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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084회 작성일 13-01-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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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일행이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서독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의 정세에 관한 소식도 듣고, 앞으로의 민주화 운동방향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꼭 참석하라는 이 박사의 연락을 받고, 성주는 직장을 구하는 문제도 의논할 겸해서 팔월 마지막 주말에 이 박사의 집으로 갔다.
이 박사의 거실에는 협의회 총무 일행과 이영모 씨를 비롯한 크리스찬 아카데미 협력기관인 독일기독교 장학기관의 장학금을 받는 유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집단교육 프로그램의 간사로 활동하다가, 이른바 “자생공산주의자”라는 웃지 못할 희극 같은 죄목으로 한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기독교계의 배려로 장학금을 받아 늦게 유학을 나온 사람도 있었다.
이 박사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나눈 뒤, 한국에서 온 협의회 총무 일행으로부터 광주 사태 이후 전개되어 가고 있는 한국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십이월 초 유신헌법에 따라 장충단 체육관에 모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 서리였던 최규하 전 총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신군부의 허수아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하야를 발표하고 광복절 다음 날부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던 전두환이 팔월 이십칠일 유신헙법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고, 국가보위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 종교계 지도자들을 상임위원으로 끌어들이고 학계의 유능한 인재들을 내각에 끌어들여 경제를 살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대통령 임기를 칠 년 단임제로 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위해 오는 시월에 국민투표를 한다고 발표했다며, 총무 일행은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가 이 시점에서 왜 국보위에 참여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개탄을 했다.
모두 한숨을 쉬느라고 잠깐 대화가 끊긴 사이에 이 박사가 성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난해 우리 한민건의 인권세미나에서 시간이 짧아서 한 형의 말을 다 듣지 못했는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향후 민주화운동의 방향 모색이라는 주제의 발제 삼아 그때 이야기를 마저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서두를 꺼낸 뒤에,
여기 한 형은 광부로 서독에 와서, 지금은 지멘스에서 기술연수를 받고 있는 자칭 노동자인데, 일 년 전에 우리 한민건 인권세미나에서 우리들을 향하여 하릴없는 인테리들이 말장난만 하고 있다고 질책하면서, 박정희가 폭력에 의해 제거되면 그보다 더 혹독한 군부독재가 들어선다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 예언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오늘 저는 그 예언이 적중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민주화운동의 향후 전개에 대해 한형은, 군부독재가 쌓아놓은 거대한 댐을 넘쳐 흐를 수 있는 민중의 물결에 역사의 의지가 실리면 군부독재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 것이라고 말한 기억이 나는데, 그 이야기를 오늘 구체적으로 들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고 좌중의 의향을 물었다. 모두 좋다고 하는 바람에 뜨악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나는 성주를 편하게 앉아서 하라며 이 박사가 손짓을 했다.
그러면 앉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모두 저명한 분들이어서 너무 외람된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민주화운동에 대한 견해라고 가볍게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성주는 인사를 마친 다음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 오늘 여러분은 한국의 독재권력 종식과 민주화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자 이 자리에 모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역사의 의지와 미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역사의 의지’라 함은,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뜻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때로는 특출한 독재자나 보수 반동집단에 의해 정체, 퇴보, 굴절되기도 했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에는 언제나 역사의지에 의해 생성, 변화, 발전이라는 진보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원시수렵시대로부터 농경시대로 들어서는 시기, 원시공동체의 지배권력은 제정일치의 군장이 행사했습니다. 이는 원시의 미개한 사람들에게 농경기술이나 불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치산치수 사업을 지도하는 경이로운 사람이 백성의 추앙을 받으며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한 절대의 권력을 행사했음을 말합니다.
농경 사회가 발전하면서 군장의 필요 때문에 대규모 농경이 시작되었고 여기에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종족들과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포로들을 농경 노예로 부리게 됩니다. 농경 노예를 많이 소유한 씨족들이 혼인연맹 등의 방법으로 부족사회를 형성하게 되고, 이들 부족사회의 연맹으로 고대 왕권국가들이 태동했습니다.
우리 겨레의 경우, 고대 왕권국가인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왕권, 달리 말해서 ‘국가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들 부족장으로부터 나온 사실은 여러분께서도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대규모의 농경지와 농노, 그리고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사병집단을 거느린 각지의 호족들이 국가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들 스물이 넘는 호족들의 딸들을 모두 왕비로 맞아 들이는 전무후무한 다중혼인을 통하여 호족의 후계자들을 도성인 송악으로 불러들여, 인질을 겸해서 국정을 분담시킴으로써, 호족들이 행사하고 있던 지방의 지배권력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기에 우리 역사 최초의 통일왕권국가인 고려왕조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광종 때부터 시작한 관료등용제도인 ‘과거’를 통하여 지배권력의 주변에 모인 신진 관료세력과 호족 세력의 대립과 갈등은 고려 중기에 이르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없는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무신정권을 거쳐 고려는 몽골족의 원나라에 종속되어 구십 년 동안이나 종속국가의 치욕을 겪게 됩니다.
이 시기에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유학한 지식인들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고려사회에 도입되었습니다. 고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성리학은 신유학이라고도 불리는 정치학이었고 치세론이었습니다.
공민왕 이후의 고려 사회는 이 성리학을 익힌 지식인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고려 삼은’ 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같은 성리학자들은, 고려왕조의 유지라는 틀 안에서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꽃피우는 새 세상을 꿈꾸었지만,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정치구조의 틀을 근본부터 바꾸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추구했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성계, 이방원 부자를 앞세워 고려왕조의 막을 내리고 <조선>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했습니다.
                                  70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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