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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295회 작성일 13-01-06 20:17

본문

 
성주가 일하는 안나 광산은 굿문을 연지 백이십여 년이 되는 오래된 광산이었다. 그만큼 석탄매장량이 많아, 에발트 광산이 속한 루르탄광주식회사(RAG)와 쌍벽을 이루는 에쉬봐일러 광산그룹(EBV)에 속하는 광산이었다. 에쉬봐일러 광산그룹은 안나 광산 말고도 에밀-마이리쉬 광산, 소피아-야코바 광산, 그리고 멀리 보쿰의 에링 광산과 알렌에도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6312월 한국인 파독광부들이 처음 취업한 메르크쉬타인의 아돌프 광산은 마리아도르프의 마리아 광산과 채탄과정에서 갱도가 지하에서 관통되어, 마리아 광산은 수갱탑을 폐쇄하고 안나광산으로 병합된지 오래였다.
세 광산을 하나로 합병해서 그런지 지표에서 수직 팔백육십 미터의 안나갱도는 동서로 십 킬로미터가 넘었고, 남북으로 팔 킬로미터나 되어, 작은 도시를 연상케 하는 큰 규모의 광산이었다. 특히 수갱탑 인근의 운반갱도를 오가는 탄차와 인차의 선로는 영화에서 본 뉴욕의 메트로를 연상시킬 만치 높고 넓었다.
약 오십여 년 전에 안나갱도에 큰 가스폭발사고가 있어서 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는 바람에 알스도르프에는 그때 죽은 남편의 연금을 받으며 광산사택에 사는 예순 살 전후의 과부들이 많았다. 한국광부 중에는 이들과 계약결혼을 해서 체류문제를 해결한 사람도 더러 있고, 계속 동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광부들은 비교적 여유가 있는 이 과부들과 동거를 하게 되면, 생활비만 조금 부담하면서 숙식은 물론 성적 욕구도 해결하고, 독신으로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한국의 가족에게 보낼 수 있는 이점이 있어서, 총각은 물론 한국에 처자가 있는 기혼자들도 더러 그렇게 살고 있었다. 성주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 과부들은 동거하는 한국남자가 한국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을 오히려 독려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한국 가족에게 우환이 생기자 자신이 저축한 돈을 남자에게 주어 송금을 하도록 한 여자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한국에서 온 젊은 광부들이 여자들에게 다정하고 춤도 잘 추며, 호기도 잘 부린다고 소문이 나서, 춤방을 겸한 술집에는 주말 밤마다 이 과부들이 진을 치고 앉아 한국광부를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당연히 이들 덕분에 호황을 누리는 술집주인들도 한국사람이라면 대환영이었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중에는 광산에 다니는 아들뻘의 젊은 한국광부에게 오토바이까지 사 주며 데리고 사는 과부도 있었고, 귀국한 한국남자가 그리워 한국여행까지 다녀온 과부도 있었다.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한국광부들의 낙원이었다. 갱내작업 역시 에발트 광산의 채탄작업보다 훨씬 수월해서 일을 마치고 나와서 바로 술집으로 춤방으로 직행할 정도였다.

다일만 하니엘 회사가 안나 광산에서 하청을 받은 일거리는, 시가 백오십만 마르크가 넘는다는 최신 채굴장비를 사용하여, 발파하지 않는 최신공법으로 새 갱도를 열어나가는 굴진 작업과 채탄작업이 끝난 갱도의 장비철수작업이었다.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에서 옮겨 온 한국광부들은 모두 철수작업에 투입되었다. 안나 광산은 모든 갱도가 수평으로 장벽식 채탄작업을 하고 있었다. 상반갱도에서 하반갱도를 관통하는 평균 이백오십 미터의 장벽식 채탄막장에 설치되어 있는 백이십여 개의 무게 일 톤이 넘는 무쇠 덩어리로 만들어진 전진방패(Schild)들과 운반철반(Panzer), 그리고 채굴바퀴(Hobel)와 쇠고리 줄(Kette)을 분해해서, 하반갱도로 끌어내어 이를 해체하여 새로 시작하는 채탄막장으로 보내는 작업이었다.
채탄막장의 작업이 끝나면, 운반철반 너머의 암벽을 허물어 내고, 이 미터 너비의 철수작업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우선 해야 한다. 길이 이백오십 미터 너비 이 미터의 작업공간을 만드는 일에 한국광부들은 빼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작업반장들과 갱도장들을 놀라게 했다. 에발트 광산의 급경사 막장에서 단련된 한국광부들에게는 수평 막장에서 암벽을 허물어내는 작업쯤이야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어서 비교적 체격이 더 우람한 터키인 동료나 유고슬라비아, 모로코 동료보다 작업능률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었다. 늦게 입사한 성주 일행이 인사담당자의 환영을 받은 까닭은 실로 이들 먼저 간 건우 일행이 발휘한 뛰어난 작업능력 때문이었다.
작업공간을 만드는 일이 끝나면 그 공간을 통하여 채굴바퀴와 운반철반을 분리하여 끌어낸 다음, 무쇠전진방패를 수압조정 손잡이를 조작하여 하나씩 앞으로 전진시켜, 앞쪽을 하반갱도로 돌려세운 다음, 지름 오 센티미터 굵기의 쇠 동아줄(Ziehseil)에 연결하여 권양기(Haspel)로 끌어낸다. 권양기로 하반갱도까지 끌어낸 전진방패는 여기서 해체하여 갱내의 가공색도(Hängebahn)로 새 채탄막장으로 운반한다.
다일만 하니엘 회사의 작업반장들은 새 광부들이 들어오면, 한 달가량은 갱내의 이일 저일을 돌아가면서 시켜 보고, 그 가운데 가장 능률을 올리는 작업을 맡겼다. 일종의 적성검사인 셈이었다.
성주는 막장에 자재를 들여보내 주고, 분리한 시설물을 끌어내는 권양 작업을 아주 차분하고 안전하게 한다고 인정을 받았다. 권양기 앞에 앉아 있다가 신호가 오면, 제어장치를 풀고 운행 손잡이를 밀어 쇠 동아줄을 풀어 자재를 들여보내고, 끌어낼 때에는 손잡이를 당겨 쇠동아줄을 감으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간혹 중간에 무엇인가에 걸려 잘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원인을 짐작하여 쇠 동아줄을 늦추었다 댕겼다 하면서 각도를 조정하여 빠져나오게 하는 일에 성주가 능숙한 솜씨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주가 권양기를 맡기 전의 터키인 동료는, 무엇인가에 걸려 오도 가도 않는 권양줄을 우격다짐으로 끌어당기다가 쇠 동아줄이 끊어져 몇 시간씩 작업에 지장을 주곤 했는데, 성주가 맡은 뒤로는 그런 일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아서 작업반장들은 성주의 일자리를 아예 권양기 운전석으로 못 박아버렸다.
쉽고 편한 일자리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다니고 있는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나오는 인차 안에서 건우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도 가족을 초청했어. 한 달 후면 도착한대. 그래서 마리아도르프에 한 형네 같은 지붕 밑 방을 얻어 놓았어.“
그래? 잘했네, 비자 문제는?“
우선은 여행 비자로 오는데, 곧 해결될 거야.“
곧 해결이라니? 어떻게?“
사실은 우리 인권협회에서 팔천 명 넘게 서명받아서 청원서 낸 것이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어 서독 하원에서 통과됐다고 열흘 전에 얀 의원이 공식서한으로 알려왔어. 곧 연방 내무성에서 각 주의 내무부에 ‘직장이 있는 한국노동자들의 체류 제한을 철폐하고, 가족을 초청해 합류하는 것을 허용하라는 협조공문이 나간다고---, 그러면서 얀 의원은 아마도 광주사태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덧붙였더라고.“
그것참 잘됐네. 그렇게 애를 쓰고 돌아들 다니더니, 마침내 결실을 보는군. 이형! 그동안 참 노고가 많았어. 그럼 영학, 진하, 춘성이도 모두 가족을 마음 놓고 불러올 수가 있겠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나. 가족들 모두 오면 우리 크게 잔치 한번 하자구!“
아암~ 그래야지 그럼. 잔치 한번 걸판지게 하자구!“

그로부터 서너 달 사이에 건우가족을 선두로 하여 진하가족, 영우가족, 진우가족이 속속 서독에 도착하여 새살림을 차렸다. 춘성은 곧 귀국해서 노모를 모셔야 한다고 가족초청을 안 했고, 독일과부와 동거하고 있는 영근은 한 해만 더 일하고 귀국한다며 가족초청을 안 했다. 건우와 한 고향인 기찬은 부인이 시어머니 모시고 아이들과 잘살고 있을 테니 당신도 외국에서 오래 고생하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받고 초청을 포기했다. 성연은 아직 총각이어서 건우의 부인이 한국에 있는 친척동생을 중매하기로 했다. 이들 레크링하우젠 출신들이 한국 가족을 초청하는 까닭을 듣고도 기연가미연가하며 망설이고 있던 에밀마이리쉬 광산의 한국광부들도,
그동안 외교 경로를 통해서 노력한 결과로 한국인 노동자들의 체류 제한이 철폐되고 가족합류도 허용됐으니, 마음 놓고 가족을 초청해도 된다.“라는 내용의 대사관 공문이 한인회에 전달된 다음에야 앞다투어 가족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허어! 이 친구들, 우리가 서명운동할 때에는 모른 척 하고 있더니, 일이 다 되니까 즈네들이 했다네, 이런---“
대사관 공문의 사본을 보면서 흥분하는 건우를 성주가 달랬다.
참아! 내가 아는 바로는 공관에서도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사실이야. 다만 결과가 불투명하니까 공개를 안 했을 뿐이야. “
그럼 왜 우리 일을 외면했어? 최소한 교민들에게 협조하라는 공문 한 장만 보냈어도, 우리가 그 추운 기차역에서 한뎃잠을 자 가며 서명을 구걸하는 고생은 안 했을 거 아니야?“
건우는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니면서 고생한 것이 새삼 억울한지 언성을 높였다.
외교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하니까 그렇게 못 해 준 이유가 있을 거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아보자구.“
나중은 무슨 나중? 안되겠어, 우리 인권협회의 활동을 처음부터 지금 나온 결과까지 모든 내용을 밝히는 보고문서를 만들어서 천하에 공포하고 보관을 해야지.“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냥 묻어두어서는 안 될 너무 장한 일이니까, 문서자료로 남기는 게 좋아.“
1979 새활동.jpg

그 후 건우는 석 달가량 걸려, 재독한인광부인권협회가 두 해 가까운 세월 동안 서명운동을 비롯한 체류제한 철폐 청원활동을 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의 기록을 일일이 손으로 적어 내려간 이백 쪽 분량의 <새활동>을 교포사회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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