 같은데, 내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 드릴까, 나도 한국에 있을 때는 꿈도 많고 정의감도 강한 사람이었소. 가난한 농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겨우 5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을 거쳐서 군청서기로 시작했지만, 그것만 해도 우리 집안에서는 개천에서 용 났다 야단이었소. 그런데 그 젊은 패기와 정의감이라는 것이 늘 말썽이었지. 군청서기 일이나 얌전히 했으면 지금쯤 군청의 과장쯤으로 승진해서 마을 유지로 행세하고 다닐 텐데, 뭐가 잘 났다구 군청서기 일 보는 틈틈이 농민들의 여론을 모아 농협운영을 시정하라는 운동을 벌이다가 단칼에 목이 잘렸소. 군청 서기질 하다가 불온분자로 몰려 목 잘린 놈이 대한민국 천지 어디 가서 직장을 잡을 수 있겠소? 결국은 흘러 흘러서 이역만리 타국 땅까지 왔는데, 그 뒤부터는 정의감일랑 아예 꼬리 사려서 뒤꽁무니에 감추고 그저 나쁜 짓만 안 하고 살면 된다 하는 좀스러운 인간이 돼버렸지만, 어쩌겠소? 맞벌이하는 마누라에 토깽이 같은 자식이 둘이니 내 집안일 처리하기에만도 눈, 코 뜰 사이 없어서 그냥 유수 같은 세월 흘려보내는 거요."
"
기야 나는 군청서기도 못 되는 광부 모가지가 잘려서 여기까지 온 놈이지만, 어째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아서 그래요. 내가 알기는 우리 일행 가운데는 독에 온다 해포가 넘도록 건달 살림하는 바람에 빚 지 온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런 사람들이 만약에 무슨 일로 잘렸다 생각해 보세요. 이건 정말 무슨 신파 연극도 아니---"
"
! 그렇지 않아도 이따가 끝나면 내가 광고를 하려고 했었는데, 여러분이 독에 온다 개발공사 드나들며 수속이다 교육이다 하고 허룽거리는 동안에 살림이 말이 아닐 것은 뻔한 노릇이고 해서 여기 은행에다 융자신청을 했소. 여러분의 노임을 담보로 해서 다섯 사람씩 서로 연대보증을 서고 융자를 얻는데 이자는 한국에 비해서 형편없이 싸요. 그래서 좀 많은 액수를 융자해 달라 해 봤는데, 한 사람 앞에 삼천 마르크 이상은 못 주겠다 아예 못을 박아요. 하여튼 그래서 오늘 오후 다섯 시에 은행 융자계 직원이 기숙사로 오기로 했소.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서류에 서명만 하면 한국의 가족에게 송금되도록 다 준비해 갖고 올 꺼요. 송금하는 조건으로 융자해 주는 거니까 현지 융자는 물론 안 되는 거요."

   그날 저녁 기숙사 휴게실로 찾아온 드레스드너 은행 융자계 직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십 개월 분할상환조건의 융자금 삼천 마르크를 아내에게 송금하는 절차를 다 마치고 나서, 성주는 부엌도 없는 십만 원짜리 단칸 셋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겨울을 나야 하는 고생을 아내에게 시키지 않게 되었음을 흐뭇해하면서 부엌이 달린 조금 넓은 셋방으로 옮기라고 편지를 썼다. 부자들에게는 하밤 술값도 안 되는 액수였지만 성주로서는 결혼 일곱 해 만에 처음으로 아내의 손에 쥐주는 돈이어서 이제 겨우 남편 노릇을 시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가족에게 송금할 필요가 없다는 고성렬이 늘 함께 붙어 다니는 김재원의 집으로 송금해 주고 매월 은행 계좌에서 떼어 가는 분할상환금을 김재원에게서 현금으로 받기로 한 것 말고는 동기 모두가 융자금 삼천 마르크를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 또는 처자에게 송금하고 나서 무엇인지 모르게 들떠 있는 기분들이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제 딴에는 장한 일을 해 놓고 나서 어른들의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그런 표정들이라고 할까.
   기혼자들은 기혼자들대로 한국에서 다녔던 직장의 시원치 않은 돈벌이 때문에 부모나 처자식 앞에서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크고 독한 마음 먹고 파독광부 지원해놓고 두 해 가까이 해외개발공사 드나들면서 여기저기 진 빚을 갚고 이제는 가장(家長)의 체통을 살리게 됐다는 안도감에서, 총각들은 총각들대로 모처럼 만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장가 밑천 장만을 시작했다는 자긍심에서 흘러나오는 상쾌한 분위기가 얼굴 얼굴에 어리었다.
   특히 제대 후 사회에 내딛는 첫발을 파독광부로 시작한 황재근과 허동일의 즐거워하는 표정은 화사한 봄날 들녘에서 재잘대며 힘차게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는 종달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독 땅에 도착해서 두 번째 맞는 토요일, 첫 번째 토요일은 도착 당일이어서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그냥 지나가 버린 공휴일이었고 두 번째의 토요일이 정작 처음 맞는 휴일이었다. 이날은 며칠 전부터 선진들의 통보를 받은 진별 축구대항전을 겸한 대표팀 선발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3진 축구팀의 대표라는 라영래 선수가 설명한 말에 의하면, 에발트광산에는 터키·유고·모로코·이탈리아·스페인·네델란드 등 유럽 각국 사람들이 광부로 일하고 있는데, 이들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해마다 10월이면 <에발트광산 국적별 축구대회>를 개최해 왔다고 한다. 에발트광산으로 온 한국광부들도 72년부터 이 국적별 축구대회에 참가해 왔는데, 올해에는 2진이 곧 귀국하기 때문에 새로 온 4진과 5진에서 젊은 선수를 선발해 국적별 축구 한국팀을 다시 구성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국적별 축구대회에서 눈에 띄게 활약한 선수는 해마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독일동포 축구선수단으로 출전시켜주는 프리미엄도 있다고 했다.

   홀아비 살림의 어설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5진 동료 철길 건너 102번지 기숙사 뒤쪽 43번 고속도로 바로 밑에 있는 축구경기장으로 줄지어 갔다. 진별 대항전이 리그전 방식으로 진행되는 동안 3진에서는 라영래를 비롯한 김종길·황인학·유대영 등이 눈에 띄게 잘 뛰었고, 4진에서는 회장인 송주봉과 서정수·석윤기·지학준 등이 뛰어난 주력과 강한 지구력여줘 점 찍혔다.
   선발전에 처녀 출전한 5진은 이날 연전연승으로 무패의 우승팀이 됐는데, 특히 이해명·선영석·유천훈·심재철·정인남·백한식 등 여섯 명의 돼지 같은 돌파력과 수문장을 맡은 더덜이 김춘성의 용전분투가 가져온 결과였다. 결국, 에발트광산 국적별 축구대회 한국광부 대표팀은 이날 경기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준 열다섯 명으로 결정됐고, 수문장은 김춘성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날 김춘성이 보여준 명 골키퍼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이었다는 것을---.

   한 달 뒤의 일이지만, 대사관에서 임정길 수석노무관과 이문삼 통역이 달려오고, 보쿰 게아테 광산의 홍철표 통역도 응원부대를 이끌고 달려온 국적별 축구대회 당일, 첫 번째 순서인 터키 광부들과의 경기에서 김춘성은 별명인 더덜이에 어울리게 더덜거리면서 무려 개의 골을 맥없이 허용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한국팀은 수문장을 교체했지만 이미 첫 경기에서 맥이 다 빠져버린 듯 연전 연패를 하다가 겨우 광산 작업반장팀과의 경기에서 한 번 이긴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무튼, 이는 한 달 뒤의 일이었고, 이날 진별 대항 축구시합이 있고 난 후부터 5진에 축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총각 팀과 기혼자 팀으로 나누어 '맥주 한 상자 내기 시합'을 벌이고 으레 각자 추렴으로 돼지 삼겹살 즉석구이가 안주로 등장하기 마련이었는데, 선진 회장들보다 동기 사랑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지극한 5진 회장 이건우는 다들 운동장에 나와 있는 사이 5진 회원들의 냉장고를 뒤져 김치를 몇 가닥씩 징발하여 한 냄비씩 만들어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오곤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배꼽이 빠라 깔깔거리며 서로 나누어 먹었다.

   총각 팀의 주전선수는 이해명 주장 비롯해 멧돼지 같은 돌파력을 가진 심재철·선영석·유천훈 등을 주축으로 한 권영국·천기원·이성현·전형섭·김영봉·최영호·황재근 등이었고, 기혼자 팀의 주전선수는 김춘성을 주장로 민준기·진흥섭·고광만·김진화·박선태·정인남·홍성표·이명수·백한식·김재원·서준기 등이었다. 가끔 선수 교체가 있기는 했지만, 총각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려나가기 시작할 때까지 한 해가 넘도록 이어진 5진의 총각 팀과 기혼자 팀의 축구대항전은 이들 젊은이의 시대를 향한 울분과 욕구불만을 풀어내하나뿐인 배설구의 역할을 했다.
                             <9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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