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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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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1-10 21:10 조회1,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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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체육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주 목요일, 밤일을 들어간 일터에서 누군가가 부주의로 운반철반에 던진 굵은 쇠나사가 철반 이음새에 끼어 부러지면서 그 쇳조각 하나가 성주의 오른쪽 눈으로 튀었다.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는 듯한 굉장한 충격과 함께 눈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손으로 눈을 막고 급히 구급약 상자를 찾아 붕대를 풀어 피를 멈추게 하고 작업반장을 불렀다. 작업반장은 동료 한 사람을 붙여주면서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재촉했다. 동료의 부축을 받아 갱 밖으로 올라와 몸을 대충 씻고 새벽 한 시에 시내 안과병원으로 가 잠자고 있는 의사를 깨웠다. 부시시 눈을 비비고 나온 안과의사는, 쇳조각이 눈동자에 박혀있어서 수술해야 되니 아헨 대학병원으로 급히 가라고 택시를 불러주었다. 의사가 서명한 택시사용사유서만 운전기사에게 주면 택시요금은 질병보험에서 택시회사로 직접 지급하기 때문에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병원 안과병동으로 가니, 당직의사가 성주의 눈을 세밀하게 진찰하더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실명의 위험이 있다며, 서둘러 마취사와 간호사들을 불러 수술준비를 시켰다. 성주는 일 마치고 돌아올 시간에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애를 태울 오복이 걱정되어 바쁘게 오가는 간호사에게, 집으로 전화해서 대학병원 안과에 있다고 알려달라고 부탁을 한 다음 수술을 받았다.

마취에서 깨어나니 두 눈을 무언가로 가려놓아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성주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지 귓가에 오복의 축축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이제 깨어나네. 많이 아팠지?“
아프기는, 그런데 한쪽 눈만 다쳤는데 왜 두 눈을 다 가려놓았지?“
여보, 눈동자를 수술해서 당분간은 눈동자를 움직이면 안 된대. 눈동자는 두 눈이 함께 움직이니까 두 눈을 다 가려놓은 거래.“
그 말을 당신이 어떻게 다 알아들었어?“
독일말을 잘 모르는 오복이 의사가 설명해 준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 같아서 성주가 물었다.
성님, 저 강우입니다. 지가 통역으로 형수님 모시고 왔지라.“
교회에 나오는 유학생 강우가 옆에 있었다. 보쿰으로 왔다가 전공인 도시계획의 저명한 교수를 찾아 아헨공대로 옮기고 한인교회를 찾아온 전남 광주 출신의 부부유학생으로 갓난 아들 하나를 키우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강우 역시 크리스찬 아카데미와 연관이 있는 독일 기독교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있기에 이 박사와도 왕래가 있어서, 성주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자주 왕래를 해왔던 터였다.
? 범돌아범이 와 있었구나, 어떻게 알고?“
새벽에 형수님이 전화하셔서, 제가 달려가 모시고 왔지라. 그란데 눈이 아프거나 그렇지는 않지라?“
좀 뻐근하기는 한데 견딜만해. 의사가 뭐라고 해? 실명은 안 한대?“
성님이 운이 참 좋습디다. 안과의사라고 누구나 다 수술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마침 당직의사가 수술 잘하는 명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풋내기 의사가 당직했으면, 수술 담당 의사 부르고 어쩌구 하다가 두 시간만 늦었으면 실명할 뻔했다고 하면서,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군, 그나저나 밤새워 공부하는 사람을 불러 시간 허비시켜 미안하군.“
새벽에 윤기가 전화를 받고, 아빠가 눈을 다쳐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다는데, 그 새벽에 누구한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범돌이 아빠가 늘 밤을 새워 공부한다고 한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해 보았더니 금방 받더라구, 어찌나 고마운지, 그 새벽에 집에까지 와서 나를 싣고 병원으로 왔지, 범돌아빠 공부 밀린 건 당신이 갚아야 해.“
이 사람아! 뭘 그렇게 서둘렀어? 아침밥 해 먹고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천천히 와도 되는데---.“
이 이는 정말 태평한 소리 하고 있네. 꼭두새벽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 남편이 수술 중이라는데, 어느 여자가 아침까지 기다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차암, 성님 태평한 건 여전하요 잉, 형수님은 새벽 내내 눈물바람이셨구만.“
울기는, 눈물도 흔하다. 눈 좀 다친 것 같고 뭘 울어? 사람 살다 보면 다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집에 아이들만 있잖아? 어서 가봐 학교 보내야지.“
걱정하지 마. 조금 아까 준하엄마한테 전화해서 애들 아침밥 먹여서 학교 좀 보내달라고 부탁해 놓았으니까.“
두루두루 신세만 지는군. 퇴원하려면 얼마나 걸린대?“
학문하는 사람답게 꼬치꼬치 의사에게 물어보았는지 강우가 대답했다.
눈은 예민한 부위가 되어서 좀 오래 걸린다고 합디다. 수술 부위 아무는데 두 주일, 시력과 시신경, 각막혼탁 등 수술 후유증으로 생길 수 있는 증상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검사를 하는데 두 주일이 걸리니 짧게 잡아도 한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그럽디다.“
하이고, 그렇게나 오래!“

오복이 날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버스를 타고 와서 병실에서 성주와 함께 점심을 먹고, 아이들이 돌아오는 시각에 맞추어 집으로 가는 반복되는 일과가 열흘이 지나고 나서야, 성주는 다치지 않은 왼쪽 눈의 가리개를 떼어내고 한쪽 눈으로나마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성주는 그 열흘 동안의 갑갑함을 통해서 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했다. 오른쪽 눈만 가리고 치료를 받고 있는 어느 날 오복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사가 그러는데, 당신 눈물 흘리면 시력 회복하는데 좋지 않다고 하거든, 무슨 슬픈 이야기 들어도 울지 않을 자신이 있어​?“
무슨 슬픈 이야긴데?“
글쎄, 자신이 있느냐니까?“
무슨 이야긴지 알아야 대답을 하지.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울지 않을 테니까 말해 봐.“
당신 퇴원할 때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범돌이 아빠가 말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말하는 거야. 사실은 어머님이 위암이시래, 여섯 달밖에 더 못사신다고 하는데, 어머님은 아직 모르신대.“
뭐어?“
성주는 너무나 놀라 말도 못하고 멍하니 오복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절대 울면 안 돼! 눈에 나쁘다니까.“
오복은 또 다짐했다.
작은 동서가 전화를 했더라구, 그러니 마지막으로 아주버님하고 한국엘 한 번 다녀가시는 게 어떠시냐구, 그래서 당신이 지금 입원 중인데 의논해서 연락한다고 했어.“
성주는 기가 막혀서 눈물도 안 나왔다. 이제서야 조금씩 안정을 찾아 내년쯤이면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휴가여행을 나가서 효도도 하고 맏아들 노릇도 해 보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불효자는 부모 돌아가신 다음에야 후회한다더니, 옛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그동안 스물여섯 살 청상과부로 올망졸망한 세 아들 키우는 어미의 심정을 헤아릴 생각 없이 저 혼자 세상에 태어난 양 제멋대로 살아온 불효를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 눈 낫기 전에는 장거리 여행을 할 수도 없고, 차라리 어머님을 서독으로 초청해서 한두 달이라도 모시고 구경시켜 드리고, 자식도리 조금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위암이시라며? 여행이 괜찮을까?“
위암이 평소에는 아무 증세도 없이 멀쩡하대, 가끔 통증이 오면 견디기 어렵지만, 그럴 때는 병원에서 준 진통제를 드리면 곧 가라앉는다고 동서가 그러더라구.“
그러면, 그렇게 해. 보쿰교회 방집사가 여행사 하니까, 왕복비행기 표 사서 보내고. 바로 작은 집에 전화해서 서독여행준비 좀 해 드리라고 부탁해. 오시는 날은 나 퇴원해서 집에 있어야 하니까 대여섯 주일 후로 하고.“
알았어! 그럼 나 집에 가서 그렇게 처리할 테니까, 당신 혼자서 울지마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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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참 착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얘기입니다. 전 오늘도 조회수 10등 안에 못 들었네요. 그 대신 댓글은 1등으로 답니다.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질투는 참 재밌는 테마지요? 그래서 저도 질투에 관한 대목은 유심이 읽습니다. 나지라기에도 인간의 심리가 심심찮게 나와서 재밌습니다. 나지라기를 애독하는 여성 독자의 의무라 생각하여 62회에 댓글 달았어요.

참, 제가 한겨레님께 세배 올렸던가요? 그럼 지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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