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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233회 작성일 13-01-04 19:31

본문

 
          열여섯 번째 마당: 새로운 출발

성주는 이 박사에게 눈짓하여 서재에서 따로 마주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아무래도 연수 끝나기 전에 다른 직장을 잡아서 식구들과 서독에서 살고 싶은데, 우선 다일만 하니엘에 알아봐 줄 수 있는가 해서---.“
아니 왜? 연수 끝나고 시작해도 늦지 않을 텐데?“
연수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면 또 무슨 변수가 생길지 불안하기도 하고,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이제 서너 달이면 연수 끝나는데 그 안에 결정 안될 수도 있잖아? 그러니 막상 코앞에 닥쳐서 허둥지둥 서두는 것보다는 미리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실은 얼마 전에 새로 온 노무관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가 판단하기에는 한국의 직업기술훈련소는 지금 아무도 관심 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전망이 밝지 못하다면서, 가능하면 여기서 직장 잡고 정착하는 걸 생각해 보라고 은근히 권합디다.“
그러면, 혼자 가는 것보다는 한 서너 명 모아서 같이 가는 게 어떨까? 마침 레크링하우젠 동기들도 구월 초면 계약이 끝나니까, 그중에서 귀국 안 하고 다른 직장 구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니야?“
그럼 나야 좋지만, 이 박사가 힘들지 않을까 ?“
아니야, 한 사람보다는 서너 사람 부탁하는 게 말하기가 더 좋지.“
그럼 지금 레크링하우젠에 들려서 알아봐서 전화할 테니 수고 좀 해줘요.“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봐.“
성주가 서둘러 이 박사의 집을 나와 전차를 타고 레크링하우젠 광산기숙사로 가니 마침 성연이 제 방에서 혼자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 한형, 웬일이야? 저녁 안 먹었지? 같이 먹자.“
성연이 반가워 하며 부엌에서 곰국을 한 대접 떠오며 저녁을 권했다. 함께 밥을 먹으며 동기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기숙사가 텅 비다시피 여기저기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요즈음은 쓸쓸하다고 성연이 말했다. 대성은 계약이 연장됐고, 영학은 한 달 전에 에쎈 대학병원의 남자간호사로 채용되어 에쎈에 방을 하나 얻어 나갔다고 했다. 또 동기들 가운데 최고의 작업능률을 올렸던 오상석도 계약이 연장됐고, 서준기는 하팅겐에 있는 철강회사 티쎈의 특수용접공으로 들어갔다면서 나머지는 대부분 귀국채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성주가 이 박사의 도움으로 건우가 일하고 있는 아헨의 다일만 하니엘에 들어가려고 한다며 같이 갈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성연이 동기 여기찬과 육진인 이정석을 불러왔다.
네 사람이 에발트 광산의 계약이 끝나는 대로, 이직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여 아헨으로 가기로 하고, 기숙사를 나와 이 박사에게 공중전화로 알렸다.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성주는 오복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 올 때부터 말한 것처럼, 여기 서독에서 확실한 직장 잡고, 아이들 대학 마칠 때까지는 여기서 살려구. 무엇하나 보장된 게 없는 한국에 무작정 들어가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고생을 덜 하겠지. 당신이 외로워서 힘들겠지만, 아헨으로 이사 가면 거기 한국가정들도 있다고 하니까 여기처럼 외롭지는 않을 거야.“
당신이 걱정이지 나야 뭐, 그런데, 허리 다쳤었는데 힘든 광산 일을 해낼 수 있겠어?“
거기서 일하는 동기 말로는, 에발트 광산 같은 험하고 힘든 일은 없어서 할 만하다고 해. 얼마나 힘이 안 들면, 밤에는 춤방으로 춤추러 다니겠느냐고 하던데 뭐.“
서독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서 정이 들만 하니까 또 떠나게 되네. 아이들도 이제 겨우 친구들 사귀어 놓으니까 또 낯선 데로 가야하니 힘들테구---. 뭣보다도 당신 마리아 누님은 또 얼마나 서운하겠어?“
하는 수 없지 뭐. 이번 한 번만 더 이사하면 돼. 더는 옮겨 다니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참아 여보.“
이런저런 걱정이 태산 같은 오복을 안심시키느라고 성주는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다음 주일에 연수 동기 김춘배가 한국에서 불러온 가족을 데리고, 연수원에 통보도 없이 독일 서남부 프랑스 접경인 자아르란트에 있는 태권도장의 사범으로 가 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서 남기호가 베를린의 처녀 간호사와 결혼한다며 떠나가고, 채덕겸 조교도 부인이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남독 지방으로 떠나간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이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구월 십오일 오전에 도르트문트에 있는 다일만 하니엘 본사의 인사부장과 면접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성주는 연수원에 병가를 내고, 레크링하우젠에 들려 성연, 기찬, 정석과 함께 도르트문트로 갔다. 인사부장은 이 박사로부터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자기네 회사는 에발트 광산처럼 힘으로 하는 일은 없고 머리로 하는 일만 있는 기술회사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서 구비서류를 받아 확인한 다음, 그 자리에서 도르트문트 노동청으로 전화를 걸어 네 사람의 새 노동허가서 발급을 부탁하고, 고용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명을 받은 후 복사본을 한 부씩 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나서 아헨의 안나광산으로 시월 초하루부터 출근해야 하니, 미리 아헨으로 가서 광산부속병원의 건강검진을 받고, 광산 기숙사의 방을 배정받으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구월 말로 체류 비자가 만료되는 성연, 기찬, 정석은 아헨에 있는 회사 사무실의 행정 직원에게 여권을 가져다주어 비자 연장을 받으라고 하다가, 여권의 시효도 만료된다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효만료가 되는 여권은 체류비자 연장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주가 고용주의 고용증명서만 있으면 여권유효기간 연장을 대사관에서 할 수가 있다고 설명하니, 오케이 하면서 그 자리에서 네 사람의 삼 년 시한 고용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성주는 그 길로 세 사람과 함께 대사관 영사과로 찾아가 최 노무관의 도움을 받아 여권 유효기간을 삼 년 더 연장했다.
성주는 슈피겔호프 연수원장과 클라우젠호프의 야스퍼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두에 연수를 끝마치지 않고 연수원을 떠나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한 다음, 다시 광산에 취업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설명했다. 먼저 서독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하는 선진 연수생들의 딱한 형편을 전하고, 지금 한국의 새로운 군사독재정권이 직업기술학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관계자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체포하여 ‘삼청교육대’라고 하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모진 훈련장에 수용하여 죽어나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서독에 오기 전 한국광산에서 노동쟁의를 주도한 전력이 있는 성주 자신도, 지금 한국에 들어가면, 직장은커녕 잡혀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조금 과장을 했다. 그런 까닭으로 연수원 수료를 두 세 달 앞두고 마침 광산에 취업할 기회가 있기에 이를 놓칠 수가 없어서 부득이 연수원을 떠나게 됐노라고 거듭 사과의 뜻을 전했다.
얼마 후 슈피겔호프 연수원장의 답신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연수원에서는 수료를 앞둔 연수생들이 하나둘씩 통지도 없이 사라져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성주의 편지를 받고 나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며, 연수원과 클라우젠호프가 대책회의를 한 결과, 한국의 정치상황이 좋지 않아 연수생들이 귀국하기를 싫어한다면, 수료 즉시 전원을 지멘스에 고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면서, 특히 성적이 우수했던 성주에게는 비교적 좋은 일자리를 마련하여 줄 터이니, 즉시 돌아와서 남은 연수과정을 수료하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성주는, 이미 고용계약이 되어 일하고 있기 때문에, 배려하여 주시는 마음은 고맙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고 거듭 사죄를 청하는 마음을 담은 답신을 보냈다. 마음 한편으로는 지멘스에 취직하는 것이 더 전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흔들림도 있었지만, 광산의 노임이 지멘스보다 훨씬 더 많다는 현실이 성주로 하여금 광산을 택하게 했다.
우선 광산독신자 숙소에 묵으며 출근을 시작한 성주는, 일이 끝나는 대로 스쿠터를 타고 알스도르프 전역을 돌아다니며 식구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광산사회과에 찾아가 광산사택을 신청했지만, 비어 있는 사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기자가 많아서 한 해는 더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에 어쩔 수 없이 개인 집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개인 집은 광산사택보다 월세가 두 배 넘게 비쌌지만, 식구들을 빨리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나마 서둘러야 했다. 신문광고를 보는 한편으로 인근에 사는 한국가정들을 이리저리 수소문하면서 보름 가까이 돌아다닌 끝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네 식구가 둥지를 틀만한 집을 하나 구했다. 성주가 일하는 안나 광산에서 이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샤우펜베르크에 있는 이층집이었다. 아래층은 구멍가게를 하는 집주인 틸만스 부인이 살고 있었고, 지붕 밑 이층에 거실과 두 개의 침실, 목욕탕은 없고 샤워시설만 있는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낡은 집이었다. 아쉬운대로 네 식구 살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서 입주계약을 했다. 그리고 이사를 사유로 하여 주말에 연결하여 이틀의 휴가를 내어 레데로 달려가 이삿짐을 꾸렸다. 토요일이어서 관청은 휴무였지만, 연락을 받은 스테판이 일부러 나와서 전출신고를 접수하고 증명서를 발급해 주고 학교청의 전학서류도 만들어 주었다.
마리아는 지멘스에서 연수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한다고 했으면, 자기가 나서서 이사 안 가도 되는 직장을 구해 주었을 터인데, 저 혼자 결정하고 멀리 떠난다고 펄펄 뛰었고, 페트라는 윤기를 끌어안고 너 없으면 재미없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느냐고 눈물을 흘렸다.
 

댓글목록

triumph님의 댓글

triumph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않고
새 출발 을 시작했는지... 오늘이 있기까지 말입니다!
다음 이야기들을 기대합니다.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triumph님 ! 인생살이라는 것이 도전하고 좌절하며 끊임없이 다시 출발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출발은 늘 심기일전 용기백배이지만, 99%의 사람들은 새출발하며 품었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게 마련이더군요. 결국 인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꿈을 이룬다기 보다는 꿈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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